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말을 들었고 너는 거짓말을 들었다
여기, 두 개의 명제가 있다.
새로운 시간은 느리게 간다.
알고 있는 시간은 지루하다.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보면, 처음 볼 때보다 분명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씬들은 더 빠르게 지나간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만, 시간은 오히려 더 짧게 느껴지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유년 시절을 떠올려 보자. 아이에게는 고작 하루의 시간조차 아침, 오전, 점심, 오후, 저녁, 밤으로 이어지는 대서사시와 같다.
현재의 나날은 어떠한가? 어른에게는 ‘이런, 또 일주일이 지나갔군!’이다.
새로운 경험들로 가득 차 있는 시간과, 반복의 연속일 뿐인 시간이 빚는 속도감의 차이. 나이 들면 점점 더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는 이러한 경험은, 불행하지만 사실이다. 모두가 언젠가는 직접 느끼게 된다. 생일 케이크의 촛불 개수가 늘어날수록 더욱 더 실감하게 된다.
이것은 착각일 수도 있고, 뇌 속에서 벌어지는 엄연한 물리적 현상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우리들의 삶(人生) 속에 실재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말하자면 ‘영원’에 지친 끔찍하리만치 늙은 노인과도 같을지 모른다. ‘그녀’에게는 이 우주의 어느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그렇다면 ‘그녀’에게는 1억 년의 시간조차 한순간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동시에 파리의 날갯짓 한 번조차 영원처럼 지루할 지도 모른다. ‘그녀’의 발 아래 꼬물거리는 인류 사회의 모습?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미 정답이 반짝였을 것이다. 백만 번은 본 듯한 단순한 개미 떼의 행렬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그것을 내려다보는 당신의 눈이 그러할 테니까.
‘그녀’의 경우를 인간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은 실례이자 잘못된 비교일 확률이 크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시간은 늘 느리게 간다.
그리고
알고 있는 시간은 지루하다.
그러므로 ‘그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리란 생각, ‘그녀’가 일개 행성의 생명체 한둘의 일생에 관심을 초롱초롱 쏟고 있으리란 믿음에는 분명 재고(再考)가 필요해 보인다.
왜 세상이 이 모양인가?
이것이 정녕 ‘그녀’의 뜻인가?
이러한 소모적인 논쟁에 새삼 불을 지피자는 것이 아니다. ‘그녀’와 <‘그녀’들>에 관한 오랜 논쟁을 서둘러 한쪽으로 결론짓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는 이제 ‘그녀’를 배제한 채 인류의 시간을 논하는 것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는가 할 뿐이다.
어쩌면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했어야 할 고뇌일 지도 모르기에…….
― 픽슨 파울리 Jr.의 <시간>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