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서얼 출신의 잔인무도한 장사꾼 ‘운현’
여태까지 이런 사내는 본 적이 없었다. 기개 높은 선비처럼 고결한 풍모를 지녔으면서도 그 안에 서린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죄인의 목을 베는 살수의 그것과도 같았다.
반가의 규방 처녀에서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한 여인 ‘온희’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사대부 출신의 노비 계집이었다. 아니. 사납게 정신을 어지럽히는, 고고하고 품격 높아 재수 없는 계집이었다.
비천한 신분으로 떨어지고도, 세상 어디에도 예전처럼 저를 고귀히 여겨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여 없애지 않는 양반의 근성이라니. 지독하고 끔찍했다. 대할수록 부서뜨리고, 망가뜨리고, 시커멓게 때를 입히고 싶어 속이 근질거렸다.
<본문 중에서>
“이 오라질! 염병을 앓다 말라 죽을 놈!”
온희는 행랑채 사내종들이 쓰던 욕을 울컥 쏟아냈다. 어머니께서 아시면 놀라 혼절하실 테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오늘 그녀는 여기서 죽자고 마음먹었다. 더는 못살겠다, 내 오늘 그동안의 울분을 모두 쏟아버리고 이 사내에게 맞아 죽어버리자 다짐했다.
사내의 얼굴에 무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어 손찌검이라도 해 댈 것처럼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온희는 도망칠 데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겁먹은 눈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경기라도 하듯 온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그 순간,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무장하고 있던 그가 별안간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천하에 없는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배를 잡고 웃어댔다.
온희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문득 실성한 미치광이라도 보고 있는 양 그녀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 예측할 수 없는 사내에게 맞서려한 게 너무나 큰 객기가 아니었나, 비로소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분노로 잊고 있던 두려움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아, 아머니…….’
“회임인가?”
대뜸 찌르듯이 묻는 말에 온희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충격과 두려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조마조마해 혼절할 것만 같았다.
“나를 속이지 말라 하였다. 네게 수십 번 기회를 주었어. 조금 지나면 이야기하겠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다. 흥, 그런데 뭐? 발을 헛디뎌 넘어져? 남의 집 대문 앞에 가서 요상한 짓거릴 하지 않나. 이젠 제 몸을 해하며 태에 든 것을 떨어뜨리려 해? 누구 맘대로!”
서안을 쾅 내려친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온희는 움찔해서 간신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가 잡아 죽일 듯이 험악한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며 울분에 몸서리를 내고 있었다. 지독한 격노였다. 세상을 전부 태워버릴 노염이었다.
“넌 내 재산이다. 이 세상천지에 네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 줄 아느냐? 모두 다 내 것이다. 네 몸도 내 것이고, 네 몸 안에 든 것도 내 것이야. 다시 내 것을 해하려 한다면…… 그땐 내가 직접 죽여줄 것이다. 낳아라. 내 것이니 낳아.”
“낳아 무엇 합니까?”
내내 죽은 듯이 움츠려 있던 그녀가 내놓는 말에 운현의 표정이 더욱 사나워졌다.
“뭐?”
“종년의 자식, 낳아서 어찌할까요? 키워서 시동(심부름하는 어린 종)으로 부리려 그럽니까?”
체념의 소리. 한 깊은 소리였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고통과 탄식이 절절이 밴 말이었다. 그것이 운현의 가슴을 아프게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