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단언컨대, 남성차별·남성혐오는 없다”
여성혐오와 자기 연민으로 얼룩진
한국 남성 문화를 고백하며
페미니즘으로의 연대를 외치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사 년이 흘렀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그동안의 격렬한 논쟁은 이제 남성차별과 남성혐오라는 키워드를 우리 사회 전면으로 불러냈다.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남성들은 ‘솔직히 요새는 여성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다’ ‘가부장제 그거 다 옛날얘기고, 요즘은 남자도 차별받는다’ ‘여자들의 남성혐오는 더하다’라고 부르짖으며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비루하고 억울한지 전시한다. 언론 매체도 남성들의 목소리를 부채질한다. 중앙일보에서는 “20대 남성도 약자”라는 기사를 내고, MBC스페셜에서는 “이 남자, 분노하다”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 최근 1년 새 네이버 검색어 빅데이터 추이를 보면, ‘남성혐오’라는 키워드가 검색되는 양이 ‘여성혐오’ 키워드를 점차 따라잡고 있고, 때에 따라 역전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우리 사회에 본격적인 ‘백래시’가 드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묻는다. 과연 2019년 한국 사회에서 ‘남성차별’과 ‘남성혐오’라는 개념은 성립 가능한 것인가? ‘사회’라는 것의 태동에서부터 늘 ‘정상’이자 ‘보편’의 위치를 독점해 온 남성들이, 차별적 대우, 혐오의 시선, 실존의 공포에 휩싸인 여성의 삶, 즉 타자로서의 삶을 한순간이라도 진정 경험해봤다고 언급할 수 있는가? 남자들이 자신의 삶에 관해 툴툴댈 때, 여성들은 ‘여성스러움’이라는 말로 포장된 코르셋에 갇혀 자랐고, 남성을 만날 때는 데이트 폭력과 불법 촬영을 수시로 걱정해야 했으며, 결혼하자마자 경력이 단절된 채 남편의 ‘노동 보조자’가 되어 독박 육아로 아이를 길러내고 가사 노동을 전담하다가, 집안에서 돈 쓸 일이 많아지면 자신의 전문성을 살리지 못한 채 비정규직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러한 삶의 경로에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공포는 기본 전제인 양 깔려 있었다. 으슥한 골목길, 음습한 화장실, 혼자 사는 원룸은 물론, 이성 교제, 대중교통, 가정생활 등 일상을 수행하는 모든 나날에 여성들은 ‘누군가 맘만 먹으면 나를 해할 수 있다’라는, 언제든 강력 범죄의 표적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다.
2019년 오늘의 한국 남성 주류 문화 속
‘여성’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형상화되는가
남성들이 말하는 남성혐오는 사실 그간 남성들이 ‘여성’을 자의적으로 정의하던 남성 중심적 젠더 관념에 뿌리내린다. 저자는 한국 남성 주류 문화가 ‘여성’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형상화해왔는지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1) 성애의 대상이었다. 여성 알바생이나 여성 직장 동료가 친절하게 웃어주면 자기 멋대로 호감 신호라고 해석해 무작정 들이대고, 집에서는 다른 남성이 몰래 찍어 유포했음이 분명한 불법 촬영 영상을 다운받아 보며, 대학교 남자 학우 단톡방에선 같은 과 여성 학우의 외모와 몸매에 대해 ‘품평’한다. 한국 남성 두 명 중 한 명이 성 구매 경험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을 ‘성애를 해소하기 위한 신체’로 여겨왔다.
2) 엄마의 표상이었다. 허울뿐인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가사 노동을 도맡고, ‘모성애’의 화신으로서 육아를 일임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이구, 우리 아들 그래쪄요”라며 남성의 기분을 알아서 챙겨 주는 ‘대리 엄마’의 상(像)을 여성들에게 씌웠다. ‘전적으로 희생하는 어머니상’에서 벗어난 여성의 모습엔 어김없이 신체적 폭력이 가해졌고 ‘가부장제적 교정’의 압박이 뒤따랐다.
