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cm로 싸우는 사람
88서울올림픽 카드, 금다래신머루, 떠버기, 당근송…
‘디자인 기업’ 시대의 시작에는 바른손이 있었다!
“바른손의 카드와 문구들은 사춘기 시절의 나를 디자인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디테일까지 완성도를 챙긴 물건이 주는 감흥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한 꿈을 생각하기에 충분한 씨앗이었다.
그리고 그 완벽에 가까운 물건들이 탄생한 스토리를 접하니 가슴이 뛴다.
글을 읽으며 요즘 시대에 꼭 필요한 경영 철학을 이미 50년 전부터 지켜온 박영춘 회장의 예지력과 발 빠름에 놀라게 된다.
책에 나온 가르침은 경영이라는 낯선 분야에 뛰어든 디자이너들, ‘디자인’을 필두로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지침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디자이너가 왜 경영자가 되어야 하는지,
경영자가 왜 디자인 감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배달의민족 김봉진 대표
“나는 한 장의 카드, 하나의 캐릭터에 서려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놀라운 힘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 1993년 바른손 경영 철학 문서 중에서
카카오, 배달의 민족, 에어비앤비???
‘경영하는 디자이너’의 시대
디자인이 전 산업군을 리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모든 정보가 이미지와 함께 SNS에 유통 되면서 디자인을 중시하는 경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패션, 인테리어, 뷰티 등 전통적인 디자인 분야의 시장도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됐지만, 디자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핀테크, O2O등 IT 벤처 업계에서도 미적 경험을 이해하는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배달의민족 김봉진 대표, 카카오 조수용 공동 대표이사, 뱅크샐러드 박지수 CPO 등이 대표적인 ‘경영하는 디자이너’다. 이들은 제품 디자인, 웹사이트 레이아웃 디자인을 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남다른 브랜드 콘셉트, 창의적인 경영 철학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경영자가 미적 경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기업 성패의 결정적 요소로 자리 잡은 것이다.
1970년, 최초의 디자인 카드를 선보이다
1960~70년대 대한민국에는 ‘예술가는 가난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질 좋고 튼튼한 제품을 만드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며, 디자인은 마지막에 얹는 머리핀 같은 장식적 요소라고 여겼다. 심지어 외국 제품의 디자인을 적당히 베껴 만들어 팔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기업가가 대부분이었다.
이렇듯 문화적으로 척박했던 당시의 기업 풍토와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어온 디자인 기업이 있다.1970년,최초의 디자인 카드를 선보이며 출발한 ‘바른손’이다. 바른손은 ‘디자인’을 창업 정신으로 내걸고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카드와 팬시 시장에 아름다운 경험의 열풍을 일으켰다. 디자인 산업이 전무하던 한국 산업계에서 남다른 미감으로 전에 없던 디자인 카드를 선보이며 시장을 석권한 것이다.
1980년, 문구 시장을 리드하다
1980년대 들어 ‘바른손팬시’로 그 영역을 확대해 문구 시장에 파란을 일으키며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업계 1위를 고수했다. 바른손은 1970, 80년대에 태어난 초기 밀레니얼 세대의 일상을 다채로운 색감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채우는 데 성공했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카드를 고를 때나 생일 파티에 가져갈 선물을 고르기 위해 바른손의 문구 진열대를 서성이면서 자신을 투영할 미적 대상을 선택하는 훈련을 했다. 바른손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취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셈이다.
199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바른손의 광고 포스터를 살펴보면 바른손이 디자인을 어떻게 다뤘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 포스터에는 ‘21세기 아이들은 디자인을 먹고 삽니다’라는 헤드 카피와 함께 팬톤 사의 컬러 칩을 스푼으로 떠먹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좋은 디자인 하나가 아이들의 장래를 바꿉니다.
보고 자란 것이 다르면
아이들의 장래가 달라집니다.
지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지우개가 아니라,
쓰는 것으로 만족하는 연필이 아니라,
아이들의 감각을 자극하고 감성을 높이는
디자인 제품들.
바른손은 우리나라 아이들을 디자인 나라 속에서
자라게 하겠습니다.
아이들의 반짝이는 미래를 키우는
필수 영양소가 되겠습니다.
일본의 ‘헬로키티’가
한국 시장에 진출하지 못한 이유
바른손은 한국의 디자인 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선두적인 역할을 했다. 바른손이 활로를 내면서 모닝글로리, 아트박스가 생기고 팬시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1974년 일본의 팬시 업체인 산리오의 ‘헬로키티’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세계 곳곳의 문구 산업을 장악해 갔지만 일본과 바로 이웃한 우리나라에는 진입하지 못했던 것은 바른손을 필두로 한국의 문구 산업이 이미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 기업이 업계에 새로운 길을 냈고, 한국의 문구 산업은 디자인 경쟁력을 바탕으로 국내 시장을 방어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디자이너와 경영자 사이
바른손 신화의 한가운데에는 창업주인 박영춘 회장이 있다. 그는 기업 경영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수많은 기업인과 시작부터 달랐다. 박 회장은 바른손 상품을 기획하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러면서도 영리 사업임을 잊지 않고 시대의 기류를 면밀하게 읽어내 성공적으로 산업화한 것이 여느 아티스트와 다른 점이다. 그 자신이 금속 조각공으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바른손을 성공으로 이끈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즉, 박영춘 회장은 아티스트와 기술자, 사업가 사이를 균형 있게 오가는 삶을 살았다.
