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끝이 정해진 이야기라 해도
전부를 잃어버렸을 때, 나는 어디에 기댈 수 있을까?
“몸이 굳어 가는 남편, 천진난만한 다섯 아이, 같은 슬픔을 겪은 친구,
얼음장 같은 아일랜드의 바다… 이들이 나를 지켰다.”
결말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누구에게나 예정된 운명을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올망졸망 세 아들을 키우던 행복한 젊은 부부에게 믿어지지 않는 불행이 닥친다. 촉망받는 영화감독이었던 남편의 불치병 때문이다. 온몸의 근육이 약화되어 결국은 호흡근 마비에 이르게 되는 ‘운동신경질환’은 보통 3, 4년 안에 사망하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3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남편의 병이 깊어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쌍둥이를 낳고 꿈을 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남편 사이먼은 몸이 점차 굳어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게 되지만 전동 휠체어에 몸을 싣고 시선 구동 컴퓨터로 소통해 영화를 만들었다. 아내 루스는 자신과 바다 수영 이야기를 써 〈아이리시타임스〉에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어쩌면 끝이 정해진 이야기라 해도》를 출간했다.
호흡 부전으로 응급 처치를 받던 남편은 산소 호흡기를 달게 되고 의료진의 반대에도 산소 호흡기를 계속 달고 살아간다. 남편이 집에서 투병 중이라 집안은 정신없이 들락거리는 간호사와 간병인들이 차지한지 오래다. 루스는 다섯 아이들과 씨름하며 슈퍼 히어로가 될 것을 다짐하지만 가끔은 도망치고 싶은 일상에 눈물을 쏟기도 한다.
루스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친구와 함께 아일랜드의 차가운 바다에서 수영을 하면서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얻고 점차 바다 수영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 늘어간다. 초인적인 의지 없이는 견디기조차 힘든 일상을 담담하게 담아낸 그녀의 칼럼은 신문에 연재되자마자 아일랜드 전역에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으며 칼럼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부부의 삶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다. 어떤 역경과 고통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자신과 가족의 삶을 이어가는 저자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큰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
누구에게나 불행이 찾아올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그런 고통이 닥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온 몸이 굳어가는 남편을 지키며 다섯 아이를 키우는 저자의 고군분투기는 너무도 솔직하고 현실적이다. 하지만 저자는 진공처럼 조여드는 무시무시한 불행을 향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녀에게는 비법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신비한 마법이라고 부르는 사랑의 힘. 소원을 비는 깊은 우물처럼 어떤 말이고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친구들, 그냥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가족, 그리고 바다가 있다. 물론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수시로 흔들리는 인간이기에 전쟁과도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하지만 통상적인 질병의 예후를 비웃듯 발병 후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루스와 사이먼 부부는 햇빛처럼 찬란한 다섯 아이들을 키우며 아일랜드의 바닷가에서 활기차게 삶을 이어갔다. 감옥 같은 육체에 갇혀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임에도 사이먼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시선구동 컴퓨터로 소통해 영화로 만든 최초의 영화감독이 되었고 그 모든 배경엔 당연히 아내 루스가 존재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존재가 떠날 때 나는 어디에 기댈 수 있을까? 루스는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얼음장 같은 바다에 매일같이 몸을 던진다. 사이먼은 결국 세상을 떠났고 비록 그 결말이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고 해도, 그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부부의 여정은 결코 예상할 수 없는 크나큰 여운을 남긴다. 슬픔과 고통의 서사를 있는 그대로 옮기지 않고 내면의 묘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고통의 극복과 성장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이 책은 실화의 생생한 감동뿐만 아니라 문학성이 탁월한 작품으로서 감동을 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