상세정보
이한우의 태종실록 재위 12년

이한우의 태종실록 재위 12년

저자
이한우
출판사
21세기북스
출판일
2019-08-29
등록일
2019-09-23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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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냉혹한 혁명가이자 탁월한 국가경영자, 태종 이방원

왜 지금 그를 읽어야 하는가?



새로운 시각과 해석으로 다시 태어난

대한민국 정치 리더십의 고전, 『태종실록』 완역본



“개천을 파는 것이 끝났으니 내 마음이 곧 편안하다”

태종 12년, 한양 개천 역사에 마침표를 찍다



국가는 한 척의 배와 같아서 역량이 부족한 리더가 키를 잡으면 그 배는 침몰한다. 우리는 리더의 역량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해왔다. 리더의 역할과 덕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지금, 가장 가까운 곳 즉 우리 역사에서 답을 찾을 때이다.

원대한 구상을 하고 확고하게 결의하며,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난세를 치세로 바꾼 왕이 있다.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 이방원이다. 『이한우의 태종실록 재위 12년』(21세기북스)은 태종의 재위기간 18년 중 태종 12년의 기록을 완역했다. 태종의 대민정책 중 하나로 꼽히는 ‘개천 공사’가 마무리된 것은 태종 12년의 일이다. 조선은 건국 후 수도를 한성으로 옮겼으나 사실 한성에는 지형적인 단점이 있었다. 높은 남산에서 흐르는 물이 한강으로 잘 빠지지 않아 개천(청계천)의 물이 범람하고 이재민이 생기는 문제가 속출한 것이다. 태종은 환도 후 개거도감을 설치하는 등 지속적으로 개천을 정비하도록 하였고, 태종 12년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해 개천 정비를 끝마쳤다. 이 개천 공사를 통해 우리는 백성을 아끼고 걱정하는 태종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예리한 시각과 올바른 해석을 통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동시에 태종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통찰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기존의 번역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담았으며, 실록 완역본을 처음 읽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번역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도 가슴 한편에 애민심을 잃지 않았던 태종 이방원의 진면목을 확인할 시간이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총 18권으로 발간됩니다.





난세를 치세로 바꾼 18년의 역사,

그 치열한 기록이 펼쳐진다!



태종 이방원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형제들을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 조선의 설계자라 평가받는 정도전을 죽인 ‘냉혈한’… 그에 대한 이해는 즉위 이전의 비정한 면모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태종의 자취를 좇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오랜 기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저자는 최근 역사 저술가로서 매진하며 우리 사회의 기본을 밝혀줄 고전 번역에 힘쓰고 있다. 군주의 리더십 함양의 필독서인 『대학연의』를 비롯해 『논어로 대학을 풀다』 등 ‘사서삼경’ 등을 번역해온 저자의 시선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로 이동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에 이르렀고, 그 성과를 묶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 ‘이한우의 군주열전(전6권)’ 시리즈를 집필했다. 이러한 행보에서 나아가 조선의 여러 왕 중에서도 가장 먼저 『태종실록』을 번역한 이유는 그만큼 태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큰 통찰을 주는 군주인 까닭이다.



나는 왜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 우리의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방대한 실록 번역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를 얻고 싶어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실록 중에서 『태종실록』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 _본문 중에서



태종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부터 왕이 되기까지 냉혹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였지만, 재위기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상왕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외교 전략을 펼치고 관제개혁에 힘쓰는 등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우리가 태종에 집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태종실록』 곳곳에는 세종의 한글 창제의 밑바탕이 된 민본정치의 기조가 담겨 있는데, 저자는 예리한 시각으로 이러한 부분을 짚어내며 태종의 정치철학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세종을 비롯하여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태종을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자, 우리 역사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군주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올바른 번역, 치밀한 해석, 섬세한 역주…

우리에겐 친절한 실록 완역본이 필요하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실록 원문의 편년체 서술을 따라 1년 단위로 책을 구성하여 재위기간 18년의 기록을 18권의 책으로 엮는 방대한 시리즈이다. 실록을 처음 읽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문 번역 과정을 친절하게 담았고, 실록에 등장하는 인물ㆍ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기존 번역물의 오류를 바로잡고 저자의 새로운 해석을 담아냈다. 번역본과 함께 한문 원문을 책에 실었고, 독자들에게 한문 읽기의 묘미를 전하고자 ‘원문 읽기를 위한 도움말’을 통해 저자만의 번역 노하우를 소개한다.



