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과 풍요의 윤리학
지식의 궁극적 목적은 ‘좋은 삶’이다
『번영과 풍요의 윤리학』은 24세기에 걸친 인류의 철학과 정치사회사상뿐만 아니라 진화생물학, 심리학, 뇌과학의 최신지식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폭넓은 교양서’다. 저자인 마시모 피글리우치는 철학과 유전학 두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생물학교수였다가 현재는 철학교수로, ‘백과사전적 지식’을 뽐내는 이러한 책의 저자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된 모든 지식은 앎 그 자체의 기쁨이나 교양인의 “지적 대화”에 봉사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내용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하나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간다. ‘최고의 삶’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즉,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해답으로서의 지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현실적인 목표를 가진 책이라 하겠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좋은 삶, 행복한 삶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저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좋은 삶이란 덕의 윤리에 따라 아크라시아(의지박약)를 극복하고 에우다이모니아(번영과 풍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유전자에서부터 이기적이라서 본능과 감정에 충실해야 행복해진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도무지 요령부득인 도덕예찬론 아닌가. 그런데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우리를 좌절의 구렁으로 한 걸음 더 밀어넣는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계속해서 덕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즉 올바른 이유를 위해 올바른 일을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처럼 인생을 과제로 이해하는 관점을 따르면, 어느 시점까지 착하게 살다가 이후에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 경우, 그 사람의 일생에 대한 평가가 폄하되거나 심하게 훼손될 수 있고, 초반엔 대충대충 살았지만 이후에 높은 도덕적 기반을 되찾은 경우 우리는 그런 사람을 기특하게 여길 수도 있다.”(12쪽)
한마디로 에우다이모니아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멈출 수 없는 부단한 과정이란 말씀. 너무 좋은 말인 나머지 무척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실상 우리에겐 이 외에 다른 어떤 가능하고 올바른 삶의 방식이란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