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목에 방울 달기
“저기 내 심장의 혐오가 가네.”
“코니 윌리스다운 웃음의 혼돈” - 조 월튼
“유행의 과학에 대한 코니 윌리스의 배꼽 빠지는 소설”
- 코리 닥터로우
혐오는 어떻게 유행하는가?
단발머리 유행을 연구하는 사회학자, 그리고 혼돈 이론 학자가 기묘한 소포 하나로 한데 뭉쳤다. 문서 작업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회사와 그 회사에서 연구비 지원을 받아야 하는 과학자들의 고민. 하지만 신념에 가득찬 두 과학자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도 자신들의 연구와 과학이 지닌 엄청난 중요성을 발견하는데…. 유행은 어디서 오는가, 과학적 발견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코니 윌리스의 유쾌한 해답!
혐오 유행의 시대를 버티기 위한 코니 윌리스적 해답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꼭 작동 원리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운전이 그렇고, 유행을 시작하는 일이 그렇고, 사랑에 빠지는 일이 그렇다.”
하지만 작동 원리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다. 적어도 연구비를 타내려는 학자라면, 작동 원리를 알아내겠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운전과 달리 유행과 사랑은 작동 원리를 이해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작동 원리를 아예 모른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유사성을 보면 사랑 역시 유행과 흡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유행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집단적으로 애호하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것을 집단적으로 혐오하는 유행도 있다.
유행의 작동 원리를 알아내려는 사람들
사실 유행하는 것 중 많은 것들이 이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혐오스러운 것들일 수 있다. 하이텍의 연구개발부에 있는 샌드라 포스터는 유행에 관해 연구하는 사회학자이지만 갖가지 유행을 따라하는 ‘부서간 연락 보조원’인 플립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런데 이제는 심지어 혐오가 유행이며,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플립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이런 면에서 코니 윌리스의 소설 《양목에 방울달기》는 유행, 어쩌면 혐오 유행에 관한 소설이다. 20년 전에 이 소설이 발표될 때 미국 사회는 ‘흡연 혐오 유행’의 시기였다. 그리고 작중 샌드라의 희망섞인 예상과는 다르게 오늘날 그 유행은 아직 사그러들지 않았으며, 대한민국에도 상륙했다. 게다가 샌드라는 ‘흡연 혐오’를 넘어 ‘혐오 유행’ 전체의 특성을 지적하는데, 그런 식으로 친다면 대한민국에서 혐오는 늘 유행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양목에 방울달기》는 유행의 작동원리를 찾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1920년대 미국의 단발머리 유행의 기원을 찾는 사회학자 샌드라와, 정보 확산에 관한 혼돈 이론을 연구하는 생물학자 베넷이 만나서 유행의 근원과 유행이 퍼져 나가는 방식을, 혐오 유행의 혼돈 속에서 찾는다. 소설 속에서 유행하는 혐오는 ‘흡연 혐오’이지만,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강한 편견이란 제일 오래되고 제일 추악한 유행 중 하나이다.
“강한 편견이란 제일 오래되고 제일 추악한 유행 중 하나이고, 워낙 끈질기게 지속하다 보니 대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유행이라고 불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위그노교도, 한국인, 동성애자, 이슬람교도, 투치족, 유대인, 퀘이커교도, 늑대, 세르비아인, 세일럼의 주부들.... 규모가 작고 다르기만 하다면 거의 모든 그룹에 차례가 돌아갔고, 그 패턴은 절대 달라지지 않았다. 못마땅해하고, 고립시키고, 악마로 몰아세우고, 박해하고. 그것은 유행을 시작하는 스위치를 알아내면 좋을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편견의 유행을 영원히 꺼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과연, 유행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한 것일까? 단발머리 유행의 기원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은 역시 한때의 유행이던 죽을 때까지 이어지던 ‘댄스 마라톤’에 나간 것처럼 비틀거리고 질퍽거린다. 한때 유행했던 그 모든 것들의 무덤 속을 찾아 헤맨다. 훌라후프, 댄스 마라톤, 핫팬츠, 금주 운동 등 지난 세기 사회를 흔들었던 유행 속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떤 유행의 시작을 정확히 집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유행이 유행처럼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면 그 기원은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 있고,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시도는 나일 강의 원천을 찾는 일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아니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주인공은 혐오스러운 상품의 유행, 그리고 혐오 유행에 절망하고, 과학적 연구보다는 ‘문서 작업’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회사 ‘하이텍’의 만행에 분노한다. 문서 작업의 양식에도 유행이 있는데 회사는 그것들을 무의미하게 끊임없이 바꾸어 나간다. 뿐인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이 나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더한 혼돈으로 빠트리는 ‘부서 간 연락 보조원’ 플립의 어이없는 실수들과 끝없이 싸워야 한다. 그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주인공은 절규한다.
