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철학 학교
욕망과 현실 사이, 절망과 쾌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시대,
어떻게 삶의 안정을 찾을 것인가?
닦달당하는 영혼을 위한 우아한 철학 안내서
우리 대부분은 정신없이 쫓기며 살고 있다. 누군가는 이에 지쳐 휴식을 취하고자 하고 ‘슬로 라이프’, ‘느림’, ‘일과 삶의 균형’이란 말에 열광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이렇게 ‘독촉당하고 닦달당하는 느낌’을 존재감과 성취감의 척도로 삼아 즐기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간에,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은 성취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고 강도 높게 닦달하는 현실을 두고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악몽’이라 표현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되는 ‘자원의 창조’란, 결국 끊임없는 불만과 탐욕에 의해 조장되는 성취 압박을 보기 좋게 치장한 표현에 불과한 셈이다. 이런 조건과 상황 속에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삶의 안정을 찾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심지어 휴식이나 영혼의 평화란 말조차 더 높은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되는 현실 속에서 말이다.
독일의 실천 철학가인 요하네스 부체는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철학 학교》에서 이 같은 화두를 던지며,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영혼’에 대해 소홀히 취급하는지를 꼬집는다. 그에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기계 부품을 정비하거나 교체하는 것처럼 ‘영혼’을 대한다. 실컷 영혼을 학대하고 나서 영혼이 ‘고장’ 나면, ‘사람’이란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 모듈을 바꿔 끼우듯 영혼을 치유하려 애쓴다.
저자는 이렇게 소원과 현실 사이, 절망과 쾌락 사이를 줄기차게 오락가락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영혼의 평화에 이르는 길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사상가들의 철학적 사유를 소개하면서, 닦달당하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볼 계기를 마련한다.
에피쿠로스, 세나카, 몽테뉴, 실러…
내면의 평화를 탐구한 대표 철학자들이 전하는 지금-여기의 사유들
책에서 강조하는 영혼의 평화란,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황급해하지 않으면서 올바르거나 적절한 것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택의 결과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안정된 태도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를 요약해 ‘부동의 내적 중심의 발견’이라 부르는데, 이는 어떤 프로그램이나 세미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적응하게 되는 태도, 혹은 그런 방식으로 얻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삶의 방식을 터득할 수 있는 걸까?
모든 시대에 철학자들은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해 노력하며 다양한 길을 제시했고 최선의 경우에는 자신이 그렇게 살아냈다. 그들 또한 오랫동안 열정적인 내적 싸움을 거친 후에 비로소 영혼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저자는 최초의 개념을 제시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1장에서는 세네카의 견해를 소개하는데, ‘영혼의 평화’와 관련해서 그가 어떤 논의를 했는지를 주로 살핀다. 2장에서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정신의학’에서 유래한 삶의 지혜를 소개한다. 3장에서는 ‘우정’ 및 ‘자기애’라는 주제를 논의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어딘가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참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4장에서는 몽테뉴와 실러를 따라 ‘건전한 의심/회의’를 유희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을 다루고, 마지막 5장에서는 초연한 채로 혹은 알면서 방종에 몸을 맡겨보는 삶의 방식에 다다른다. 다양한 지혜를 언급했던 여러 시인 및 사상가들과의 깊이 있는 만남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삶과 교류하는 시간을, 즉 내 삶이 ‘나’를 거쳐 흘러가도록 구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날 선 경계 대신 의식적인 깨어있음을,
내면으로의 칩거가 아닌 관조적인 여유를,
의무를 벗어난 유희적 삶을 배우다
치유와 해방을 갈구하면서도, 우리는 불안에 대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인을 감지했다 하더라도 이를 제거하지 못하게 훼방 놓는 것들이 너무 많다. 기대와 압박이 지속적으로 높아지다 보니, 방향을 상실하기도 하고 온갖 요구와 의무에 휘말려 굴복하기도 한다. 저자는 현대인의 ‘떠밀려 다니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지적하고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세네카의 주장을 요약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혼의 평화란 개인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행위 능력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래서 영혼의 평화는 깨어있는 상태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뭔가를 경계하거나 애타게 기다리는 상태 혹은 긴장해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온전하게 의지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같은 선택과 행위에 대한 강조는 절대적인 확고부동함 대신 상대적인 명랑함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몽테뉴는 자신의 삶을 일종의 실험장으로 선택해서 “나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실러는 놀이의 방식으로 세상을 대할 때, 비로소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삶에 유희적인 성격을 부여하면, 다른 무엇보다 삶이 예술이 된다. 이때 유보하거나 회의하는 태도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절대적’으로 규정하고 시야가 협소해지는 사태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들의 말처럼, 다른 대안은 언제나 존재한다.
책의 철학적 여정을 함께하면서, 우리는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희로애락이 아닌 침착하고 초연한 기분 속에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에서, 종종 서로 반목하는 소망과 두려움을 벗어난 상태에서 관조할 수 있게 해주는 영혼의 평화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삶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결정한 바를 얼마나 열린 자세로 잘 실행하느냐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