3) 남성의 언어로 규정되는 타자였다. 남성 예술가들은 툭하면 여성을 ‘조립식 침대’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 ‘돈만 쥐어 주면 태워주는 차’라고 묘사하며 대상화를 일삼았다. ‘진보’를 자처하는 남성들 역시 버닝썬 게이트를 희화화하거나 사소화하며 자신들만의 ‘대의’를 큰소리쳤다. ‘평범한’ 남성들이 즐기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김여사’ ‘맘충’ ‘XX녀’ 등 여성을 향한 편견 어린 명명은 흔한 일이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들이 자신의 언어를 되찾기 위해 주체적 발화를 시작하고 남성 중심 언어 세계에 균열을 내자, 남성들은 ‘여성들이 남성혐오 한다’라며 발끈했다. 그간 남성들이 범해 온 언어적 젠더 폭력은 말끔히 잊은 채로 말이다.
이러한 한국 남성 주류 문화를 두고 저자는 “한국 남자를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은 ‘집단적 자기 연민’이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피해 보는’ ‘약자의’ 위치에 놓으며 스스로의 악행 혹은 찌질한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강자성’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니 더욱 문제다.”(77쪽)라며 날카롭게 꼬집는다. 남성차별과 남성혐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혐오와 자기 연민으로 얼룩진 남성문화, 그리고 그에 균열을 내는 페미니즘 리부트만이 존재할 뿐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수용’을 기준으로 구분선을 뚜렷이 그으며, 남성들에게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선택을 과감히 요구한다. 남성 중심적 질서라는 타성에 젖은 채 있지도 않은 ‘남성차별’을 내세우며 억울함과 자기 연민만을 되뇌는 ‘도태남’으로 남을 것인지, 과거를 성찰하고 인권을 고민하고 혐오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페미니즘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업데이트남’으로 변모할 것인지. “올드 보이들은 억울할 것이다. 앞서 ‘혐오’라고 일컬은 것들은 그들에겐 관습이었고, 권장되는 일이기까지 했다. … 그런데 시대가 달라졌다. 젠더 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시선과 잣대로 세상을 규정하는 관습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많아졌다.”(142쪽) 다행히 선을 넘는 첫걸음은 어렵지 않다. ‘올드 보이’로 살아온 지난날을 반성하고,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성공적인 시작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을 향해 혼자 가지 않는다. 느리더라도 다른 남성들과 함께 한 걸음의 진보를 내딛고자 한다.
‘한국 남자’이기에 ‘한국 남자’에게 전할 수 있는 메시지
“나도 부끄러우니, 당신도 조금은 부끄러웠으면 좋겠다”
이 책은 2018년 양성평등 미디어상 여성가족부 장관상을 받은 《오마이뉴스》 박정훈 기자가 남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던 일들이 왜 여성혐오인지 밝히고자 삼 년여 동안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써 온 글을 엮어낸 책이다.
1장에서는 ‘평범한’ 남성들이 여성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 생각 없이 행하는 젠더 폭력을 면밀하게 해부한다. ‘저 여자가 내 마음에 든다’라는 이유로 무례하게 들이대고, 거절당하면 ‘네가 꼬리 쳤잖아’라면서 여성을 비난하는 행태는 남초 커뮤니티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만나는 과정에선 가스라이팅과 언어폭력을 일삼고, 헤어지고 나면 왜 안나 주냐고 협박하며, 심각한 경우 살인?폭행?강간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남성들은 자기 자신을 ‘고백했다 차인 또는 나쁜 여자에게 잘못 걸린 불쌍한 남자’라며 스스로 가여워한다. 남성 중심 사회는 남성들의 이러한 ‘피해자 되기’ 서사를 위해 복무한다. 법원은 여자 친구를 살해한 남성을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벌인 범행’이라며 집행유예로 풀어주고, 방송가는 여성을 향한 폭력을 ‘상남자의 로맨스’라고 포장해 버젓이 내보낸다. 저자는 이와 같은 주류 남성성을 강하게 비판하며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비뚤어진 남성성을 바로잡고” “남성들을 착각의 늪에서 구해” 내며 “여성과 동등하게 관계 맺는” 법을 습득하는 방법론으로 페미니즘을 제안한다.
