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열쇠
박정기의 ‘창작본능’
미술평론가 류병학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아뜨(art)’란 것이 마음 섬세한 이들이 하는 거라, 작품에서 ‘숨은 뜻 찾기’는 미션 임파셔블 하다. 왜냐하면 작품에 온통 ‘지뢰’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칫하면 ‘똥(지뢰)’ 밟기가 십상이다. 따라서 아는 체하는 ‘종횡무진서법(縱橫無盡書法)’을 쓰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안전빵’으로만 갈긴다고 하더라도 ‘쪽팔림’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날카로운 분석력을 지닌 요즘 관객/독자들은 가차 없이 나의 안전빵 텍스트를 읽을 가치도 없는 ‘잡글’로 치부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 씨바! ‘난공불락(難攻不落)’이란 문자에 삘이 팍 꽂힌다.
근데 류병학이 누군가! 남들이 꺼리는 것만 골라 밀착 취재하는 ‘무대뽀 정신’을 신봉하는 글쟁이가 아닌가. 작품 읽기를 주업으로 삼고 있는 난 허무맹랑하게도 ‘작품 읽기에 왕도가 없다’고 생각한다. 삶에 왕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박정기의 작품세계는 드로잉에서부터 조각 그리고 영상 또한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만약 당신이 그의 작품들을 모조리 조회해 본다면, 그는 ‘고수(高手)’답게 졸라 무거운 주제를 열라 가볍게 작품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나는 매혹적인 그의 작품에 홀려 나도 모르게 그의 작품세계로 한 발을 들여놓는다.
난 궁금했다. 박정기가 열정적으로 작업한 ‘작품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가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창작의 열쇠’는 무엇일까? 나는 ‘작품 읽기에 왕도가 없다’고 중얼거렸듯이 ‘헝거리 정신(hungry spirit)’으로 그의 작품세계로 풍덩 뛰어들었다.
오잉? 그런데 2019년에 작업한 박정기의 영상작품(Single channel video) <경작본능>에서 ‘창작의 비밀문’을 열을 수 있는 ‘실마리(창작의 열쇠)’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머시라? 박정기의 <경작본능>이 어떤 영상작품이냐고요?
그것은 아파트 단지 주변의 땅이나 도로의 짜투리 땅, 하천의 콘크리트로 쌓은 제방, 공원의 한 가운데뿐만 아니라 ‘경작금지’ 푯말이 버젓이 세워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단경작을 해놓은 모습을 촬영한 영상작품이다.
박정기가 촬영한 곳들에 경작하시는 분들은 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란다. 왜 그들은 ‘경작금지’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경작을 하는 것일까? 작가는 그들의 ‘경작본능’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작한 농산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게릴라 경작’은 경작하지 않고서는 다른 일이 없는 셈이다.
난 박정기의 영상작품 <경작본능>을 보면서 박정기의 ‘창작본능’을 떠올렸다. 말하자면 박정기는 마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경작본능’처럼 ‘창작본능’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경작본능’에 충실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들은 창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창작본능’으로 발생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