기존의 공식 번역은 한자어가 너무 많고 문투도 낡았다. 게다가 역주가 거의 없어 불친절하다. 전문가도 주(註)가 없으면 정확히 읽을 수 없는 것이 실록이다. 특히 실록의 뛰어난 문체가 기존 번역 과정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_본문 중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논문 표절과 무단인용 문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저자는 최근 연구부정행위검증 민간기관인 연구진실성검증센터에서 실시한 논문표절 예비검증에서 모범 사례로 꼽혔다. 특히 인용문 번역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번역에 대한 저자의 철학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결과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태종에 대한 탐구를 넘어『조선왕조실록』을 편집ㆍ요약본만으로 읽어온 독자들과 기존 공식 번역에 아쉬움을 느껴온 독자들 모두에게 실록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역사의 진면목이 살아 숨 쉬는 우리 고전을 만나다



“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집을 그리워해 다퉈 한강(漢江)을 건너다가 생명을 상할까 염려된다. 마땅히 각 도의 차사원(差使員), 총패(摠牌) 등으로 하여금 운(運-단위)을 나눠 요란(擾亂)하지 못하게 하라.”

_본문 중에서



태종은 환도 후 개천 굴착공사와 정비를 계속했지만, 개천 범람으로 인한 수해는 계속되었다. 이에 태종 12년 1~2월에 대대적인 공사를 시행한다. 5만 2천 8백 명의 인부가 투입되어 하천의 바닥을 파고, 폭을 넓히고 제방을 쌓았다. 또 개천을 가로지르는 흙다리들을 돌다리로 바꾸는 대공사를 실시했는데, 이때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가 만들어졌다. 동시에 혜정교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시전의 행랑을 정비했다. 태종의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조선은 행정적·정치적 체계 뿐 아니라 새로운 수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태종이 정비한 개천, 즉 청계천은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을 관통하며 서울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군주의 덕목은 동서양을 막론한 수많은 고전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우리의 고전에 담긴 선조들의 살아 있는 정신을 발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군인이 일하고 쉬는 법[作息之法]은 파루(罷漏) 뒤에 역사를 시작해 인정(人停)전에 풀어주어 쉬도록 하라[放歇]. 만일 명을 어기고 백성을 과중하게 역사시키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무겁게 (그 죄를) 논하겠다.” 또 병조(兵曹)와 순금사(巡禁司)에 명해 말했다. “인정 후에서 파루 전까지 백성을 역사시키는 자가 있으면 감역관(監役官)을 죄주겠다.” 또 정부에 명해 말했다.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제생원(濟生院) 등의 사(司)로 하여금 미리 약을 만들고 또 막(幕)을 치게 해 만일 병이 난 자가 있으면 곧바로 구제 치료해 생명을 잃지 말게 하라.”_20~21쪽 (태종 12년 임진년 1월 을미일 기사)



도랑을 여는[開川] 역사가 끝났다. 장의동(藏義洞) 입구에서 종묘동(宗廟洞) 입구까지 문소전(文昭殿)과 창덕궁(昌德宮)의 문 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입구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防築)을 만들고, 대소 광통(大小廣通)과 혜정(惠政) 및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 및 신화방(神化坊) 동구 등의 다리를 만드는 데는 모두 돌을 썼다. 개천을 준설하는 역도(役徒)를 풀어주라고 명하니 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전번에는 성을 쌓을 때 밤에 편히 자지를 못해 사람이 많이 병들어 죽었는데, 금년의 역사에는 오로지 상의 은혜를 입어 낮에는 역사하고 밤에는 자기 때문에 병들어 죽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개천도감(開川都監)에서 아뢰어 말했다. “역사에 나와 병들어 죽은 자가 64인입니다.”_79쪽 (태종 12년 임진년 2월 경오일 기사)



“그러나 근년 이래로 수재와 한재가 서로 잇달아 풍년이 들지 못했으나 이미 정해진 부세(賦稅)가 있고 또 잡렴(雜斂)이 있는데 둔전의 세로 더하니 부렴(賦斂)을 가볍게 하는 뜻에 있어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하물며 금년은 개천을 파는 역사와 군량의 비용으로 갈고 심는 것이 혹 시기에 미치지 못한 것이 있으니 둔전의 세를 거두는 것은 더욱 차마 못 할 일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백성의 양식이 풍족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족하지 않으랴”라고 했습니다. 바라건대 둔전(屯田)을 없애 민생을 두텁게 해야 할 것입니다.” _209쪽 (태종 12년 임진년 5월 임인일 기사)



대호군 전흥(田興)을 경상도 부산포(富山浦)에 보냈다. (그에 앞서) 관찰사가 보고했다. ‘왜선(倭船) 17척이 도내의 양주(梁州) 부산포에 내박(來泊)하고 있는데 비록 흥리(興利)를 구실을 삼고 있지만 그 모양이 두렵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흥(興)을 보내 이를 살피게 했다. _338쪽 (태종 12년 임진년 8월 신유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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