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라이너 마리아 릴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자
박홍규
출판사
푸른들녘
출판일
2018-06-26
등록일
2019-05-17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지원기기
PC PHONE TABLET 프로그램 수동설치 뷰어프로그램 설치 안내
현황
  • 보유 3
  • 대출 0
  • 예약 0

책소개

릴케는 우리의 시대정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반反민주 시인이다!

독재와 영웅주의를 미화하고 전쟁과 죽음을 숭배하며 도시와 시민을 혐오했던 릴케의 실체를 탐색한다!

흔히들 릴케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한다. 서양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다. 외국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제강점기부터 많은 시인과 일반인에게 영향을 미쳤고, 작품 또한 수없이 번역되었으며, 엄청난 연구서들과 함께 방대한 전집까지 나왔고, 그 작품이 교과서에까지 실렸을 만큼 국내에서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그러나 릴케는 평민 출신이었으면서도 평생 귀족을 자처했고, 거의 언제나 귀족들과 함께 살면서 시인인 자신을 신이나 영웅으로 묘사했으며, 그런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쟁을 예찬하면서 민중과 노동자를 멸시했다. 세상에 산적해 있는 수많은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추상적인 말들만 늘어놓았다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하지만 그가 반민주 시인이라는 점은 문제다. 특히 그가 쓴 시가 파시즘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는 점, 혹은 최소한 그것과 통한다는 점은 매우 심각하다. 이제 우리는 ‘독일 서정시를 완성한 위대한 시인’이라는 무조건적인 칭송을 버리고 신비화의 그늘에 가려진 릴케의 진면목을 재검토해야 한다. 일제 때부터 소개된 그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때부터 독일식의 관념 일변도로 그를 해석하여 그를 칭송했던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일본식 죽음이나 순간적 사랑의 탐미주의와 유사한 그의 시가 서양문화란 이름으로 남긴 일제의 흔적임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물어봐야 한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칠 때 ‘20세기의 가장 지독한 반민주 시인’이라는 그의 참 모습이 드러날 터다. 이 책은 이 같은 의도에서 릴케의 재조명을 시도한 것으로 한국 최초로 릴케를 비판하는 시도이다. 하지만 편협한 이데올로기적 매도가 아니라 릴케의 삶과 작품을 일일이 분석하면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균형을 잃지 않고 릴케를 보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나는 릴케 전문가도 아니고 독문학자나 문인도 아니다. 따라서 분석과 비판에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아마추어가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릴케가 반드시 오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정도로 평가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을 기회로 릴케에 대한 논의가 더욱 풍성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인다. 이 책은 총 9장으로 이루어졌다. 1장에서는 릴케 시의 본질이라고 하는 삶, 사랑, 고독, 신, 죽음의 모순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2장에서 8장까지는 그가 살아간 순서대로 삶과 시에 나타난 모순을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9장에서는 릴케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한국에서의 릴케 문제를 검토한다. 우리나라에는 유명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드러낼 용기를 막아버리는 숭배와 신비의 분위기가 팽배하다. 특히 시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 책은 그런 비민주의 분위기에 경종을 울리면서 시대착오적인 분위기를 일소하고, 시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읽고 논의하는 새로운 자유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시도는 저자가 책에 인용되는 시들을 손수 번역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쓰는 책이라면 의당 번역된 것을 인용하는 것이 옳다는 믿음 아래 필요한 내용들을 직접 번역했는데, 이 점 역시 내용과 더불어 새로운 시도로서 충분히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삶의 본질, 사랑, 고독, 그리고 신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했던 시인이라고?

한국인은 대개 청소년기에 릴케를 만난다. 교과서에 “주여 지난 가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로 시작되는 그의 〈가을날〉이라는 시가 소개되기 때문이다. 음악방송이나 라디오에 나오는 청취자 사연 등에서도 릴케의 시는 곧잘 언급된다. ‘장미의 시인’이라는 애칭과 함께 〈묘비명〉이 회자되고, ‘사랑의 시인’이라는 또 다른 별칭과 함께 “내 눈빛을 꺼다오, 그래도 나는 너를 볼 수 있으리……”라는 저 유명한 사랑 시도 종종 들을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릴케는 키가 작고 가냘픈 외모와 더불어 백혈병으로 죽은 시인이라는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마음이 여린 소년소녀들의 감성을 건드리기 일쑤다. 이 책의 저자가 반세기도 더 전 어느 가을에 릴케의 〈가을날〉을 처음 읽고 반한 뒤로 오랫동안 그와 그의 시를 사랑했던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릴케는 어땠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신과 자연과 사랑을 찬미하고,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죽음이라는 문제에 맞서 사색하면서 고독하게 살았을까? 수많은 릴케 찬미자들에게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는 오히려 매우 귀족적인 성향을 가진 영웅주의자였으며, 전쟁과 군대를 찬양했고, 자연스레 독재와 영웅을 미화하는 시를 썼던 파시즘의 시인이었다. 사랑의 시인이라는 이미지 역시 상당 부분 왜곡된 것이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운운하는 바람에 자유롭고 쿨한 이미지의 시인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지만 그가 주장한 사랑은 책임을 회피하는 사랑이자 순간에 몰입하는 사랑이며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이기적인 사랑이었다. 아내도 하나뿐인 딸도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릴케에게 그토록 호의적이며 그를 신비화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일까? 머릿속에 쏙 들어오기는커녕 난해하기 그지없는 그의 시를 널리 소개하지 못해 안달하면서 수많은 논문을 쓰는 것일까?



