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에 한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비문해 어르신들을 괴롭히는 것, 답답해서 피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가장 힘든 일은 관공서에서 서류 발급을 신청하는 일이다. 서명하라는데 서명이 뭔지도 모르겠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발을 동동 구른다. 그다음이 병원이나 은행 업무다. 소포나 등기 수령도 회피하고 싶은 일 중 하나다. 물론 대중교통 이용도 어렵고 힘들다. 어떤 분은 전세인 줄 알고 집을 구했는데 매달 돈을 달라고 하더란다. 월세였던 것이다. 이렇듯 글을 몰라 낭패당한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또 다른 어르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행에 갈 때는 늘 팔걸이를 하고 다녔다. 팔을 다친 척하면서 창구 직원한테 대신 써달라고 했다. 글자를 모른다는 말은 죽기보다 하기 싫었다. 그래서 은행에 갈 때마다 팔이 부러져서 깁스를 했다고 장황하게 설명해야 했다. 지점도 바꾸어가면서 멀리까지 가기도 했다. 직원이 의심할까 봐. (p.37)
어떤 분이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서예반에 들어갔다고 자랑하신다. 글을 모를 때는 언감생심 생각도 못한 일이다. 먹을 갈고 붓을 씻으면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꼬집어 본다. 서예실에 앉아 있는 것이 꿈만 같다. 배운 글씨를 직접 써본다. 연필이 아닌 붓으로. 누가 이 기쁨을 알겠는가? 글자를 대하는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작품 전시도 하시리라. 병풍이라도 만들어서 가보로 남기실지도 모른다. 역사는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씨앗 하나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다. 시작은 한글교실이다. (p.124)
무엇보다 글자에 눈이 간다. 세상에는 남에게 묻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글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꼭 남에게 물어봐야 마음을 놓는 습관을 고치게 된다. 병원 간판 적어오기, 상점 이름 적기, 상품 이름 적기, 아파트 이름 적기, 주변에 걸려 있는 현수막 내용 적기, 지하철 내 공익 광고문 읽기 등 글자를 인식하고 문자와 가까워지고 친해지는 훈련을 한다. (p.141)
처음 어르신들과 함께 햇을 때 내 눈에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였다. 늙은 육체만 보였다. 중학생들만 몇십 년을 보다가 연세가 높은 분들을 대하니 어렵고 무서웠다. 안을 모르니까. 지금은 겉은 보이지 않고 속만 보인다. 내면의 순수함, 열의, 나아지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진취성과 성취욕구, 얼굴을 바라보면 주름은 간데없고 해맑은 미소와 초롱초롱한 눈빛만 보인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늙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학습이 가능하다. 함께하는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마음만 보이기 때문에 더욱더 사랑이 깊어진다. (p.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