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지금 보호되어야 할 것은
‘혐오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혐오표현을 거절하고 비판하는 표현의 자유”다!
혐오표현을 쏟아내는 세력들의 위세는 매우 강력하다. 보수 기독교단체들은 정치인들에게 “동성애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거부하면 동성애 지지자로 낙인찍는다. 그 질문이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거절하고 비판할 수 있는 정치인은 아직도 드물다. ‘종북’ 감별사를 자처하며 북한 고위인사에 대한 비난에 동참하라고 요구하는 극우인물에 대해 “사상의 자유 침해”라고 항의하는 정치인에게는 “종북 아니면 왜 그걸 못 하냐, 그러니까 종북이지!”라는 인터넷 댓글들이 쏟아진다. 여성에 대한 혐오표현에 맞서는 연예인은 삶을 이어가기조차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혐오표현의 자유는 넘쳐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손쉽게 혐오표현을 쏟아낸다. 그 가운데 극소수만 가벼운 형사처벌을 받거나 소액의 손해배상책임을 지거나 단기간 게시물 작성을 정지당할 뿐, 절대 다수는 어떤 제재도 없이 혐오표현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혐오표현을 거절하고 비판할 자유를 외친 몇몇은, 거절의 결과 더욱 심해진 혐오표현의 공격에 처한다. 이들은 혐오표현을 거절하는 한마디에 자신의 꿈을 접어야 하고 인생을 걸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혐오표현의 피해자들에게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혐오표현도 표현의 자유로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의 주된 근거 가운데 하나는, 어떤 사상이나 의견도 제한 없이 표출될 수 있는 ‘사상의 자유시장’이 보장되어야 하고, 혐오표현도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 사상의 자유시장이 필요하다면, 그곳에서 보호되어야 할 것은 ‘혐오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혐오표현을 거절하고 비판할 표현의 자유”다.
대한민국에서 ‘혐오표현’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혐오표현’을 무슨 근거로, 어떤 방법으로 규제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 ‘종북’이라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한 혐오표현과 출신지역, 성을 이유로 한 혐오표현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다. 서구와 같이 민족적?인종적 차별로 인한 심각한 사회문제를 경험하지 않았으나,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한 혐오표현으로 민간인까지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학 살이 벌어진 나라가 한국이다.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지역차별과 빨갱이 혐오증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 혐오표현이 일부 줄어든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종북’ 혐오표현을 적극 활용했던 극우정치세력이 최근 다시 정치적 영향력 확보와 집권을 목적으로 ‘종북’ 혐오표현을 쏟아내고 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지역을 이유로 한 혐오표현까지 다시 퍼지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는 정치인이나 유명인들의 발언 역시 학살 범죄를 부인하여 극우수구세력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여기에 보수 성향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인종, 성적 지향 등을 사유로 한 혐오표현도 심각해지고 있다.
‘혐오표현’의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요소를 갖춘 것을 규제 대상으로 삼을지 판단이다. 개념 논쟁에 머무르기보다, 구체적인 입법 논의로 나아가 규제가 필요한 범위를 정하고 규제 대상들을 ‘혐오표현’으로 확정해나가는 접근이 필요하다. 입법까지 가지 않아도 바로 피해를 구제할 수 있도록 새로운 법리 개발을 시도하고 소송 실무에 적용하는 것도 이루어져야 한다.
혐오표현은 다수집단이 소수집단에게 가해온 역사적?사회적 배제의 논리와 배타적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이 사회는 다수집단의 노력으로 발전시킨 것이니 소수집단과 그 구성원에 대한 차별이 온당하다고 주장한다. 소수집단이 다수집단의 몫을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점점 더 많이 차지하고 있다며 반감을 퍼뜨린다. 주류 사회로부터 소수집단 구성원을 몰아낸다. 주류 사회에서 그가 ‘정상적’인 구성원으로서 공존할 공간 자체를 없앤다. 그리하여 혐오표현은 과거 그와 그의 동료들이 겪었던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다시 현실의 것이 될 위험을 높인다. 그가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차별과 배제가 앞으로도 계속될지 모른다는 절망을 무기한 연장시킨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를 떠나서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헌법과 법률, 각종 제도는 각각의 사람이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우리 헌법의 출발점인 ‘인간의 존엄’은 사람이 사회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 때라야 온전히 보장된다. 사람은 자신이 민족, 인종, 성, 사상 등으로 나누어진 어떤 집단에 속하든 그 집단의 속성 때문에 일률적으로 배제당하지 않고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 ‘인간의 존엄’을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의 근본정신에 근거하여 각 사람이 갖는 이 권리를 ‘공존할 권리’로 불러보면 어떨까.
