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
1946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서점에 한 권의 낯선 책이 놓였다. 지은이는 이미륵, 지구 반대편에서 온 한국인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독일 독자들은 이 책에서 뜻밖의 위로를 발견했다. 독일 언론은 이 작품을 그해 독일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았고, 여러 문장이 독일 교과서에 실렸다. 한국인이 한국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써서 독일 문학사에 자리를 얻은, 세계 문학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작가 자신의 삶을 담은 자전 소설이다. 황해도 해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 미륵은 사촌 형 수암과 뒷마당에서 뒹굴며 자란다. 몰래 꿀단지를 뒤지다 종아리를 맞고, 잠자리채를 만들고, 아버지 앞에서 천자문을 외던 나날. 남대문 문루에 오르면 저녁마다 스물여덟 번의 종소리가 울리고, 산봉우리에는 나라가 태평하다는 봉홧불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세계는 소년의 성장과 함께 무너져 간다. 서당 대신 신식 학교가 들어서고, 성벽이 헐리고, 열한 살 소년은 남대문에 나붙은 방문에서 오백 년 왕조의 마지막 인사를 읽는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 그는 1919년 삼일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쫓기는 몸이 되고, 어머니의 강권으로 달빛 속에 압록강을 건넌다. "혹시 우리가 다시 못 만나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는 마라. 너는 이 어미의 한평생에 기쁨을 주었느니라." 안개 낀 밤길에서 들은 이 당부가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이 작품의 힘은 절제에 있다. 작가는 상실을 원한으로 쓰지 않고 맑은 기억으로 빚어낸다. 아버지의 임종도, 어머니의 부고도 단 한 줄의 담담한 문장으로 처리되지만, 말을 아낄수록 슬픔은 깊어진다. 뒷마당의 석류나무, 먹 가는 소리, 눈 오는 밤 소설 읽어 주는 목소리까지, 사라진 한 세계가 이토록 정갈하고 사무치게 기록된 책은 드물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한 개인의 회고록을 넘어, 근대의 격랑을 건넌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이번 번역은 독일어 원문을 바탕으로 삼았다. 이미륵이 독일 독자를 위해 독일어에 담아냈던 한국의 기억을, 다시 우리말의 결로 되돌려 놓는 일이었으니, 이 번역은 번역이라기보다 귀향에 가깝다. 로마자로 떠돌던 수암과 구월이가 제 이름을 되찾고, 서당과 대청마루와 솟을대문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원작의 잔잔한 회상의 호흡을 살려, 오늘의 독자가 편안히 읽을 수 있는 우리말로 옮겼다.
책장을 덮고 나면 남대문의 저녁 종소리와, 아들의 등을 밀어 보내던 한 어머니의 음성이 오래 귓가에 남는다. 압록강은 지금도 흐른다. 그 강물 위로, 백 년 전 한 소년이 건너간 달빛도 함께 흐른다. 잃어버린 것을 가장 아름답게 간직하는 법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이 오래된 새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