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시간에 의해 저물던 일흔넷에 만난 놀라운 축복, 놀라운 고통의 시작!
어느덧 일흔을 맞이한 영원한 청년 작가 박범신의 마흔두 번째 장편소설 『당신』. 이번에 저자가 파고든 주제는 노년, 기억, 죽음, 애도 그리고 사랑이다. 지난 2월부터 7월까지 문학동네 네이버카페에 ‘꽃잎보다 붉던―당신, 먼 시간 속 풍경들’이라는 제목으로 일일 연재했던 작품으로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통해 한평생의 삶과 사랑과 관계, 그 현상과 이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2015년, 일흔여덟 살의 주인공 윤희옥이 이제 막 죽어 경직이 시작된 남편을 집 마당에 묻고 있다. 마치 오랫동안 남편의 죽음을 준비해온 것처럼 부인 윤희옥의 뒤처리는 섬세하고 깔끔하다. 그런데 일을 마친 윤희옥이 경찰서를 찾아 남편이 실종되었다고 신고를 한다. 그녀는 왜 사망 신고 아닌 실종 신고를 하게 됐을까?
정신과 육체의 에너지 흐름이 이처럼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면서, 결코 밝히고 싶지 않았을 한평생의 인내, 헌신, 사랑의 이면을 부인과 딸아이에게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게 된 주호백.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에 윤희옥은 애써 감추고 또 잊고자 했던 지난 삶의 순간들을 복기하기 시작한다. 혁명을 꿈꾸었던 김가인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고 그의 아이까지 갖게 되었지만 그가 감옥으로 붙잡혀 들어간 후 주호백에게 구원을 받은 윤희옥.
인내와 헌신으로 시종하는 주호백의 삶과 사랑은 2009년 치매에 걸리면서 무너져가고, 억눌러왔던 내면이 그 틈으로 하나둘 비집고 나오더니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치매와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남편 주호백을 간병하면서 윤희옥은 그가 부정, 분노, 협상, 우울의 단계를 차례로 거친 후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끔 돕는다. 자신의 몸속에서도 치매가 이미 진행 중이었던 걸 모른 채, 남편의 염원대로 그를 안락사 시키고 제 손으로 남편을 묻었다는 사실을 이내 잊고는 돌아올 리 없는 남편을 남은 생애 매순간 기다리며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