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법칙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편혜영의 전혀 새로운 소설!
네 권의 소설집과 두 권의 장편소설, ‘하드고어 원더랜드’ ‘악몽의 일상화’와 ‘일상의 악몽화’ ‘세계의 일식’ ‘동일성의 지옥’ 등 작품에 부여된 인상적인 명명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의 수다한 수상 경력들…… 십오 년간의 작품활동을 통해 더할나위없이 충분하게 자신의 소설세계를 보여준 작가의 신작으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마 우리가 편혜영의 소설을 읽기로 마음먹는다면, 그것은 이미 익숙하지만 한층 더 원숙해진 밤의 세계를 예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의 기미에 한없이 예민해지는 밤, 또 그 밤의 감각이 증폭시키는 일상의 악몽들.
하지만 떠밀리듯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십대 청춘에 관한 이야기라면 어떤가. 다단계와 사채업이라는 문제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다면 또 어떤가. 그리고 인물의 내면과 과거의 사연들이 겹겹이 쌓인 이야기라면, 그러니까 삶의 구체적인 풍경과 살아 있는 것들의 냄새로 이루어진 이야기라면. 세번째 장편소설 『선의 법칙』 말이다. 이 소설은 우리가 익히 아는 편혜영의 소설세계에서 무척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를 떠올린 순서대로 쓰였다면 첫 장편소설이 되었을”(‘연재를 시작하며’, 『문학동네』 2013년 봄호) 거라는 작가의 말에 귀 기울여본다면,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해온 것이 편혜영이라는 소설가의 전부가 아닌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신작에 늘 붙기 마련인 “전혀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는 지금 이 순간 전혀 빈말이 아니게 된다. 소설가가 애초에 품었던 하나의 점이, 십오 년이 흐른 지금에야 긴 선으로 이어져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 보내온 간절한 발신음
그다지 친밀한 감정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던 이복동생 신하정이 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 신기정은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식으로 체념한 채, 동생의 죽음을 수습한다. 늘 부모의 눈치를 보며 자라온 탓에 정작 자신이 원하는 바는 모르고 살아온 신기정과 달리, 충동적으로 보일 만큼 자유롭게 삶의 길을 선택하던 동생이었다. 그 때문에 신기정은 동생에게 더욱 마음을 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슬픔이나 그리움 대신, 부채감으로 죽음의 사연을 추적하던 신기정은 동생이 남기고 간 통화내역서에 수차례 찍혀 있는 한 사람의 번호를 발견하고 그의 뒤를 밟는다. 생의 마지막 순간, 동생이 몹시도 만나기를 원했던 사람. 동생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간절히 윤세오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일까.
윤세오는 가스폭발 사고로 아버지를 잃는다. 아니, 사고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해 윤세오를 남기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세오는 자신이 다단계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렇게 외롭고 고통스러운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 자책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와 빚을 갚으라고 위협하던 이수호에게 복수하리라 결심한다. 실패 없이 이수호를 살해하기 위해 이수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악의를 구체화시켜나가던 윤세오에게 어느 날 신하정이라는 이름을 혹시 기억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나타난다.
가족의 예기치 못한 죽음, 그 죽음이 촉발시킨 부채감과 죄책감은 고립된 채 존재하던 두 개의 점, 신기정과 윤세오를 간신히 만나게 한다. 그 점들의 움직임은 작품 전반에 걸쳐 인물들이 맺고 있던 희미하지만 분명한 선을 우리의 눈앞에 그려낸다.
파국에서 시작되는 인물들의 궤적,
다른 점(點)에 가닿으려는 안간힘으로 그려지는 선(線)
이제까지 편혜영의 소설세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아니 이미 파국 그 자체인 현실을 보여주었다면 이 ‘첫 이야기’는 파국에서 멈추지 않고,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려는 인물의 움직임을 조심스레 그려 보인다. 윤세오의 복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이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해 선택한 일종의 존재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인물은 작가에게조차 친숙하면서도 낯선 존재다.
“쓰면서 내내 생각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세오는 살아간다는 것이었어요. 윤세오는 실패했고, 우정과 믿음 같은 것을 잃었고,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한 가족과 집을 잃는데, 그럼에도 살아가죠. 자신의 삶을 잃게 만든 사람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그것 역시 살아나가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윤세오라는 인물은 저에게 있어 한편으로는 친숙하고 한편으로는 낯설었어요.”(편혜영·권희철, 「삶을 위협하는 얼룩으로부터, 얼룩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삶으로」,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
편혜영의 소설 계보에서 몹시 이질적인 이 작품은 그렇지만 다른 복수 서사와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편혜영스러운’ 소설은 아니지만, 역시나 ‘편혜영의’ 소설인 것이다. 윤세오의 복수 밑바닥에 깔린 감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뜨거운 분노나 처절한 슬픔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 감정은 오히려 혼란스러움과 망연자실함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윤세오의 복수는 갑작스러운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또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인물의 선택이다. 삶에 한없이 서툰 존재의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러니까 일종의 삶의 연장술.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윤세오가 이수호의 뒤를 가깝게 쫓을수록, 복수의 실현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슬픔과 그리움의 밀도가 점점 더 짙어지게 된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 또한 동생이 사라졌을 때 떠올랐어야 할 바로 그 감정들 말이다. 그러니 소설의 마지막에 작가는 슬퍼하고 애틋해하는 일, 대상을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일을 “애도의 첫번째 순서”로 놓고 있지 않은가.
홀로 떨어져 나와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한때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홀로 남아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때에 그 연결의 기억은 우리를 다시금 서로에게로 이끈다. 한 점이 다른 점에 가닿고자 하는 이 안간힘으로 그려지는 선, ‘선(線)의 법칙’이 인간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선(善)의 법칙’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