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낯설면서도 친숙한 『기록실로의 여행』, 그 속에 감춰진 허구의 진실
『기록실로의 여행』은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방에서 시작된다. 그 노인은 자신의 이름과 과거를 기억해 내지 못하며,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심지어 그곳에 얼마만큼 오래 있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카메라와 녹음기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그는 미지의 화자에 의해 그저 〈미스터 블랭크Mr. Blank〉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독자는 이 화자가 〈우리〉라고 일컫는 대상에 편입되어 어느새 미스터 블랭크를 감시하는 일에 가담하게 된다.
노인은 정신과 신체가 모두 온전하지 못하여 방금 전 생각했던 일도 금세 잊어버리고, 아주 사소한 동작을 수행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낀다. 방에는 그의 과거를 찾는 실마리가 되어 줄지도 모르는 한 무더기의 사진과 몇 뭉치의 원고가 놓여 있고, 그는 그 원고와 사진을 훑어보지만, 사진 속 인물들은 어딘지 낯익은 느낌을 줄 뿐 기억을 복원하는 데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타자기로 친 문서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지그문트 그라프라는 한 죄수의 회고록이 담겨 있는데, 그 내용은 미스터 블랭크가 처한 상황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이는 폴 오스터가 즐겨 사용하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기법으로, 이 두 이야기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에 암시를 던지며 두 이야기가 서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타자 원고를 읽는 사이사이에 미스터 블랭크의 방으로 사람들이 하나씩 찾아온다. 그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안나라는 여자, 미스터 블랭크에게 자신의 꿈을 묻는 제임스 P. 플러드라는 남자, 의사, 소피라는 여자, 변호사 등이 그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한다. 이들은 모두 미스터 블랭크의 과거를 알고 있으며, 그는 자신을 원망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과거에 이들에게 무언가 아주 나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된다.
저자소개
폴 오스터 (Paul Auster)
소외된 주변 인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으면서도, 감정에 몰입되지 않고 그 의식 세계를 심오한 지성으로 그려 내는 폴 오스터는 그 마법과도 같은 문학적 기교로 〈떠오르는 미국의 별〉이라는 칭호를 부여 받은 바 있는 유대계 미국 작가로 미국에서 보기 드문 순문학 작가이다. 독특한 소재의 이야기에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는 현장감과 은은한 감동을 가미시키는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는 그는 현대 작가로서는 보기 드문 재능과 문학적 깊이, 문학의 기인이라 불릴 만큼 개성 있는 독창성과 담대함을 소유한 작가이기도 하다.
1947년 뉴저지의 중산층 가족에게서 태어났다. 콜럼비아 대학에 입학한 후 4년 동안 프랑스에서 살았으며, 1974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1970년대에는 주로 시와 번역을 통해 활동하다가 1980년대에 『스퀴즈 플레이』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미국 문학에서의 사실주의적인 경향과 신비주의적인 전통이 혼합되고, 동시에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명상적 요소가 한데 뒤섞여 있어, 문학 장르의 모든 특징적 요소들이 혼성된 "아름답게 디자인된 예술품"이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작품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문단, 특히 프랑스에서 주목 받고 있으며, 현재 2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있다.
작품 내부를 살펴보면 기적과 상실, 고독과 열광의 이야기를 전광석화 같은 언어로 종횡 무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또한 운명적인 만남과 그리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탄탄한 문장과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결합시켜 독자들을 있을 법하지 않게 뒤얽힌 우연의 연속으로 이끌어 간다.
특히 폴 오스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뉴욕 3부작』은 탐정 소설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3편의 단편을 묶은 책으로, ‘묻는다‘는 것이 직업상의 주 활동인 탐정이라는 배치를 통해 폴 오스터의 변치 않는 주제 - 실제와 환상, 정체성 탐구, 몰두와 강박관념, 여기에 특별히 작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여러 함의-를 들여다 보게 하는 작품이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들은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계속 사건을 추적하지만 사건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지고, 탐정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거나 짓궂은 우연의 장난에 휘말리던 끝에 결국 ‘자아‘라는 거대한 괴물과 맞닥들이게 된다.
『뉴욕 3부작』의 또 다른 재미 중의 하나는 원문을 구성하는 난외주기 형식의 일화들에 있다. ‘자연언어‘의 발견을 둘러싼 여러 제왕들의 실험과 늑대소년의 등장이 다니엘 디포우와 조나선 스위프트의 작품에 끼친 영향, 다리 설계자인 아버지가 미처 완성 못하고 사고로 죽자 그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완성한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에 관한 일화, 어려서 잃은 아버지의 모습을 알프스의 얼음에 갇힌 채로 목격한 아들의 이야기, 창세기 신화와 바벨탑 신화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돈키호테』의 진짜 저자에 대해 저자인 폴 오스터가 작중 인물과 벌이는 논란... 이외에도 고금의 무수한 일화들이 글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자칫 건조해지기 쉬운 자아 탐색의 여행에 즐거운 동반자가 되어 준다. 카프카나 베케트의 주제 의식인 부조리의 현대적 변주이기도 하며 세르반테스의 『동키호테』처럼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로도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다.
뉴욕의 한 담배가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흔한 뉴요커들의 일상을 너무도 현실적으로 체감케 한 〈스모크〉의 시나리오를 담당하기도 했고, 〈블루 인 더 페이스〉에서는 직접 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 밖의 다른 작품으로는 『달의 궁전』, 『공중 곡예사』, 『거대한 괴물』, 『우연의 음악』,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동행』, 『굶기의 예술』, 『빵굽는 타자기』, 『고독의 발명』, 『기록실로의 여행』, 『브루클린 풍자극』¸『빨간 공책』,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의 삶』, 『어둠 속의 남자』, 『보이지 않는』 등이 있으며, 현재 그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내(Siri Hustvedt), 두 자녀(Daniel and Sophie)와 함께 살고 있다.
황보석
1953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불릿파크』,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성스러운 여행 순례 이야기』, 『공중곡예사』, 『달의 궁전』, 『뉴욕 3부작』, 『기록실로의 여행』, 『백년보다 긴 하루』, 『러브 스토리』, 『작은 것들의 신』, 『셀프』, 『존 치버 단편전집』, 『모레』 등 다수가 있고, 편저로는 『알기 쉬운 프랑스어』, 『프랑스어 회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