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이, 여자는 말語을 잃는다. 그것이 처음 왔던 것은 열일곱 살 겨울. 말을 잃고 살던 그녀의 입술을 다시 달싹이게 한 건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다. 시간은 다시 흘렀다. 이혼을 하고,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기고, 다시 그렇게 말을 잃어버린 후, 일상의 모든 것들을 다 놓을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선택한 것은 이미 저물어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 그곳에서 만난 희랍어 강사와 여자는 서로의 앞에 침묵을 놓고 더듬더듬 대화한다.
가족들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수 년 만에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 남자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볼 수 없다던 마흔이 가까워오지만 아마 일이 년쯤은 더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아카데미의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주의 깊게 지켜보지만 여자의 단단한 침묵과 마주하자 두려움을 느낀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선 본 적 없는 지독한 침묵. 그리고 점점 소멸해가는 남자의 미약한 빛. 이 어스름이 완전한 밤으로 이어지는 걸까.
『희랍어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떤 기미를 발견하고 흔적을 더듬는 일이다. 그리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 기미와 흔적들은 어두운 암실, 정착액 속의 사진이 점점 선명하게 상을 만들어내듯 어느 순간 고대문자처럼 오래고 단단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진 현재진행형의 시간까지를 포함한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존재하던 것들, 그 기미와 흔적들, 영원과도 같은 어떤 찰나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어떤 한 장면을 소설을 통해 목격하게 될 것이다.
저자소개
단아하고 시심어린 문체와 밀도있는 구성력을 가진 소설가. 육체적인 욕망과 예술혼의 승화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수작으로 극찬을 받은 『몽고반점』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가,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저자는 소설집『여수의 사랑』(1995년), 장편『검은 사슴』(1998년)을 통해 드러나듯이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과 외로움을 보여주는` 작품을 발표해왔다. 작가 한승원씨의 딸이기도 하다.
2005년 심사위원 7인의 전원일치 평결로 한강의 「몽고반점」이 이상문학상으로 선정되었다. 이상문학상 역사상 1970년대 생 작가로는 첫 번째 수상자인 한강은, 여타의 70년대 생 문인과 달리 진중한 문장과 웅숭깊은 세계인식으로 93년 등단 이래 일찌감치 '차세대 한국문학의 기수 중 한 명'으로 지목받아 왔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이 작품에 대해 “한강의 「몽고반점」은 기이한 소재와 특이한 인물 설정, 그리고 난亂한 이야기의 전개가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차원 높은 상징성과 뛰어난 작법으로 또 다른 소설 읽기의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 ”라고 평하고 있다.
또다른 그녀의 작품으로는 여행산문이면서 소설이기도 한『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있다. 이 책은 여행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이라곤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여행기로, 작가의 감각이 만나고 받아들인 사람과 사물에 대해 기억에 의지해 재구성한 소설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광기가 각 도는 한 여성의 실종과 그녀를 찾으려는 인물들이 미로찾기 같은 여정의 기록인 『검은 사슴』, 젊은 날의 상실과 방황을 진지하고 단정한 문체로 그려보이는 『여수의 사랑』등이 있다. 타인이 주는 고통을 구도자의 행각처럼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것을 표현한 수상작 『아기부처』로는 제25회 한국소설문학상을 받았다.
『그대의 차가운 손』이라는 작품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했다.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데뷔당시 젊다는 이미지의 70년생의 작가라는 말이 나오며 주목을 받았지만, 한강은 신세대 작가답지 않은 정통적 소설문법과 섬세한 감수성, 그리고 비극적 세계관을 특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