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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공간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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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공간과의 대화

저자
박기원 류병학 저
출판사
케이에이알
출판일
2022-04-07
등록일
2022-06-08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40MB
공급사
YES24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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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서 있는 사람은 오시요, 나는 빈~의자~”


“가장 좋은 장소는 몸과 마음이 휴식하는 곳, 마치 풀밭 위에 있는 것처럼, 앉아서 또는 누워서 잠시 쉴 수 있는 곳, 그리고 넓고 끝없는 삶의 여정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작품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장소에서 출발한다. 그 공간을 가장 공간답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며, 장소의 먼지를 털고, 청소를 하고, 환기를 시키는 게 두 번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이 마치 넓은 풀밭에 누워 쉬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길 원하는데, ‘장소와 작품 그리고 사람 간의 균형’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으로 그들을 자연스럽게 이끌고자 한다.”

- 박기원의 ‘작가노트’ 2015


나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흔히 말하는 다양한 미술이 혼재하는 일명 ‘다원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급진적인 미술(radical art)’로 이루어진 흐름이다. 이 두 흐름 중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후자의 흐름, 즉 급진적인 작업들로 이루어진 현대미술의 흐름이다.

급진적인 작업? 우리는 그것을 흔히 ‘아방가르드(Avant-garde)’로 부르곤 한다. ‘아방가르드’는 흔히 ‘전위적(前衛的)인 것’을 뜻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앞서가는 작업’이다. 무엇을 앞서간다는 것인가? 그것은 기존 미술의 부정 혹은 넘어섬, 즉 지금·여기라는 시대를 앞서간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퍼블릭 아트(public art)’를 ‘레디컬 아트’의 하나의 형식적 사례로 든다. 대한민국 전국 방방곳곳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공미술' 작품들이 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공공미술 작품은 땅 덩어리도 좁은 대한민국의 귀한 땅을 ‘예술작품’이란 이름으로 버젓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은 땅 덩어리의 대한민국에 적절한 공공미술 작품은 어떤 형식으로 등장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잘문에 답하기 위해 ‘퍼블릭 퍼니처(public furniture)’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2000년 나는 서울특별시 주최의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인 『미디어시티_서울 2000(media city_seoul 2000)』의 커미셔너로 선정되어 ‘퍼블릭 퍼니처’ 개념으로 <서브웨이 프로젝트(subway project)>를 기획했다. 당시 나는 국내외 작가들에게 공공영역에서 사용가능한 작품들인 ‘퍼블릭 퍼니처’를 요청했다.

머시라? ‘퍼블릭 퍼니처’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달라고요? ‘퍼블릭 퍼니처’는 우체통이나 공중전화, 공중화장실, 버스정류장, 화단, 분수대 등 도시학에서 말하는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에 흔히 미술계에서 말하는 ‘공공미술(public art)’를 접목시킨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퍼블릭 퍼니처’는 기존의 일상세계와 단절된 미술작품을 일상세계로 돌려보내는 일종의 ‘가구-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구-작품’이란 표기는 시민이 직접 손으로 만지고 사용할 수 있는 가구로서 실질적인 ‘기능’도 하지만 동시에 ‘작품’인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흔히 '미술작품' 하면 '손대지 마세요!'라는 금지문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퍼블릭 퍼니처’는 오히려 손으로 만져야만 혹은 당신의 이쁜 엉덩이로 앉아야만 실질적인 기능을 하는 공공미술작품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퍼블릭 퍼니처’는 일종의 ‘생활 속의 아트(art in life)’을 지향하는 셈이다.

뭬야? 내가 생각하는 ‘퍼블릭 퍼니처’의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달라고요? 조타! 나는 퍼블릭 퍼니처의 구체적인 사례로 대한민국의 중심에 위치한 서울역 역사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박기원의 <자-넓이>(2003)를 들도록 하겠다. 그것은 2003년 유리와 철골 구조의 고속철도 서울역이 완공되면서 ‘공공미술작품’으로 설치된 것이다.

박기원의 <자-넓이>는 거대한 ‘ㄴ’자 형태의 두 개의 거대한 ‘자’ 형태의 조각작품이다. 파랑색 ‘ㄴ’자와 검정색 ‘ㄴ’자가 그것이다. 파랑색 ‘ㄴ’자는 세로 높이 10m, 가로 길이 5m짜리 L자형 파란색 스테인리스 철제 조각이고, 검정색 ‘ㄴ’자는 파랑색 ‘ㄴ’자와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바닥에 평평하게 설치된 검정색 마천석 조각이다. 따라서 박기원의 <자-넓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직각자의 모습을 확대(10×5m)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박기원의 <자-넓이>가 이미 19년 전인 2003년에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2003년 대한민국 땅에 급진적인 공공미술 작품이 설치되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의 <자-넓이>를 여전히 급진적인 공공미술 작품으로 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진 어떤 공공미술 작품보다 박기원의 <자-넓이>가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박기원의 <자-넓이>는 서울역 역사 앞이다. 그의 <자-넓이>가 설치된 장소를 고려한다면, 왜 작가가 '엄정함'을 뜻하는 직각자의 형태를 차용했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박기원은 장소와 의미에만 국한치 않는다. 그는 한 걸음 더 들어갔다. 흥미롭게도 그의 <자-넓이>는 '손대지 마세요!'라는 금지문은 고사하고 오히려 지친 당신에게 빈 의자이기를 자처한다는 점이다. 그 점에 관해 박기원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저는 저의 작품에 누구나 손쉽게 다가와 앉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노숙인들이 제 작품에 누워서 쉴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네? 당신도 박기원의 ’작품‘에 앉아보았다고요? 그렇다! 서울역 역사를 방문해 본 사람은 역사 바닥에 길게 늘여진 박기원의 ’작품‘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네? 기다란 ’자-벤치‘에 누워있는 사람도 보았다고요? 그렇다! 그의 <자-넓이>는 광장에 “서있는 사람은 오시요, 나는 빈~의자~”를 자처한다.

헉! 그럼 박기원의 <자-넓이>야말로 공공장소에 공공이 사용할 수 있는 '관객참여형' 공공미술 작품이 아닌가? 만약 당신이 박기원의 전작들을 모조리 조회해 본다면, 박기원의 작품들이 급진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급진적인 작품들은 한결같이 장소와 관객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와이? 왜 그는 장소와 관객을 중심에 두는 작품에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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