2장에서는 ‘남성차별’ ‘남성혐오’ 키워드로 대표되는 역차별론의 허상을 낱낱이 파헤친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무고한 남성들을 강력 범죄의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가고 있다’라며 분노하는 남성들에게, 여성들이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까지 여기며 걱정하고 두려워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고 촉구한다. 최근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안티 페미니즘이 ‘계량적 공정 담론’에 기반을 둔 피상적 착시에서 비롯한 것임을 설명하고, 남성들이 당연한 듯 누리면서도 끝끝내 부정하려 하는 젠더적 수혜의 존재를 사실관계와 통계 자료를 통해 냉철하게 입증한다. 더불어 ‘대림동 여경 혐오 사건’ ‘SBS 라디오 배텐 막내 작가의 부당 전출’ ‘여성 음악가가 배제되는 방식’에 관해 분석하면서, 앞뒤 헤아리지 않고 욱한 남성들이 부당한 젠더 권력을 행사함에 따라 ‘일하는 여성’들이 어떻게 주체적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마는지 진단한다.
3장에서는 일상의 영역까지 모세혈관을 뻗은 여성혐오와 젠더 불평등을 톺아본다. 비만 또는 과체중에 해당하는 사람의 비율은 남성 쪽이 훨씬 높음에도 정작 살을 빼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성별은 여성이다. 남성이 외제차를 사면 능력 좋은 남자고 값비싼 산악자전거를 사면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인데, 커피나 의류를 소비하는 여성에게는 ‘된장녀’ ‘김치녀’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비장애인 남성만이 편하게 이용하도록 설계된 상가 화장실에서 여성들은 기본적인 생리 현상마저 경계심과 두려움을 품고 해결해야만 한다. 여성 대상 범죄 신고를 받고 출동한 남성 경찰들이 여성의 현실에 무지할 때 벌어지는 참사는 또다시 반복된다. 저자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이 느끼는 안락함이 대부분 여성들의 희생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임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증명하면서, ‘자연스럽게’만 보이는 ‘일상’의 취약함 그리고 그 아래 숨겨진 거악을 들여다본다.
4장은 남성들이 스스로 특권을 누린 ‘가해자’였음을 인정하고, 페미니즘을 통해 함께 성찰하고 변화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저자는 단지 선언적 메시지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은 여타 남성들과는 달라 젠더 불평등 문제와 무관하다는 제삼자적 시점을 자임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여러 번에 걸쳐 고백한다. “스스로 ‘깨어 있는 남자’라고 자부했다. 대학에서 페미니즘 관련 교양 수업을 세 개 듣고선 페미니즘을 다 아는 양 떠들었다.”(5쪽) “나는 어릴 적부터 가사 노동에서 자유로웠다. 솔직히 말해 《82년생 김지영》의 ‘동생’ 같은 존재다.”(49쪽) “나는 몰카 문화 안에 속해 있던 가해자다.”(109쪽) “부끄러워졌다. 나 또한 여성 음악가들의 음악을 ‘감성팔이’라고 내심 깎아내리며, 남성 평론가들의 비평에 힘을 실어 줬다.”(139쪽) “‘나 정도면 괜찮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아니었고, 아마 당신도 아닐 것이다.”(272쪽) “그에게 무슨 말이든 편히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음에도, 성 구매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비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285쪽)
그래서 저자의 주장은 한국 남성 문화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우리 함께 반성하자고, 변화하자고, ‘페미니즘 하자’고, 같은 ‘한국 남성’으로서 절실히 외친다. “매번 이런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 ‘나도 부끄러우니, 당신도 조금은 부끄러웠으면 좋겠다.’ 결국 ‘남자’가 문제고, 남자들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316쪽) 페미니즘이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던 2015년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한 저자는, 수많은 페미니즘 활동가를 만나고 운동이 발현하는 현장을 직접 발로 뛰고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의 자료를 손수 수집하며, ‘날 것의’ ‘살아 있는’ ‘생동하는’ 이야기를 그러모았다. ‘한국 남자’이기에 ‘한국 남자’에게 전할 수 있는 저자의 투명한 고백은, ‘페미니즘이냐, 안티 페미니즘이냐’라는 갈림길에 처한 2019년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이 어느 쪽인지 희붐하게 비춰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