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예술, 글쓰기
광인의 내면세계를 다각도로 들여다본 흥미로운 인문서
광기라는 개념이 남긴 파장을 통해
인간의 ‘초월’의 잠재성, 우리가 포기한 삶의 가능성에 다가서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른바 ‘정상성의 세계’라 부른다. 이 세계에서는 명백한 이성과 확실한 경험에 근거에 삶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판단하고, 그 판단에 부합한 것만이 정상적인 것이고 ‘우리’라는 범주에 들어올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범주를 벗어나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은 배제되고 격리되고 치료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광기(狂氣, Wahnsinn)’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개념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광기는 “미친 듯한 기미” “미친 듯이 날뛰는 기질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는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친”은 정상성 안에서는 잘못된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지양될 수밖에 없다.
광기에 대한 오늘날의 인식은 근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하지만 고대와 중세 때의 인식은 현재의 인식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고대 그리스 이후로 광기는 창조성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개념으로 여겨졌다. 철학자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신에게서 오는 광기가 사람들에게서 유래하는 분별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며 광기를 유익한 것으로 설명했고, 광기 없이 단지 기술만으로 쓰여진 시는 결코 온전한 시가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창조성의 동력으로 광기를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계몽의 시기를 거치며 광기는 사람들에게 이성이 아닌 것, 잘못된 것, 격리하거나 치료해야 할 인간의 정신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관념론적 철학과 미학적 개념을 대신에 등장한 경험적 ? 실험적 관점을 통해 예술가-천재와 광기에 대한 관계는 예전과는 다르게 그려지기 시작했고, 현대 예술 담론에 이르기까지 광기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광기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우리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광기’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그것을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고 우리가 끊임없이 지향하고 현실에 구체화시키려고 한 그 무엇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배제하고 관심 갖지 않던 광기와 그에 사로잡힌 광인들의 모습 속에서 오히려 ‘정상적이고, 또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듯한’ 사유와 삶의 가능성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광기, 예술, 글쓰기》의 저자는 바로 여기에서 이 책의 논의를 시작한다. 비정상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광기’라는 개념을 추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비정상적인 것으로서의 ‘광기’를 소위 정상성의 세계 안에서 다시 논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이것이 바로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인 동시에 다소 ‘낯선’ 관점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들여다보아야만 하는 이유다.
《광기, 예술, 글쓰기》는 광인의 내면세계를 자세하게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갇혀 있는 ‘정상성’의 경계들을 초월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단념해야만 했던 삶과 사유의 가능성을 끝까지 추적했던 사람들이었음이 바로 그들이었음을 저자는 ‘발견’한다. 광인들은 우리가 포기하고 단념해야 했던 가능성들을 끝까지 추적하고 실행해 결국 현실로 만들었다. 저자는 광인들이 만들어낸 세계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유와 삶의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임을 이야기하며 독자를 지적 탐색의 여정으로 안내한다. 세계 내 존재로서의 광인의 현존재 구조에 관한 독특한 사유의 포획과 변주는, 독자들로 하여금 지치지 않고 이 여정에 동참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어준다.
광인의 내면세계에 관한 저자 김남시의 사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의식적 토대를 바탕으로 그 절대성을 점점 견고하게 만들어가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다시금 진실하고 투명한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광기라는 파장이 남긴 흔적들을 하나로 모음으로써 결국에는 ‘투명한 소통, 진실한 소통으로의 지향’을 추구하고 다시금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삶과 사유의 길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저자 김남시의 ‘진실한 말’이며 독자인 우리가 함께 이루어가야 할 ‘우리의 대화’의 요체이다. 풍부하고 논리 정연한 글을 통해 마치 르네상스적 지식인과 대화하는 듯한 지적 탐색의 여정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저자 김남시의 독특한 사유는,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서로를 향한 진실한 소통, 투명한 소통으로의 말과 글에 대해, 예술에 대해, 그리고 광기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포기했던 삶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할 것이다.
광인의 현존재 구조에 관한 사유의 포획과 변주
르네상스적 지식인과 대화하는 듯한 지적 탐색의 여정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광인의 글쓰기’에서는 광인들의 글과 글쓰기를 다룬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와 바슬라프 니진스키,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자신의 내적 충돌과 갈등까지도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내고 소통하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시간성과 언어의 일반성, 즉 시간과 언어의 문제를 넘어서려는 것이 이들 광인의 글쓰기를 관통하는 근본 지향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의 글에서 우리는, 시간 속에 살면서 언어를 통해 행할 수밖에 없는 글쓰기의 숙명에 대해 터져 나오는 통찰을 얻게 된다. 그들은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하는 소통의 가능성을 글쓰기의 실천에서 찾고자 했다. 자신의 글에서 시간을 지우려 하고 근육의 움직임, 필기도구의 미세한 떨림 하나까지 남김없이 포착하고 기록하려 했던 모습은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내적 확실성이나 진리를 아무 거짓 없이, 남김 없이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되새기게 한다.
2부 ‘근대, 광기, 예술’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성행했던 ‘천재-예술-광기’를 둘러싼 담론을 살펴본다. 저자에 따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으로 자리매김한 정신의학이 광기와 광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접근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광기와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논의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광기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인식을 벗어나게 했다. 그리고 이는 19세기 근대라는 삶에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현상들(예를 들어,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병리적 정신 현상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도 앞의 논의는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광기와 예술에 관해 이 시기에 출간된 막스 노르다우의 《퇴행》,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한스 프린츠혼의 《정신병자들의 조형 작업》을 비롯한 몇몇 책의 핵심을 짧게 개괄하며, 광인과 예술가 개념의 근저에 놓인 학문적 욕구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3부 ‘광기와 철학자’에서는 계몽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생애와 사유에서 드러나는 이성의 타자에 대한 불안과 경계를 추적하며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20세기 초 많은 문화 예술가가 벗어나고자 했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는, 상당히 오랫동안 인류 문화를 지배하면서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주지하듯, 임마누엘 칸트는 “너의 이성(Verstand)을 과감히 사용하라”는 슬로건을 통해 이성적 사유의 확장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계몽주의 철학자였고, 경험에 근거한 과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에 각기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근대의 철학적 기초를 정초한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유의 근거를 철저한 도덕적 의무감과 결부했고, 많은 일화가 말해주듯, 칸트 자신이 삶에서도 이성적 판단과 강한 도덕적 신념을 훼손할 수도 있는 지나친 정념과 열정으로 멀리하는 엄격한 자기 관리와 청교도적 결벽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근대적 인간의 전범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삶의 태도를 좀 더 미시적으로 관찰한다. 칸트는 자신의 신체에 대해, 신체의 감각과 느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사랑이라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정념과 열정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칸트에게 결혼은, 혹은 성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을 추적하는 동안 우리는 이성의 철학자 칸트가, 매우 역설적이게도 앞에서 본 광인들의 어떤 모습들과 겹쳐져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3부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