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난화
추사 선생과 추사 난화에 대한
미술사가들의 외눈박이 해설을 거부한다.
추사 선생의 작품에 대한 미술사가들의 치사致辭가 화려함의 도를 더해갈수록 추사 선생은 오히려 초라해져만 간다. 선생의 본뜻을 간취하지 못한 채 모호한 미사여구로 꿰어 맞추고 심지어 글귀까지 바꿔가며 제멋대로 해석하더니, 급기야 예술가의 개성이란 괴팍한 것이니 너그럽게 봐주잔다. 어이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엉뚱한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이야말로 추사 선생이 의도한 바였다. 조선 말기의 세도정치 하에서 정적의 서슬 퍼런 감시를 따돌리고 눈 밝은 개혁동지를 가름하고 규합하여 시대의 모순을 혁파하고자 한 추사 선생은 난화蘭畵 속에 난화蘭話를 심어두어 뜻을 전달하려 하였다. 교묘한 유도로誘導路를 설계하여 세도가와 고루한 주자성리학 쟁이들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선생의 의중을 알아챈 선비들로 하여금 나라 바로 세우는 일에 나서도록 심혈을 기울여 난을 쳐냈다.
추사 선생의 난향蘭香을 온전히 음미하기 위해서는 난蘭의 향香이란 본래 어떠한 것이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화지畵紙에 쓰인 글귀만을 쫓다가 막혀 억지 향기를 쥐어짜내지 말고, 추사 선생이 추구했던 정치사상의 핵심이 어디서부터 발원하는지 더듬어내야 한다.
이 책은 추사 선쟁의 「불이선란佛二禪蘭」을 중심에 놓고 그 밖의 난화와 선비문예 작품들을 하나하나 들춰가며 조선의 개혁정치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읽어낸다. 이를 통해 추사 선생과 그의 작품에 대한 현대 주류(?) 미술사가들의 해설이, 마치 조선후기 추사의 정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축소되어 있음을 밝혀낸다. 그간의 외눈박이 해설들을 내려놓고, 호기심과 의문을 붙들며 추사 선생의 붓끝을 세밀히 따라가다 보면 『시경詩經』의 은유가 보이고, 『대학大學』의 도道가 드러나며, 곳곳에서 번득이는 『초사楚辭?이소離騷』의 정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세한삼우歲寒三友’(매, 난, 송)에서 ‘사군자四君子’(매, 난, 국, 죽)로…… 난향蘭香은 본래 어떤 향기였을까?
군자의 풍모를 의인화한 사군자가 착근하기 이전 시대의 군자의 표상은 세한삼우로 통칭되던 송松, 죽竹, 매梅였다. 인한忍寒을 최고의 덕성이라 여기며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가치관이 세한삼우로 뭉쳐진 결과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나무를 뽑아내고 난蘭과 국菊을 옮겨 심는 일이 벌어졌다.
세한삼우가 사군자로 대체된 일은 단순한 취향 변화와는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관이 반영된 상징물이 교체되었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퇴장은 소나무의 상징성보다 더 중요한 새로운 상징성을 난과 국에서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인한보다 중요한 새로운 가치관이 요구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중국 역사에서 요?순시대 이래 천자의 지위는 명목상으로라도 선위禪位 형식을 취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중국 대륙에 이민족의 제국 원이 등장하며 맥이 끊겨버린다. 천자의 몰락은 봉건제후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결국 천자 중심 봉건제는 뿌리째 뽑혔으며, 이는 한족의 전통적 우주관에서부터 가치관까지 모든 영역에 걸쳐 연쇄적 변화를 촉발시키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소나무는 『시경』에서부터 공公, 후侯의 상징으로 불려왔다. 그런 공·후가 원의 건국과 함께 모두 몰락하였으니, 공?후의 상징이던 송의 덕성 또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나라 잃은 한족을 하나로 모아줄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하였던 시대적 상황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으로 이어졌으며, 이때 새롭게 등장한 지도자의 상징이 난과 국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시경』 『초사?이소』 그리고 역대 난화蘭畵의 화제畵題 글 분석을 통해, 난이 선비의 고아한 풍격風格을 상징한다는 세간의 상식과 정반대로 변방의 험난한 생존 현장에서 삶을 영위하던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 그리고 난향이란 바로 이러한 백성의 요구를 전하는 소식임을 밝혀낸다.(2부와 4부 참조)
「불이선란佛二禪蘭」을 둘러싼 미술사가들의 어이없는 해설 소동
이러했던 난이 본래의 특성을 잃고 충절의 상징으로 보이게 된 것은 남송말南宋末?원대초元代初의 인물 사초思肖 정소남鄭所南의 노근란露根蘭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나 주자성리학이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군림하던 조선에서는 이미 망국이 되어버린 명明을 떠받들고 청淸을 도외시하는 분위기 하에서 충절을 의미하는 난화가 선비문예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러한 난화가 정난화正蘭畵(국가 공인 난화)였던 셈인데, 이로 인해 오늘날 추사 선생의 「불이선란」을 둘러싼 엉터리 해설 소동이 벌어지게 된다. 그 대표적 예를 두 가지 들어보자.
