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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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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저자
최상흠, 류병학 저 저
출판사
케이에이알
출판일
2022-09-17
등록일
2023-02-07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54MB
공급사
YES24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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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 그것은 2022년 9월 갤러리 R에서 오픈하는 최상흠 작가의 개인전 타이틀이다. 그는 갤러리 R 전시장에 신작 ‘무제(UNTITLED)’ 시리즈 12점을 전시해 놓았다. 갤러리 R의 전시장은 크게 4파트로 구분될 수 있다. 전시장 출입구에 위치한 전시공간과 천고가 높은 메인 전시장 그리고 사무실로 이어지는 전시공간 또한 사무실 전시공간이 그것이다.

최상흠은 갤러리 R의 출입구에 위치한 전시공간에 노랑에서부터 스카이블루와 파랑 그리고 빨강과 보라 또한 밝은 녹색에 이르는 7점으로 구성된 작품 <무제 I>을 전시해 놓았다. 그리고 그는 작품 <무제 I> 맞은편 벽면에 옛집의 ‘문패’ 크기를 닮은 30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작품 3점이 설치해 놓았다.

최상흠은 갤러리 R의 메인 전시장에 대작 4점을 전시해 놓았다. 첫 번째는 4점으로 구성된 검정 페인팅 작품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파랑과 녹색 그리고 검정 등 3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대작 1점, 세 번째는 녹색과 파랑으로 구성된 대작 1점이다. 네 번째는 전시장 바닥에 18점으로 구성된 박스 형태로 제작된 대작 1점이다.

최상흠은 사무실로 이어지는 전시공간에 각각 3점으로 구성된 작품 <무제 IX>와 <무제 X>을 전시해 놓았다. 그는 <무제 IX> 3점을 좌/우 옆으로 나란히 배치한 반면, 그는 <무제 X> 3점을 위/아래로 나란히 설치해 놓았다. 따라서 그의 <무제 IX>와 <무제 X>은 시각적으로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최상흠은 사무실 전시공간에 2점의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하나는 녹색 계열로 작업한 7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옆으로 배열해 놓았다. 이를테면 그는 밝은 녹색에서부터 차츰 진한 녹색으로 배열해 마치 그라데이션(Gradation) 효과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다른 하나는 빨강과 노랑 그리고 파랑의 3점을 옆으로 나란히 비치한 작품 <무제 XII>이다.

그런데 최상흠의 <무제 XII>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빨강과 노랑 그리고 파랑 등 원색(Primary colour)이 아니라 다홍색(cherry red)과 연두색(Yellow Green) 그리고 옥색(light blue)에 가까운 일종의 ‘간색(間色)’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그의 컬러들은 화려하고 부드러우며 맑고 밝은 화사한 일종의 ‘파스텔 컬러(pastel color)’라고 말이다.

최상흠의 <무제 XII>는 3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그 3점(Three Pieces)은 각각 독립적인 작품이면서 동시에 한 점의 작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3점은 조셉 코슈스(Joseph Kosuth)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하나 그리고 세 점의 회화(One and Three Paintings)’라고 할 수 있겠다.

최상흠의 ‘하나 그리고 세 점의 회화’는 2015년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업그레이드하고 있는 일명 ‘인더스트리 페인팅(Industry_painting)’이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미술용 물감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공업용 도료(塗料)로 제작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더스트리_물감’은 산업용 투명 레진 몰탈(resin mortar)에 아크릴물감으로 조색한 다음 경화제를 혼합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최상흠이 투명 레진 몰탈에 아크릴물감으로 조색할 때 매번 미소(微小)한 차이를 갖도록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물감을 붓에 묻혀 캔버스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캔버스에 부어서 제작한다. 그렇다! 그는 우선 캔버스를 이젤이나 벽면에 기대어 작업하지 않고 바닥에 펼쳐놓고 작업한다. 그는 바닥에 뉘어놓은 캔버스 표면에 물감을 부은다. 그러면 물감은 스스로 서서히 캔버스 가장자리로 퍼질 것이다.