디자인 기업, 50년 경영 스토리
이 책은 바른손 창업주인 박영춘 회장의 50년 기업 경영 스토리를 그 뼈대로 하고 있다. 국내 1세대 경영자 중에서는 지금까지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기에 그의 디자인 창업 스토리는 기록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기업가가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서 회사를 경영할 때 어떤 창조적인 인생을 살게 되는지 알 수 있는 답안지다. 바른손의 성공과 실패 이야기는 2019년 현재 디자인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50년의 시간만큼 묵직한 통찰을 줄 것이다.
책 속으로
1970년대에 인쇄업은 오늘날 IT 산업처럼 최신 미래 산업으로 각광을 받았다. 자연히 을지로 인쇄골목도 지금의 테헤란로처럼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성장의 기운이 넘실대는 동네였다. 그즈음 국내 최초의 주상 복합 아파트인 풍전상가도 이곳에 들어섰는데, 에스컬레이터도 설치되어 있고 스파게티를 파는 양식 당이 들어설 정도로 최신 트렌드가 집약되어 있었다. 45p
카드나 연하장은 메시지를 전하는 종이일 뿐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하던 방식을 따라서 카드를 찍어내던 연하장 업계에 창의적인 에너지가 움트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에게 새로운 디자인을 제품화할 수 있는 뛰어난 조각 기술이 없었다면 이런 아이디어는 단지 아이디어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48p
1970년 바른손카드 창립 당시만 해도 디자인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기술자는 드물었다. 더욱이 일반인에게는 디자인이란 자체가 낯선 용어였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디자인 역사는 짧다. 1954년에 서울대 응용미술학과가 처음 생겼을 정도이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유명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 교수들은 순수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50p
그해 연말, 바른손카드는 시장에 파란을 일으켰다. 첫해에만 연하장 130만 장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가 만든 카드를 사기 위해 직접 찾아온 도매상들이 을지로3가 건물 3층에 있던 사무실 복도부터 1층까지 빙 둘러 줄을 섰다. 마치 아이돌 그룹의 캐릭터 문구 상품을 사기 위해 한겨울 새벽부터 줄을 서는 수백 명의 소녀들처럼. 52p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금속 조각공으로 인정받고, 최고의 카드 기업과 문구 기업을 일궈낸 최근까지 박영춘 회장의 성공을 꿰뚫는 키워드는 ‘아름다움과 정교함’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욱 아름답게, 내 맘에 들 때까지 완벽하게 제품을 만들어냈다. 한 번 볼 것을 수십 번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치는 그 과정 자체에 성공의 요소가 녹아 있었던 것이다. 64p
바른손카드의 직원 수도 350여 명으로 점점 늘어나고 모든 것이 다 잘될 것만 같던 때에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서거하는 일이 벌어지며 갑자기 시장이 경색되기 시작한 것이다. 큰돈을 빌려 사업 규모를 확장했던 바른손카드에 자금 흐름의 압박은 치명적이었다. 결국 1981년 바른손카드는 첫 번째 부도를 맞는다. 76p
삼성, LG, 대우 등 대기업을 제외하고 디자인실을 따로 둔 회사가 없는 시절이었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한다’는 슬로건 하나만으로도 창작하고자 하는 디자이너들의 욕망을 건드린 것이다. 전혀 새로운 분야, 전혀 새로운 시스템, 전혀 새로운 목적으로 무장한 바른손팬시는 1983년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83p
바른손팬시가 시장을 강타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구나!’ 깨달았다. 당시만 해도 독자적인 디자인을 개발하는 회사는 거의 없었고, 눈동냥 반, 귀동냥 반으로 디자인을 흉내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본 캐릭터를 살짝 베껴서 토끼 귀를 좀 길게 한 다음 리본을 붙이는 방식으로 소위 ‘짝퉁’ 상품을 양산했다. 사용하는 색깔도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등 몇몇 원색이 고작이었다. 102p
1989년 탄생한 금다래 신머루는 한국 디자인 역사에 전무후무한, 전통문화가 담긴 캐릭터다. 야무진 여자아이 금다래와 어수룩한 신머루의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를 우리나라 사계절에 맞게 표현해 냈다. 104p
‘올해 어떤 상품이 히트 칠까’를 두고 다 같이 투표를 한 뒤 결과를 보면 박영춘 회장의 적중률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그는 트렌드를 감지하는 능력이 거의 동물적으로 발달해서 다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실무자보다도 제일 정확하게 알았다. 프로 디자이너보다 더 예리하고 정확하게 디자인을 짚어내고, 섬세하게 수정을 지시하는 감각이 놀라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어떤 디자인의 상품을 얼마에 팔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박 회장은 디자인과 가격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완벽하게 해냈다. 109p
바른손팬시가 처음 생길 때만 해도 ‘디자이너’가 아니라 ‘도안사’라고 불렸다. 대부분의 기업이 외국 제품의 디자인을 베끼기 바빴는데, 바른손은 자체적으로 디자이너를 모집하고 직접 교육시켜서 시장을 선도했다. 113p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문구 시장은 일본의 거대 문구 기업과 대항하기에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산업군으로 성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헬로키티를 메인 캐릭터로 내세운 산리오는 1990년대 홍콩과 싱가포르, 중국 등 거의 모든 아시아 지역의 문구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하지만 한국 문구 시장에는 IMF 사태 이후에야 한발 늦게 진입할 수 있었던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115p
