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저맨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와 『달려라 토끼』의 ‘래빗’ 사이
전후의 불안과 허무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문제적 인물, 진저맨
세계문학사상 최고의 문제작이자 J.P. 돈리비(J.P. Donleavy) 최고의 걸작 『진저맨The Ginger Man』이 국내 최고의 번역가 김석희와 만나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된다. 이 작품은 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반영웅적 인물 시배스천 데인저필드(진저맨, ‘생강색 머리의 남자’라는 뜻)를 등장시킨 활기 넘치는 소설로, 출간과 동시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논란의 중심에 놓였다. 그 이유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서술이 때로는 당혹스럽고 난삽해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신성 모독적이고 음란한 내용, 비속한 표현, 초도덕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수백 가지 판본으로 5천만 부 이상이 팔리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처음에는 선정적인 내용으로 저평가되었지만, 이후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새로운 의미들이 밝혀졌고, 《모던 라이브러리》 20세기 100대 영문학으로 선정되면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최고의 악한 소설”, “코믹하고 불결하고 감동적인, 당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 소설은 독특한 서술 기법과 기존 문학계의 잣대로는 도저히 규정지을 수 없는 전대미문의 문제적 인물 시배시천 때문에 평론가들 사이에 일관된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다. 제임스 조이스를 연상시키는 내적 독백과 독특한 서술기법, 헨리 밀러의 시적인 문체,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한 유머, 라블레적인 즉흥성과 쾌활함을 모두 담고 있으면서도, 어떤 기성 작가의 작품도 닮지 않은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옮긴이는 작품 해설에서 “돈리비는 돈리비 외에 누구도 아니다”라고 했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시배스천 또한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세계문학사에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그의 사전엔 눈치나 배려, 신뢰, 책임감 따위는 없다. 그의 삶은 오로지 여인의 육체를 탐하는 기쁨, 섹스의 기쁨, 술의 기쁨, 그를 아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나누는 우정의 기쁨 등 몇 가지 쾌락을 중심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 작품은 모두 3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배스천과 그의 아내, 친구들, 연인들이 등장한다. 시배스천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스물일곱 살의 청년으로 아내 메리언과 딸 펠리시티와 함께 살아간다. 집안의 가장이지만 가정을 돌보는 데 무책임하고,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공부는 뒷전인 데다, 술 마시고 여자를 유혹하는 데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고 싶지 않다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것도 아닌, 기존 질서와 관념을 교란시키지만 사회적 저항도 아닌, 불결하고 불량하지만 품위를 강조하는, 거칠고 방종한 행동 이면에 당당하고 아름다운 비애가 흐르는 시배스천. 그에 대한 정의는 어떤 말로도 도저히 설명 불가능하다는 자가당착적인 설명으로만 가능하다. 이러한 모순과 혼돈 자체가 바로 시배스천이고, 그와 그 친구들이 속해 있는 청춘이고, 나아가 모든 사람이 한 번쯤 겪었을, 혹은 지금도 진행 중인 청년기적 열병이라는 부연 설명 정도가 가능할까.
돈리비는 시배스천을 통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불안과 허무 의식이 팽배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보편적 이상으로 부상한 과도기적 시대에 직면한 한 개인의 초상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20세기 영문학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소설 『진저맨』은 뛰어난 유머와 위트, 부조리한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밀도 높은 문학적 감수성으로 출간된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상의 열혈 독자들에게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하나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