최상흠은 물감이 스스로 캔버스의 ‘경계’를 넘어서 굳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는 물감이 굳고 나면 그 위에 다시 경화제를 혼합한 레진 몰탈에 또 다른 아크릴물감을 넣어 조색하여 만든 ‘인더스트리 물감’을 붓는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 붓기를 수십 번 반복한단다. 물론 그는 물감 붓기와 마르기 사이에 기다림도 반복할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자신의 반복된 행위를 어느 순간 멈춘다.

최상흠의 작업과정은 ‘블랙 페인팅’을 작업한 스텔라(Frank Stella)의 진술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물감통에서 캔버스로 페인트를 꺼내고 싶었다.(I wanted to get the paint out of the can and onto the canvas.)” 물론 스텔라는 물감통에서 물감을 캔버스로 옮길 때 붓을 사용했다. 그 점에 관해서 칼 앙드레(Carl Andre)는 <줄무늬 회화에 대한 서언(Preface to Stripe Painting)>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앙드레는 스텔라의 ‘줄무늬 회화’를 “캔버스 위의 붓의 통로들(the paths of brush on canvas)”이라면서 “그 통로들은 오직 회화 속으로만 향할 뿐(these paths lead only into painting)“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스텔라가 ’블랙 페인팅‘을 그릴 때 물감통에서 붓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줄무늬를 그려놓았던 반면, 최상흠은 물감통에서 물감을 캔버스 위에 부어놓았다.

최상흠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일종의 ‘컬러-필드 페인팅(Color-Field Painting)’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명명한 ‘회화적 이후의 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을 한 걸음 더 밀고 들어간 작품이다. 이를테면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의 ‘줄무늬’나, 케네스 놀란드(Kenneth Noland)의 ‘원형’들, 엘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의 ‘색면 덩어리’, 쥴스 올리키(Jules Olitski)의 ‘가장자리 띠’마저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컬러-필드 페인팅’이라고 말이다.

머시라? 갤러리 R의 최상흠 개인전 타이틀인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요? 뭬야? 문득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 시리즈가 떠오른다고요? 네? 혹 최상흠의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는 뉴먼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한 것 아니냐고요?

흥미롭게도 뉴먼이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시리즈를 시작했던 1966년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 감독의 영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가 극장에서 상영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마이크 니콜스의 영화는 미국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의 연극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2)를 각색한 데뷔작이다.

머시라? 올비의 연극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가 1933년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아기 돼지 삼형제(Three Little Pigs)』에 나오는 노래 “누가 크고 못된 늑대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Big Bad Wolf?)”에서 ‘빅 배드 울프’를 발음이 유사한 ‘버지니아 울프’로 바꾼 것이라고요? 뭬야? 올비가 연극 제목을 원래 디즈니 애니 노래 “누가 크고 못된 늑대를 두려워하랴?”로 하고자 했지만 디즈니 측의 반대로 ‘빅 배드 울프’와 발음이 유사한 ‘버지니아 울프’로 바꾼 것이라고요? 네? 올비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그녀의 남편 레너드 울프(Leonard Woolf)에게 허락을 얻었다고요?

올비의 연극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어느 대학 캠퍼스의 역사학과 교수 조지와 그 대학의 총장 딸이면서 조지의 부인인 마사 그리고 조지 & 마사 부부로부터 초대받은 젊은 생물학과 교수 닉과 그의 부인 하니 간의 새벽 2시부터 5시 사이에 벌어지는 하룻밤 이야기를 다룬다. 조지와 마사의 이름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마사 워싱턴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올비의 연극이 당시 미국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현재를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조지와 마사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이를 상상으로 만든다. 그리고 닉과 하니는 ‘상상 임신’을 만든다. 따라서 올비의 연극은 현실과 환상의 문제를 통해 실존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올비의 연극 제목인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극 중 조지가 부른 노래 ‘누가 환상 없는 삶을 두려워하는가?’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올비의 연극은 ‘낙관적인’ 미래를 향한 것으로 막을 내린다.

자,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원점? 뉴먼의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시리즈 말이다. 뉴먼의 작품은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1928)에 대한 패러디로 해석되기도 한다. 뉴먼은 ‘그림이란 비례와 균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몬드리안의 말에 대해 ‘그의 기하학이 형이상학을 삼켜 먹었다’고 비판했다. 이를테면 ‘이성’이 ‘감성(열정)’을 집어삼켰다고 말이다.