먼저 많은 미술사가들이 ‘부작난화이십년不作蘭畵二十年’이라 읽으며 ‘난 그림을 안 그린 지 20년 만에’라 해석한 「불이선란」의 첫 화제 부분이다. 저자는 실제 그림의 제시를 통해 그것이 ‘부정난화이십년不正蘭畵二十年’이며 그 뜻은 ‘(법도에 맞지 않는) 엉터리 난 그림[부정난화]과 함께한 지 20년 만에’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첫 부분부터 어긋나게 바라보니 「불이선란」을 놓고 근거 없는 설들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미술사가들이 ‘시위달준방필始爲達俊放筆’이라 읽은 후 ‘처음에 달준이를 위해 그렸으니’라고 해석한 부분이다. 이로 인해 존재하지도 않는 ‘달준이’란 인물을 찾아냈노라는 웃지 못할 코미디도 벌어진다. 저자는 이것이 ‘비위달준방필妃爲達?放筆’이며 그 뜻은 ‘왕비가 거만한 결단을 내리도록 하기 위하여 붓을 놀리니’라고 지적한다.(3부 참조)
이 책 제3부의 글을 통해 독자들은 마치 양파 껍질이 하나하나 벗겨지듯 「불이선란」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며, 기존 미술사가들의 해설과 달리 추사의 난화가 갖는 엄중한 의미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난맹첩蘭盟帖』이 선비들이 고상한 풍류를 즐기며 교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엮은 것이라고?
7부에서 거론하고 있는 『난맹첩』에 대한 해설도 기막히기는 마찬가지다. 『난맹첩』에 대해 최완수 선생은 “마음을 터놓고 사귐을 금란지교金蘭之交라 하고, 뜻을 같이하는 모임을 난맹蘭盟이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난을 사랑하고 난 그림을 그리며 이를 즐길 만한 사람이라면 정녕 난맹의 자리에 끼일 만한 자격이 있을 것이다. 추사는 이런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의미를 생각하고 『난맹첩』이라 명명한 모양인데 첫 권 첫 머리부터 여류로 난을 잘 치던 이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아무래도 여자와 함께 묵란첩을 꾸며보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383-384쪽)고 하였는데…… 추사 선생을 바람기 많은 노인네로 추락시키고 있는 장면이다. ‘맹서할 맹盟’자의 의미가 그리 가벼울 리도 없거니와, 그 첫 권 첫 머리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보면 위의 최완수 선생과 같은 해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혀를 차게 된다.(7부 407-412쪽)
평양기생의 시詩 하나의 뜻도 그리 가볍지 않은데
저자는 ‘글을 마치며’에서 추사가 연시戀詩를 보냈고 그것을 『완당전집』에까지 수록했다고 하는 평양기생 죽향에 대한 내용을 실었다. 기존 미술사가의 해석대로라면 죽향의 시는 매우 낭만적인 여인의 한탄일 뿐이지만, 저자의 해석대로라면 하품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가시 돋힌 항변이다. 선비가 아닌 기생의 시 하나에도 오늘날 사가들의 해석보다 훨씬 깊은 뜻과 마음이 담겨 있음을 전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천한 기생도 육예六藝를 익혀 선비문예에 감춰진 사의성寫意性을 읽어낼 수 있어야 명기名妓 소리 듣던 사회가 조선이었건만, 기생의 문예작품에 담긴 의미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추사 선생을 뵙겠다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서야 되겠는가? 깊이 있는 대화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에서 시작되고, 준비 없이 상대를 만나는 것이 무례임도 알아야 무시당하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