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위의 개구리
작년 여름 어느날 저녁이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아 무심코 아스팔트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뭔가 꼬물거리는 물체가 자꾸만 차도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개구였다. 근처에 화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왔지 싶었다.
동물은 본능이 있다지만 지각이 없기 때문에 사지(死地)인 줄 모르고 뛰어들어 죽음을 만난다. 길가를 지나다 보면 차에 치어 죽은 비둘기를 종종 보게 된다. 여름에는 장수하늘소, 사마귀, 방아깨비 등을 만날 때도 있다.
좁은 시멘트 공간을 기어 다니며 언제 사람들의 발길에 밟힐지도 모르는데……. 자연이 아닌 인공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집 잃은 개나 고양이를 볼 때면 마음에 눈물이 흐른다. 날씨가 영하로 곤두박질치던 겨울날이었다.
그때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검은 고양이가 차도로 내려서더니 혀로 얼음을 마구 핥는 것이었다. 잠시 후 인도로 올라온 고양이는 또다시 얼음을 찾아 핥기 시작했다.
바닥에 물을 조금 흘려주었더니 피하지도 않고 핥아 먹고는 야옹대며 사라졌다. 사람도 짐승도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경제한파로 기업과 가정이 결딴나고 긍휼함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문화의 이기는 악을 향해 치닫고 예술은 감각화 상품화되어 본질마저 의심스러운 정도가 되었다. 정신적 허영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예술종사자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작금의 시대를 문예가 죽은 시대라고 한다.
홍수같이 쏟아지는 인터넷의 범람으로 독자는 급격히 격감하고 문학은 문학인들만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렸다. 사유(思惟)를 싫어하고 느낌만 발달된 현대인들은 극예술을 택해 소설읽기를 대신하려는 경향마저 있다. 소설을 드라마와 영화와 빼앗기다보니 그 현상이 점점 심화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글을 깨우칠 무렵부터 내 꿈은 줄곧 소설이었다. 꿈에 관한 한 나는 절대로 긍정적이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가야 할 종착역은 소설이라는 것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날 잠자고 일어나 보니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어느 베스트 작가는 우연히 소설가가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난, 내 진실한 꿈의 결과로 소설가가 되었다. 초반에는 주로 감성소설에 매달렸다가 그 후엔 건조한 심성 탓인지 심리소설에 매달리게 되었다.
글을 쓰다 보니 자아가 변한 것도 같고 마음이 넓어진 것도 같다. 글을 쓴다는 건 내 안의 절망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절망이라는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완성된 작품을 내놓았을 때 내안에도 의지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번에 내게 되는 ‘아스팔트 위의 개구리’는 단편 12편이 수록돼 있다. 낮은 자리를 적지(適地)로 알고 살아가는 인생과 상처받은 인생들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강자 앞에 약하고 그 앞에 아부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약자의 고통이나 하소연에는 좀처럼 귀를 기울이려들지 않는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만이라도 다가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또 한권의 책이 출간될 수 있도록 은혜 주신 하나님과 사랑하는 지인들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고 싶다. 끝으로 졸작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제위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남치는 삶이되기를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