뉴먼의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은 직사각형(190.5x121.92cm)의 캔버스를 수직으로 세운 그림이고,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I>는 정사각형(304.8x304.8cm) 캔버스에 작업된 그림이며,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II>는 거대한 직사각형(243.84x543.56cm) 캔버스에 작업한 그림이고,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V>는 거대한 캔버스(274.32x604.52cm)에 그려진 그림이다.

뉴먼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II>(1966-1967)는 거대한 캔버스에 붉은색으로 마치 ‘도배’한 듯 보인다. 따라서 뉴먼의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III>는 몬드리안이 추구한 ‘미(beauty)’가 아닌 ‘숭고(sublime)’를 지향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만약 당신이 뉴먼의 거대한 그림을 한눈에 포착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림으로부터 뒷걸음질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뉴먼은 관객이 자신의 그림으로부터 뒷걸음 할 수 없도록 한다. 왜냐하면 그는 관객이 자신의 그림을 한눈에 포착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그림이 관객을 압도하도록 만들고자 한다고 말이다. 만약 관객이 뉴먼의 거대한 그림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본다면, 관객은 거대한 그림을 한눈에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작품을 ‘축소판 사진’으로 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관객이 자신의 그림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볼 수 없도록 연출해 놓았다.

그런데 뉴먼은 강렬한 붉은 그림 가장자리에 흥미롭게도 파랑색 띠와 노랑색 띠를 그려놓았다. 말하자면 그는 붉은 화면 왼쪽 가장자리에 파랑색 띠를 그려놓은 반면, 화면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노랑색 띠를 그려놓았다고 말이다. 뉴먼은 마스킹 테이프를 사용하여 색면과 색면을 마치 ‘날카로운 가장자리(Hard edge)'처럼 구획해 놓았다. 물론 노랑색 띠는 파랑색 띠와 달리 가늘어 세심하게 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노랑색 띠와 파랑색 띠는 흥미롭게도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붉은 화면을 한계짓는다. 따라서 최상흠의 눈에는 뉴먼의 그림에도 여전히 몬드리안의 비례와 균형을 잔존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최상흠의 ’인더스트리 페인팅‘ 크기는 뉴먼의 그림보다 턱없이 작지만 한 눈으로 포착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두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캔버스를 바닥에 뉘어놓고 그가 만든 인더스트리 물감을 부어 제작한 작품이다. 이를테면 그의 그림은 정면(캔버스 표면)에 부어진 물감이 스스로 흘러 측면으로 넘어간 회화라고 말이다. 따라서 그의 ’인더스트리 페인팅‘은 뉴먼의 ’정면 회화‘를 넘어 ’측면 회화‘로 확장된 회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회화는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까지 보아야만 온전하게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눈에 포착되지 않는다.

뉴먼은 관객이 자신의 그림에서 초월적 경험의 실재를 느끼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관객이 한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거대한 캔버스를 필요로 했다. 말하자면 그는 관객이 그의 그림 앞에서 압도당하는 경험을 원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림 자체가 관객에게 실재이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최상흠의 작품이야말로 ’실재 그 자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물감 덩어리‘로 이루어진 회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감 덩어리‘로 제작된 최상흠의 그림은 ‘미션임파셔블’한 숭고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숭고’는 말할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에게서 미술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인 셈이다. 그는 우리에게 낯익은 ‘물감 덩어리’로 현실과 환상 사이의 ‘미궁(labyrinth)’으로 빠트린다. 왜냐하면 그의 오묘한 컬러 그림은 관객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최상흠은 나의 귀에 ‘누가 미궁을 두려워하랴?’고 속삭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나에게 여전히 ‘수수께끼(mystery)’로 남아 있다. 문득 버지니아 울프가 그녀의 저서 『나만의 방(A Room of One’s Own)』(1929)에서 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글이 떠오른다. “때로는 허구가 사실보다 더 진실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Fiction here is likely to contain more truth than f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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