“인간종을 개선하느니 인류를 완전히 버리고 베넷 박사의 원숭이가 되는 편이 낫겠다 싶은 순간들도 있다. 그쪽이 더 이해가 될 테니까.”
절대로 혐오 유행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혐오 유행은 특히 더 싫죠. 사람들에게서 최악의 면을 끌어내는 것 같아요. 그게 혐오 유행의 원리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결코 주인공은 유행에 대한 이해를,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다. 혐오 유행이라는, 사람들의 최악의 면을 마주하고 서 있으면서도, 작가는 그 일이 가져올 결과를 알기에 끝내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절대로 혐오 유행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이 나라에 불어 닥쳤던 지난번 혐오 유행은 공산주의 성향에 대한 대규모 고발, 망가진 평판, 끝장난 경력들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코니 윌리스는 메카시즘이란 이념적 광풍과 흡연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혐오 유행’이란 틀 안에서 함께 설명한다. 이러한 재담은 인간의 단순한 부분과 복잡한 부분, 아름다운 부분과 추악한 부분, 우스운 부분과 따스한 부분을 관통한다. 과학자인 베넷 박사는 흡연 혐오 때문에 연구가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그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비과학적인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드러나는 것은, 편향적 이념까지 포함한 ‘혐오 유행’에 그럴듯한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저기 내 심장의 혐오가 가네.”
코니 윌리스는 ‘유행’이라는 얼핏 보면 과학과는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소재에 여러 가지 사회적 맥락과 과학적 태도를 끌어들여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결국 유행의 비밀을 알게 될 경우 많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을 거라는 기업 연구개발부에서 일하는 처지이지만 샌드라는 과학자의 태도를 잃지 않는다.
“유행의 비밀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유행에 따르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머리로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과학이란 결국 그런 것이니까요. 다음 유행은 위험한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은 나머지 양떼와 함께 절벽으로 달려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비밀은 그렇게 명료한 영역에 서 있지 않다. 정보 확산에 관한 혼돈 이론 씩이나 필요한 것도 그래서이다. 변수를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면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들은 하나의 개체가 만들어내는 혼돈에 요동을 친다. 양떼를 데리고 실험을 시작한 그들은 방울양이라는 ‘아주 조금’ 특이한 개체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개체는 마치 플립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무리보다 아주 조금 앞서는 양. 도시 반대편에 사는 치과의사에게 반해서 미용실에 걸어 들어가서는 자신이 유행을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자신이 혼돈을 임계상태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머리를 잘라달라고 말한 여자.”
그리고 주인공은 자신이 하나의 사건 속에, 유행과 같은 것에 빠져 있음을 어느 순간 깨닫는다. 그러한 깨달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 깨달음 속에 각 시대의 다양한 영역의 유행이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보는 것은 이 작품의 큰 재미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 혐오 유행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인가? 글쎄,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꼭 작동 원리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운전이 그렇고, 유행을 시작하는 일이 그렇고, 사랑에 빠지는 일이 그렇다.”
샌드라는 비록 작동 원리를 아직 파헤치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유행의 시작과 범람에 좌절하지는 않는다. 역사 속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사라져갔는지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유행이 있다면, 기다리면 된다. 혐오 유행조차도 혐오의 대상을 이리저리 바꿔서 나타난다. 혐오의 주체이던 이가 혐오의 객체가 되는 이가 흔하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운전을 하고, 유행을 즐기며, 사랑에 빠진다.
“멋진 일들이 생기리라.”
정말로 그러하다.
작품 해설 및 역자 후기
복잡계 속의 우리
책이 나오기 얼마 전에 안경을 새로 맞췄다. 십 년 이상 같은 안경테에 렌즈만 바꾸다가 오랜만에 새로 테를 샀는데, 안경사가 내 예전 안경을 잘 갈무리해 담아주면서 말을 건다.
“예전 안경테를 보니 보수적인 취향이신데, 무슨 심경 변화로 이런 안경테로 바꾸셨어요?”
“이게 왜요? 이 안경테 무난하지 않아요?”
“어? 유행 상관없이 고르신 거예요?”
“그냥 편한 거로 골랐는데요.”