릴케는 귀족과 영웅, 남성의 권위를 찬미한 지독한 예술지상주의자였다

릴케는 평민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평생 귀족을 자처했다. 책에 싣는 자기소개에도 자신이 귀족 출신임을 강조했을 정도다. 그의 아버지는 중류 철도공무원으로서 원래 군인이었으나 군대에서 출세하지 못해 철도공무원이 되었던 사람인데, 릴케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특히 자랑스러워했다. 또한 그는 당시 독일의 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적 기질을 사랑하여 어머니 쪽이 알자스에서 프라하로 이주해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에 대해서는 늘 호되게 비난했고, 자신의 병약한 체질과 어린 시절 부적응의 원인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러나 릴케는 나이 40에 군대에 징집될 만큼 건장한 체질이었다. 그가 어머니를 미워하며 책임을 전가한 것은 영웅시를 즐겨 쓰고 영웅을 찬미했던 만큼 현실에서 영웅이 되지 못한 데 대한 일종의 분풀이였을 것이다. 이처럼 귀족적인 것과 영웅주의에 집착했던 그는 자연스레 대중과 노동자를 멸시했다. 신, 천사, 영웅, 기사, 군인, 장군, 왕, 시인 등과 달리 대중과 노동자는 이적저것 따지고 생각하느라 삶과 죽음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하다못해 그는 죽음마저도 ‘고유한 죽음’과 ‘대량 죽음’으로 나누어 영웅의 죽음과 달리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대다수 민중의 죽음은 ‘대량 죽음’이라며 멸시했다. 릴케는 또한 지독한 남성중심주의자였다. 그가 쓴 시에는 남성의 힘과 권위를 찬양하는 수단으로 혹은 남성의 완전성을 위해 도구화된 여성이라는 은유가 수없이 등장한다. 게다가 그는 극도의 예술지상주의자였다. 진정한 예술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친구도, 사회도, 종교도, 아니 예술 외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도 아내도 외동딸도 다 버려야 진정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생각조차 들지 않게끔 그들을 철저히 비판하여 자기 마음에서 완전히 도려내야만 완벽한 시를 쓸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절대의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릴케의 삶과 시는 난해한 모순 덩어리다

릴케는 ‘창작의 절대성’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버렸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오직 창조자인 자신만이 유일한 인간, 아니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생활과 예술은 적(敵)이었다. 창조를 위해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오로지 방해물일 뿐이므로 예술가는 수도사나 선승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일 쓰는 일을 그만둘 경우에는 차라리 죽기라도 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말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예술가에게는 오로지 창조를 위한 정신적 욕구만이 남아야 하므로 남에게 자기 작품에 대한 평을 구하거나 문학잡지사에 작품을 투고하는 ‘짓’을 그만두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하지만 릴케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짓’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릴케에게는 물질이나 명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다른 직업을 갖거나 잡일을 한 적이 없다. 물론 노동자로 일한 적도 없다. 20대 후반부터 시인으로 조금씩 유명해지고 나서 죽을 때까지, 부유한 귀족에게 빌붙어 호화롭게 살았다. 릴케는 학업 콤플렉스도 심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16년 동안 각종 공부를 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문인들이 경험한 김나지움이나 대학공부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가 평생 천재나 영웅을 자처하고, 교육받은 중산층을 멸시하고, 자신의 유식함을 과시하기 위해 난해한 시를 썼던 데엔 그런 열등감도 한몫했을 터다. 게다가 그는 수많은 여성 편력을 미화하면서 이를 영웅적 사랑으로 정당화했다. 시에서는 영웅을 노래했지만 현실에서는 비영웅적으로 살았다는 모순, 이것이야말로 릴케의 삶과 시에 드러나는 가장 큰 모순이 아닐까?



마지막이 되어야 할 귀족 영웅시인 릴케

20세기 시인 중에서 릴케와 가장 닮은 사람을 꼽는다면 파블로 네루다일 것이다. 그 역시 릴케처럼 많은 여인을 사랑했고 많은 사랑시를 남겼다. 하지만 네루다는 남미의 현실을 직시한 뒤 릴케를 떠났고, 그 결과 위대한 참여시를 썼다. 물론 시에는 좋은 시와 좋지 못한 시의 구별이 있을 뿐 참여시라느니 순수시 따위의 구별이 있을 수 없지만 말이다. 이 책은 한때 릴케를 한때 좋아했다가 싫어하게 된 저자의 고백이다. 따라서 릴케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칭하고, 그의 시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라고 하는 전제 아래 쓰인 일반적인 릴케주의자들의 입장과 전혀 다르다. 저자가 릴케는 물론 그의 시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귀족의 시대가 사라진 것을 통탄하고, 귀족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귀족의 눈으로 대중의 시대를 경멸하는 시를 써서 귀족과 그 동류인 자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릴케를 적극 수용한 사람들 역시 정신적으로 그런 기질을 갖는 사람들이었다. 전통, 농경사회, 인간적 다양성에 무게 중심을 두기보다는 비인간적 획일성을 긍정하는 가운데 근대적 기술문명, 도시문명, 인간주의를 부정하고 있는 탓이다. 물론 저자가 그런 것들의 가치를 전면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적 기술문명, 도시문명, 인간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전근대적 전통, 고향으로 상징되는 농경사회, 비인간적 획일성으로 돌아가자는 주장까지 찬성해야 할까? 따라서 릴케는 이제 인류 역사에 남은 마지막 귀족 영웅시인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인은 영웅주의나 귀족주의에 빠져 건강한 민중의 삶을 멸시하는 그런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QUICKSERVIC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