역사적?구조적 연원에 의해 소수집단과 그 구성원들에 대한 배제 또는 축출을 주장하거나 정당화하며 차별하거나 적대하는 표현을 ‘혐오표현’으로 정의하면, ‘혐오표현’의 핵심 문제는 소수집단과 그 구성원들의 ‘공존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한 사람의 평판이나 평가를 떨어뜨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에서 그와 그가 속한 집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배제함으로써 그가 그곳에서 타인과 공존할 수 없게 하고, 이로써 그의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 글은 한국 사회에서 ‘혐오표현’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특성은 무엇인지 밝힌다. 혐오표현은 합리적 근거 없이, 오로지 되풀이되는 것만이 근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혐오표현이 왜 나쁜지, 우리 사회를 어떻게 오염의 나락으로 빠뜨리는지를 살피며, 현행법의 명예훼손이나 모욕의 범주를 넘어 ‘혐오표현’의 이름으로 규제 대상으로 할 필요가 있는 표현은 어떤 것일지 국제규범 등을 참조하여 기준을 제시한다. 결론을 요약하면, ‘역사적?구조적 연원’에 의해 형성된 다수집단이 “소수집단과 그 구성원”에 대한 “배제 또는 축출”을 주장하거나 정당화하며 “차별하거나 적대”하는 표현만을 ‘혐오표현’으로 정의하여 규제 대상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이 표현을 규제하는 이유는, 이렇게 정의된 ‘혐오표현’이 헌법상 모든 기본권의 전제인 ‘인간의 존엄’으로부터 나오는 소수집단과 그 구성원의 ‘공존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데 있다.
혐오표현은 법적 규제만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
극복해야만 흐릿해진다. 그래서 피해자의 책임’도 중요하다
혐오표현을 만들어내고 퍼뜨리며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중단시키는 것은, 그들을 비웃거나 거꾸로 받아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형사처벌과 민사소송도 결국 그들을 조금 주춤거리게 만들 뿐, 그들을 혐오표현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도록 하지 못한다. 여전히 혐오표현으로 핵심 지지층을 모아놓을 수 있다면, 남북관계 악화 또는 민주진보세력의 실책이나 내부 갈등 등으로 국민들의 마음이 흔들릴 때 혐오표현을 동원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들이 정의롭다고 생각한 차별과 배제의 세상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그들이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절대 다수 국민들이 촛불항쟁으로 정권을 바꾼 뒤에도 혐오표현을 쏟아내는 극우 정치인들과 단체들, 그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혐오표현의 주동자들은, 그들이 아무리 혐오표현을 쏟아내더라도 그에 흔들리지 않고 혐오표현이 더 퍼져나가지 않는 사회가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과정을 눈으로 보아야만 비로소 가해를 멈출 것이다. 더는 혐오표현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다수의 사람들이 손을 잡고 함께 막아낼 수 있어야만, 혐오표현의 주동자들은 혐오표현을 내려놓을 것이다.
문제는, 혐오표현을 함께 막아내야 할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다. 혐오표현이 가한 배제와 축출, 위축과 주변화의 결과가 시간이 지나도 채 없어지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에 골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혐오표현이 만든 상흔은 시간이 흐른다고 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극복해야만 흐릿해진다.
혐오표현을 함께 막아낼 사람들과 손잡기 위해, 혐오표현 피해자는 먼저, 다수의 경미한 가담자들과 방관자들에 대해 던져온 “왜 내 피해를 인정해주지 않는가”, “왜 나에게 와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가”는 질문을 넘어서야 한다. 혐오표현 피해자의 피해가 되풀이되지 않는 길은 혐오표현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뿐이고, 그러려면 다수 사람들이 피해자와 함께해야 하는데, 이 질문들은 다수의 경미한 가담자와 방관자들을 피해자로부터 다시 저만큼 밀어낸다.
혐오표현을 퍼뜨리고 소수자들을 배제 축출하려 한 공직자나 정치인, 언론인에게는 법적?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혐오표현에 동조하거나 경미하게 가담하거나 방관한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법적 또는 정치적 책임을 물으려 하는 것은 무리다. 혐오표현이 나온 역사적?구조적 연원이 있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드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까지 비난하고 책임을 물으려 해서는, 이들을 ‘공존할 권리’가 인정되는 사회로 함께 가는 동반자로 만들 수 없다. 새로운 사회로 함께 갈 사람을 모으지 못하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많은 방관자들과 경미한 가담자들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압박하기보다, 왜 방관하거나 거들었는지 돌아볼 환경을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억울하고 화난다는 감정의 토로에서 벗어나, 그들이 그렇게까지 하도록 만든 힘겨운 시절이었으니 이제 함께 세상을 바꾸자는 결론으로 가야 한다. 피해자가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좁은 구역을 나와서, 교분을 유지해준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끈끈한 감정까지도 가만히 넣어두고 다수의 경미한 가담자, 방관자들에 대해 생겨난 마음의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해보아야 한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피해자 스스로 다수의 사람들과 사이에서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바로 혐오표현의 피해다. 피해자가 그 피해를 극복하게 하는 것은 바로 피해자 자신의 마음의 변화다. 당신의 피해가 이만큼 컸다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주변의 노력은 피해자를 지탱해줄 수는 있어도, 피해를 극복해줄 수는 없다.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피해자들의 노력이 충분히 차오른 뒤에야, 그리하여 혐오표현을 막아낼 사람들이 가까이 함께 설 수 있어야, 세상은 마침내 변할 것이다. ‘피해자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말을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놓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