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Kristin Lavransdatter) 3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는 재미와 깊이가 함께 있는 명작이요 걸작이다-
<역자 서문>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는 192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그리드 운세트의 14세기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한 3권으로 이루어진 뛰어난 문체의 대하 소설이다. 이 소설은 14세기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한 여인의 일생을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기독교인으로서 그린 작품으로 단순한 역사소설이나 종교 소설의 범위를 훨씬 넘어 선다.
제 1 권 신부 화관 (1920년 발간)
제 2 권 후사비 (1921년 발간)
제 3 권 십자가 (1922년 발간)
노르웨이어로 쓰여진 원작은 두 개의 영어 번역판이 있다.
찰스 아처(Charles Archer)의 1929년 번역과 티나 누넬리(Tiina Nunnally)의 1997년 판이다.
아처(Archer)의 번역은 고색 창연하다는 비난을 받고, 10명이면 9명은 누넬리(Nunnally)의 번역이 읽기 쉽다는 칭찬을 받는다.
예를 들면:
“네가 네 사랑을 다른 남자에게 주게 된 것으로 시몬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찰스 아처의 번역)
“네가 다른 남자를 대신 사랑하게 된 것으로 시몬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티나 누넬리의 번역)
누넬리의 소위 읽기 쉽다는 현대적 번역은 한마디로 너무 현대적이고 쉬운 것에 길이든 현대인들이 당연히 선호한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모두 현대식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뭔가 빠진 듯하다. 그래도 누넬리는 이 작품으로 번역 문학상을 받았다.
역자의 견해로는 어차피 중세시대의 이야기를 100년 전에 쓴 것이라 당연히 고색창연한 색채가 없을 수 없다. 그러한 문장을 원래의 스타일을 피해가면서 단지 좀 더 현대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만 번역한다면 현대 독자는 만족하겠지만 원문 텍스트에는 충실하기가 어렵다. 그 중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번역은 원작 이상이어서도, 이하여서도 안 된다는 대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역자는 아처의 1929년 판을 택했고, 덕분에 고생을 무척 했다.
기독교의 영향이 곳곳에 배어들어 대다수가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이교도적 문화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미신적 관행조차 남아 있던 14세기 노르웨이의 이야기다.
죄는 돈이나 땅으로 갚으면 면죄 받을 수 있고, 여인들은 혼자 돌아다니면 쉽게 겁탈을 당할 수 있고,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있었으나 여전히 바이킹 시절에 대한 향수와 아직도 이교도적 관습과 신화적 믿음이 만만치 않았을 때였다.
이 이야기는 중세 시대 노르웨이를 살았던 한 여인의 일대기인데,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가 7살 때부터 50세 때까지의 기록으로서, 인간들이 통상 갖는 어리석음으로 선택한 파란만장한 운명을 유순하게 당하고만 살 수는 없었던 한 여인의 정신적 방황과 함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저항하는 이야기다.
작가 운세트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깊은 연민과 통찰력의 산물인 이 작품은 ‘전쟁과 평화’, ‘일리어드’, ‘미들마치’, ‘레미제라블’ 등과 같은 고전의 반열에 이미 발간 초부터 들어가 있었으나 유감스럽게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작품이다.
읽다 보면 그 800년 전의 노르웨이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게 되는데 이는 저자 운세트의 탁월한 솜씨에서 비롯되고, 이 작품이 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가를 알게 된다. 첫 도입부분은 약간 느리기는 하다. 독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처음부터 자극적으로 유인하는 현대 소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이지만, 처음부터 뭔가 조금씩 조마조마하고, 어느 정도 읽어 내려가기 전에는 앞으로의 전개를 파악하기 힘든 작품이다.
중세 유럽은 대단히 종교적인,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고, 자연스럽게 이 소설 안에서도 곳곳에 종교적인 요소가 배어있기는 하지만 결코 설교하려 들지는 않는다.
또한 지금의 기준으로는 크리스틴이 아주 종교적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의 기준으로는 오히려 아주 세속적인 여자였다.
매일 매일을 보내는 현대의 인간의 모습은 14세기 노르웨이에 비하여 많이 달라졌겠지만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어서 21세기의 인간도 이 이야기에 공감하게 된다.
그 옛날 14세기 멀리 노르웨이의 이야기지만 현재에도 생생히 적용되는 인간 본연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당시 세계를 아주 현실감 있게 그려내어 독자들을 그 살아있는 이야기에 매우 가까이 느끼게 만들어 주며 독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탁월한 문체와 함께 생생하고 현실감이 있게 작품이 전개, 묘사, 진행되는데, 세계 각국의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등장하는 생소한 노르웨이 지명과 인명으로 몹시 혼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역자는 책 서두에 간단히 지명과 인명에 대하여 나열하여 찾아 보기 쉽게 했다. 그 단계를 극복하여 끝까지 읽어 내려가게 되어야만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맛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한때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거의 원로급 소설가로 존경을 받던 작가가 결국은 권력자 내지는 권력을 갖은 세력의 편에 서다가 독자들에게 외면당한 경우를 알고 있다. 이는 작가는 단순히 이야기꾼이 아닌 시대의 양심내지는 진실을 표현하기를 많은 독자들이 기대하기 때문이다. 작가 운세트는 결국 나치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여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고 전쟁 후에나 고국에 돌아온다.
파시즘이 등장하고 모든 면에서 정치적인 것이 우선하는 그 당시 세계 정세에서 노벨상 수상 역시 말썽이 많았지만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는 시그리드 운세트의 단연 대표작으로 끝까지 읽은 독자들은 이 작품이 노벨 문학상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1928년 노벨 문학상 선정에서 미국의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과 경합하지만 상은 운세트에게 돌아갔다.
워튼은 1927년, 1928년, 1929년 세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워튼으로서는 매우 애석한 일이었으니 당시 경합 상대자들이 매우 비중 있고 뛰어난 작가들이어서 결국 워튼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만다. (1927년은 앙리 베르그송, 1928년은 시그리드 운세트, 1929년에는 토마스 만이 수상했다.)
과학적인 분석에 의하면 소설은 읽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준다고 한다.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줄 뿐만 아니라 깊이를 더 하게 해 주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을 읽을 바에는 위대한 소설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