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잭 런던
존 그리피스 잭 런던 (John Griggith Jack London, 1876 - 1916)은 미국의 소설가, 언론인, 사회 활동가이다. 당대에 막 시도되던 상업 잡지에서의 연재 등을 통해서 작품 활동을 벌인 초기의 작가 중 하나이면서, 순전히 작품 활동만을 통해서 전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이다.
런던은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 보호, 사회주의 지지, 노동조합 지지 등의 사회적 의제를 가지고 활동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사회적 성향은 바로 그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잭 런던의 출생 배경은 그의 활동 범위 만큼이나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 플로라 웰먼 Flora Wellman 은 미국 동부 지역으로 이주한 청교도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가 재혼한 후 혼자서 서부 지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녀는 음악 교사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미국 원주민 수 족의 영매라고 주장을 하면서 일종의 대중적 집회들을 이끌었다.
런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점성학자인 윌리엄 체니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런던의 아버지가 불확실한 이유는, 우선 런던이 정식 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고, 그의 출생 기록 등이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 화재로 인해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런던의 임신 직후, 윌러엄 체니는 낙태를 강요했고, 어머니인 웰먼은 절망해서 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부상을 입고 런던을 낳을 수 있었다. 런던은 일시적으로 흑인 노예 출신 유모에게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존 런던 John London 과 결혼하면서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유모인 프렌티스 Prentiss 는 잭 런던의 어린 시절 동안 중요한 후견인 역할을 하게 된다.
양 아버지인 존 런던은 미국 남부 전쟁의 상이 군인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런던은 스스로 책을 찾아 읽으면서 교육을 받았다. 13살이 되던 해, 런던은 유모, 프렌티스에게서 돈을 빌려서 작은 배를 하나 사고, 굴 양식장에서 굴을 훔쳐서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그 배가 부서진 후 그 사업을 정리하고, 샌프란시스코 연안을 순찰하는 공무원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1893년, 17살이 되면서, 런던은 화물선의 선원으로 잠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 와서, 당시 한창 힘을 얻고 있던 선원 조합과 노동 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평생 동안의 신념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여러 직업을 거친 후 그는 고등 학교로 돌아 가서 1896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 버클리 U. C., Berkeyley 에 입학했다. 이 시절 그는 선원들과 모험가들을 만나는 것을 즐겼고, 이 경험이 이후 그의 작품과 이력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 시절 런던은 신문 등의 자료 조사를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윌리엄 체니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답장에서, 체니는 자신은 런던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인을 했다. 자신은 불임이고, 어머니 플로라의 남성 관계가 너무 복잡했으며, 낙태를 요구했지만, 플로라가 런던을 강제로 낳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료 조사 과정에서 런던은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한 상태에서 자살을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윌리엄 체니의 답장과 어머니의 과거 등에 충격을 받은 런던은 대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당시 캐나다에서 불던 금광 열풍에 참여하기 위해서 집을 떠났다.
그러나, 캐나다 유콘 지역의 가혹한 기후에 런던은 건강만 잃고 금광 사업은 실패했다. 1898년 오클랜드의 집으로 돌아온 런던은 본격적으로 집필을 통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상업 잡지들에 소설을 팔아서 돈을 벌었는데, 이 잡지들은 주로 단편 소설들에 대한 수요가 컸다. 런던은 이 수요에 맞춰 단편 소설을 위주로 창작 활동을 했고, 런던에게 글쓰기는 ‘두뇌를 파는 일 Sell my brain"으로 간주되었다.
1900년 런던은 엘리자베스 베시 매던 Eleizabeth Bessie Maddern 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이전부터 사교 활동을 통해서 잘 알던 사이였고, 같은 날, 그의 장편 ‘늑대의 아들 The Son of the Wolf‘가 발간되었다. 그리고 결혼 생활 중인 1903년 런던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야생의 부름 The Call of the Wild‘를 집필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가 좋은 부부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결혼했던 부부는 심한 성격적 차이를 겪으면서 1903년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 직후인 1904년 런던은 신문사의 요청으로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서 일본을 향했다. 그러나 취재 도중 일본 측의 잦은 방해와 런던 자신의 실수 (일본인 통역자를 무고하게 때린 사건)으로 인해서 불과 몇 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귀향했다. 그러나, 이 시절, 런던은 일본의 주요 도시와, 한국 (당시 일본의 식민지), 만주 지역을 방문하면서 동양에 대한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이혼 1년 후, 1905년 런던은 첫 번째 부인의 비서였던 캐미언 키트리지 Charmian Kettredge 와 결혼했다. 그녀는 런던의 열성적인 팬이자 지지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평생의 반려자 역할을 했다. 그녀와의 결혼 이후, 런던은 세계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작품의 모티브를 수집하고 활발하게 소설을 출간했다.
1905년 농장을 산 런던은, 그 농장이 자신에게 "세상에서 아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글쓰기는 이제 농장을 위한 경제적 수단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후로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상업적 판매를 위한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물론 이런 성향이 작품의 질적 저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농장에 대한 애착이 런던의 왕성한 창작욕을 자극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시 울프 The Sea Wolf‘ (1905), ‘화이트 팽 White Fang‘ (1906), ‘아담 이전 Before Adam‘ (1907, 지금 이 작품), ‘The Iron Heel 강철 군화‘ (1908) 등 런던에게 세계적 명성을 쌓아준 작품들이 이 시기에 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쟝르의 판타지와 SF 역시 이 시기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독자 입장에서 런던의 농장은 그의 작품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런던은 농장의 경영과 그를 통한 사업화에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는 일종의 생태 시스템을 구축하여 농장을 경영하고자 했다. 일꾼과 작품, 가축, 사료 등이 일정하게 순환되는 동양식 농업 체계가 그의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미숙함, 투자 기법의 부족 등으로 인해서 그의 농장 경영 자체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1916년 런던은 집 밖 의자에 앉아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그동안의 각종 질병과 알코올 중독, 신장 질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화장되어 농장 주위에 묻혔으며, 1955 년 그의 아내 역시 같은 곳에 화장되어 묻혔다. 런던이 모르핀 등에 중독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했다.
TR 클럽
2014년, 활동을 시작한 TR 클럽의 구성원은 인문학과 공학 등을 전공한 전문 직업인들로, 모두 5년 이상의 유학 또는 현지 생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삶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나, 자신이 관심을 가진 도서와 컨텐츠가 국내에서도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번역을 진행하고 있다.
대기업 직장인, IT 벤처기업가, 출판 및 서점 편집자, 대학 교원, 음악 전문가 등 다양한 직업군을 바탕으로, 본인들의 외국어 능력과 직업적 특기를 기반으로, 모던한 컨텐츠 번역을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