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형 이야기
서시(序詩)
나의 인형 이야기를 시작하며
어른이 되어 참 좋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린 시절 나는 겁도 많고 감정표현에 솔직하지도 못했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버거울 때가 있었다. 아니 그때는 그게 힘든 건지 잘 몰랐다. 나이 들어가며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기면서 어려움을 겪던 아이 시절의 내가 보였다.
어린 시절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게 인형이었다. 인형한테는 무슨 말이든 다했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한 마음을 인형에게는 모두 꺼내 놓았다. 그렇게 인형은 항상 곁에 있는 애틋한 대상이 되었다. 우울한 날엔 인형도 함께 우울했고 즐거운 날엔 인형 놀이에도 즐거움이 있었다. 인형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느냐고 놀라는 이도 있다. 사실 나도 놀랍긴 하다. 어떤 인형 이야기를 그리다 보면 그날의 공기까지 다 느껴지는 것 같으니까. 그만큼 어릴 적 인형이 내게 주는 위안과 위로가 컸다는 의미이다.
우리집 장식장 안에는 내가 살아온 세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인형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서너 살 무렵 예방접종하고 울음을 멈추지 않는 나를 위해 구멍가게에서 할머니가 사주신 꼬마 인형, 목욕시키고 옷 갈아입히고 어린 시절을 함께한 금발 머리 마론 인형, 연애 시절 남편이 선물한 커다란 곰 인형, 감기로 기운 없이 등에 업혀 있던 첫아이를 미소 짓게 만든 피노키오 목각인형, 여행가신 엄마가 인형 좋아하는 딸 생각하며 고른 아가씨 인형과 시어머님이 선물해주신 성모자 상의 마트로시카 인형… 그리고 두 아이의 유년 시절을 채워준 손때 묻은 장난감 인형들까지. 그 이야기들을 한 점 한 점 그림 속에 담았다.
내게 있어 ‘나의 인형 이야기’ 작업은 오래 묵혀 둔 과업이었다. 아픈 곳을 낫게 하고 싶은 본능 같은 거였다. 어른이 된 내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위로이고 화해이기도 했다. 슬픔, 걱정, 두려움, 우울, 외로움, 아픔, 그리움이 아로새겨진 그 시간과 장소에 대해 어린 내가 풀어 놓는 얘기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작업이었다. 한두 점 그려가며 치유됨을 느끼면서, 점점 작업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돌보고 화해를 청하는 그 시간들을 그리다보니 감추고 싶었고 경직되었던 나를 올바르게 바라 볼 수 있었다.
다양한 인형들과 만나고 모든 시간을 함께하며 아이에서 어른으로, 딸에서 엄마로 성장해왔다. 그리고 작업을 해가며 자연스럽게 아물어가는 시간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인형과 함께한 시간 속에서 외로움, 슬픔, 걱정과 함께 고마움, 그리움, 기쁨, 반가움, 이 모든 감정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왔다는 것을. 돌아보니 그 모든 순간이 눈물 나도록 소중하다는 것도.
가끔 장식장 안 인형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그때 그 시간이 떠올라 미소 짓고, 지금껏 살아온 순간들을 마주하며 감사한 마음에 젖어 든다.
2021.8. 어느 여름날 강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