초등학생을 타깃으로 한 브랜드 꼬마또래, 중고등학생을 위한 브랜드 크리아트, 편안한 디자인의 생활용품 컨츄리하우스, 무인양품 스타일의 모던한 디자인의 실용선언 등 다양한 브랜드 상품이 출시됐다. 모든 브랜드는 팀 책임 제도로 운영됐는데, 당시로는 굉장히 선진적인 시도였다. 137p
1998년, 대출 상환 기한이 점점 다가왔다. 20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한 바른손팬시가 곧 부도 처리될 상황을 앞두고 있었다. 박영춘 회장은 1981년 바른손카드 첫 번째 부도 사태의 혹독한 경험을 치른 이후 두 번째 겪는 일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도 박 회장은 의연했다. 평소처럼 단전 호흡을 하고, 집에서 크로키도 그리고, 음악도 들으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최종 부도 처리되던 날, 그는 바른손팬시의 수장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을 모두 포기했다. 타고 다니던 회사 소유의 자동차마저 주차장에 세워두고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166p
기적 같은 반전이 일어났다. 주식 거래 정지 기간에 바른손팬시를 매입한 사람이 다른 기업에 이 주식을 매각한 것이다. 바른손팬시의 주식이 다시 상장되자 주가가 엄청난 기세로 뛰었다. 박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10%의 주식이 엄청난 자본으로 돌아왔다. “30년 동안 사업을 했는데, 부도 직후 가장 많은 현금을 손에 쥐게 됐어요. 아이러니죠.” 이제 사업가로서의 인생은 모두 끝난 건가 생각했던 박 회장에게 또 다른 도전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168p
당시 목돈을 가지고 있던 부자들이 집중적으로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박영춘 회장은 거액의 주식 매각 대금을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고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IT, 게임 사업에 도전해 또 다른 도약을 꿈꿨다. 169p
바른손카드가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다시 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온라인 전자상거래 시스템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e-카드 투자 실패가 결국 바른손카드의 다음을 세울 수 있는 중요한 초석이 됐다. 175p
60대 초반의 나이에 언어와 문화 모두 낯선 중국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일은 30여 년간 사업을 하며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박 회장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부동산 임대 수익으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도, 그는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살기를 바랐다. 178p
바른손카드가 한국에서 최고의 카드 기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남다른 디자인 감각, 완벽주의 덕분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바른손의 이런 강점이 먹혀들지 않았고 전혀 다른 룰이 적용되었다. 완벽한 완성도의 상품, 디자인이 아름다운 상품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가장 저렴한 가격이 제품 선택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195p
자신이 기획한 대로 새롭게 일이 진행되는 과정 자체를 즐겼던 박영춘 회장은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정체 상태를 견디기 어려웠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중국 진출 3년 만에 말이 어눌해지는 언어 장애 증상이 시작됐다. 그때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된 이후 파킨슨 증후군이 발병해 현재까지도 투병 중이다. 199p
중국 시장에서 한국 자본으로 만든 기업이 자리 잡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한 박영춘 회장은 바른손카드 상하이 법인이 철저히 중국 기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206p
바른손카드 상하이 법인은 초기에 임대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해 오다 2008년에 6만 6000㎡(2만 평) 대지를 구입해 상하이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중국 진출 7년 만에야 카드 제작에 최적화된 바른손카드다운 공장을 중국에 세우는 데 성공한 셈이다. 207p
박 회장은 미술도 음악처럼 사람들이 더 쉽게 접할 수 있어야 고급 미술 시장도 더욱 발전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바른손카드가 50년 가까이 쌓아온 고급 인쇄 기술을 활용해 원화만큼 질 좋은 그림을 인쇄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인쇄 기술자와 협력해 작품 표면의 울퉁불퉁한 질감, 즉 마티에르를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2004년 특허를 냈다. 211p
“나는 내 삶이 성공했다고 보지 않는다. 내 방법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개인이 재주가 있어서 첫 시작부터 성공적이었지만, 그 성공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뛰어난 개인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긴 호흡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쌓아나가는 재미를 알길 바란다.” 21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