“아… 그냥 고르신 거구나. 요새 유행하는 디자인이에요.”
보수적인 취향이 뭔지도 모르겠고, 요새 유행하는 디자인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유행이란 살면서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렇다고 작품 속 베넷 박사만큼 유행에 면역이 있는 사람 같진 않지만, 플립이나 빌리 레이와 백만 광년쯤 떨어진 부류라는 점은 자신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샌드라 포스터 박사의 간절한 마음이 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유행은 대체 왜, 어디에서, 어떻게 출발하여 어디로 가는가. 특히 어떤 유행은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해할 수 없기로 치자면, 플립도 그렇다. 번역하면서 코니 윌리스 작가 주변에 플립 같은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물론 실존 인물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건 그만큼 플립이라는 인물이 생동감 있다는 점이고, 그보다 중요한 건 작가가 그런 인물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유행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기에 어떤 답이 존재할 것인가. 그런 생각의 줄기에 과학사에 길이 남을 뜻밖의 발견들을 섞고, 큰 강의 발원지를 찾아 떠났던 모험가들도 생각하고, 혼돈 이론과, 어쩌면 지금의 복잡계 이론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발상을 연결하고….
그렇게 작가가 그려낸 유쾌한 가설은 형편없는 유행에 대해서도, 플립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해서도 따뜻하다. 불평하고 좌절하고 냉소하고 답답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포기할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세상의 모든 플립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생각해낸 장대한 가설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냥 독자였다면 읽기만 하고 넘어갔을 것들을 찾아보고 배우는 즐거움은 번역자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경쾌한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편집부의 생각에 동의하여, 주석을 달지 않고 가급적 본문 흐름에 녹아들게 옮겼다. 읽다가 튀어나오는 온갖 기기묘묘한 유행사와 과학사의 우연한 발견에 대해 궁금해진다면 한 번씩 검색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독서 방법이 될 것이다.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몇 가지만 소개한다.
모래더미 모형(sandpile model). 한 알씩 모래를 떨어뜨리다 보면, 모래더미가 쌓이다가 갑자기 무너져내리는 순간이 있다. 대부분 한 알의 모래알은 아무 파장도 일으키지 못하지만, 가끔은 모래더미 전체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여기에서 ‘자기 조직화 임계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외부 통제 없이, 계 내부의 복잡한 요소만으로 이루어지는 질서와 혼돈 사이의 단속적인 평형. 1987년에 세 과학자가 소개한 개념으로, 복잡계 과학의 시작이다.
1987년 실험에 참가했던 페르 박은 1996년에 《자연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라는 책으로 이 이론을 다듬어 냈다. 국내에도 번역본이 나와 있었으나 현재는 절판 상태다. 2002년에 다시 복잡계 네트워크 과학을 내놓은 A.L.바라바시의 저서 《링크》와 《버스트》는 현재도 훌륭한 번역본으로 구해볼 수 있다. 복잡계 물리학을 사회학과 경제학에 적용한 마크 뷰캐넌의 《사회적 원자》도 이 분야의 추천 도서다.
이 책의 원서 출간이 1996년이니, 복잡계 과학의 한 갈래로 복잡계 네트워크 과학이 발전하고, 지진과 산불과 주식시장과 질병과 선거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연결점을 연구하는 동안 그 씨앗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 벨웨더 가설(혹은 플립 가설)을 낳은 셈이다.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원제인 bellwether는 중세에 양떼 우두머리에게 방울을 달던 데에서 유래한 단어로, 현재는 유행의 선도자, 주모자, 더 나아가서는 그런 조짐이나 징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마침 얼마 전에 한국에서도 인기를 끈 영화 〈주토피아〉에 ‘벨웨더’라는 이름의 양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반가웠으나, 본서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와 약간 다르게 쓰인다는 점을 고려하여 방울양으로 옮겼다.
본문에 그려지는 극심한 흡연 혐오 유행 속에서 “차별금지법 때문에 흡연자도 해고할 수 없다”는 투덜거림이 스쳐 지나가는데, 이는 물론 차별금지법이 기능하고 있기에 가능한 농담이다. 한국에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은 UN의 권고를 받은 이후 지난 10년간 세 번에 걸친 제정 시도가 있었으며, 20대 국회에서 다시 한 번 통과 여부를 논할 예정이다.
코니 윌리스는 콜로라도 덴버에서 태어나서 콜로라도 대학을 나왔고 지금도 콜로라도에 살고 있다. 이 작품의 무대가 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