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철학자
위대한 철학자가 되려는 자, 벌통을 뒤져라!
인류 문명의 무한한 지적 원천, 꿀벌로 읽는 서구 지성사
철학에 대해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관찰해야 할 동물이 하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세계의 작동 원리를 가르쳤으며,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신의 섭리를 증명해주었고, 네로와 나폴레옹 황제에게 가장 충성스런 조언자였던 벌레, 바로 꿀벌이다. 시대와 문화권을 막론하고 세계를 이해하길 열망한 자들은 벌집 안에서 자연의 비밀과 인간의 근원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위대한 사상가라면 반드시 벌통 하나쯤은 곁에 두고 있어야 명함을 내밀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책은 서구 지성사의 결정적 분기마다 사상가들의 치열한 논쟁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꿀벌의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수천 년 넘게 그 어떤 동물도 이보다 더 사람들을 매료시키지 못했다. 철인(哲人)과 제국의 건설자부터 수도사와 혁명가, 자본주의자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꿀벌은 그들이 낀 색안경에 가장 걸맞은 세계상을 그들 눈앞에 펼쳐보였다.
“인간은 벌집에서 일하고 건설하고 저장하는 법을 배운다”
원시와 문명의 경계를 지키는 신성한 곤충
현대인들이 꿀벌의 멸종을 걱정하는 것은 꼭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이 걱정은 그리스로마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들은 양봉의 신 아리스타이오스가 겪은 인류 최초의 꿀벌 멸종 사건을 통해 왜 우리가 이런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꿀은 야생에서뿐 아니라 양봉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물질이다. 그렇기에 꿀은 “양식을 통해 얻은 산물 가운데 가장 자연적인 특성을 가진 한편, 시체 방부제로 사용될 만큼 부패하지 않아 자연에서 얻은 산물 가운데 가장 인위적인 특성을 지닌다.”(23쪽) 꿀벌 또한 양봉 상태에서도 강력한 벌침의 위력을 뽐내면서 야생 상태를 유지하고, 야생에서도 달콤한 꿀을 만들며 양봉될 때의 모습을 유지한다. 이런 꿀벌이 멸종되었다는 것은 자연과 문명의 경계이자 그 매개자인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했다. 즉 세계의 붕괴였다.
꿀벌을 다스리는 자는 이제 단순히 꿀을 채취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이 붕괴에 개입해야 한다. 아리스타이오스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원시적인 야생 세계와 문명 세계 사이에 위치한 중간 지대를 지키는 임무”(43쪽)가 양봉업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고 하늘에 더 높이 다가가려다 태양 앞에 녹아내린 이카로스의 날개가 바로 꿀벌이 만든 밀랍으로 만들어졌음을 상기시키며, 아리스타이오스 이야기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즉 “꿀벌은 인간이 자연에서 문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뿐 아니라 문명화된 인간이 원시 자연의 상태로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25쪽) 자연 그대로의 세계와, 인간이 스스로 구축한 세계 사이의 경계를 유지하고 동시에 이들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고대인들은 꿀벌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도 꿀벌과 같이 수태하셨다”
이교도의 우상에서, 유일신을 증명하는 수도사로 전향하다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가 등장하게 되면서, 꿀벌의 운명은 큰 변곡점을 맞이한다.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이제 신의 아들인 예수만이 독점하게 된 상황에서, 꿀벌은 더 이상 세계의 조화를 상징하는 역할을 맡기 어려워진 것이다. 하지만 꿀벌은 이단으로 내쳐버리기에는 여전히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예수 사후 100년도 지나지 않아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기독교 교부들이 조심스럽게 꿀벌을 성소에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꿀벌은 세 가지 선물을 준다. 첫째, 부활절 밀랍양초다. “이교도인들이 쓰던 제물과는 달리 우상 숭배의 성격이 전혀 없는”(135쪽) 양초는 기독교 의식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둘째, 성모 마리아의 처녀성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존재였다. 그 당시까지도 벌들의 교미는 한 번도 인간의 눈에 목격되지 않았다.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두고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예수의 탄생을 들먹일 때마다 “그렇다면 꿀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147쪽)라며 반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셋째, 수도사들에게 매일 신자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해야 하는 곤욕을 보완해줄 설교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순결, 복종, 엄격, 봉사 등 꿀벌의 생태적 특징들에서 뽑아낸 짤막한 우화들의 모음은 설교 소재가 매번 고갈될 수밖에 없는 수도사들에게는 컨텐츠의 보고였다.
하지만 꿀벌이 마냥 기독교에게 환영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꿀벌을 향한 예찬이 자칫 신이 만든 제일 위대한 피조물인 인간을 뛰어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꿀벌을 보며 감탄할 수는 있어도 우리보다 꿀벌을 더 좋아해서도, 꿀벌을 우리와 비교해서도 안 된다”(150쪽)고 주의를 주었고, 부활절 밀랍 양초에 대한 예찬론을 써달라는 신자의 부탁에 히에로니무스는 “말 그대로 발끈한 모습을 보인다.”(139쪽) 꿀벌 특유의 습성인 분봉도 기독교가 받아들이기에 골치 아픈 문제였다. 꿀벌의 개체 수 조절을 위한 메커니즘인 분봉은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종파 분열’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 분봉을 “벌집을 떠난 꿀벌 무리처럼 신약성서를 벗어난 가톨릭교회 세력”(162쪽)을 상징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렇듯 꿀벌은 기독교 세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이교도의 우상에서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동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꿀벌은 정치가가 해야 할 일을 가르친다”
황제와 귀족과 시민이 본 서로 다른 벌집
올림푸스의 신들과 기독교의 교부들만이 꿀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 아니었다. 세속의 통치자에게 꿀벌은 가장 뛰어난 정치적 참모였다. 군주정, 귀족정, 공화정 등 인류가 발명한 모든 정치체제를 이미 꿀벌이 선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최고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 눈에 벌집은 “한 명의 지도자를 가진 공화국”(88쪽)이었다. 여왕벌은 다른 여왕벌과의 싸움을 할 때만 봉침을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그는 피 튀기는 내전에서 승리하고 로마의 최고 권력을 움켜쥔 옥타비아누스가 이제 전쟁을 멈추고 팍스 로마나의 시대를 열어갈 지도자임을 선언했다. 제국이 무너진 뒤, 교권과 왕권이 세 싸움을 벌이며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중세 시대가 도래하자 헨리 2세의 신하였던 솔즈베리의 존은 전혀 다른 꿀벌을 꺼내든다. “권력의 유혹과 자유의지에 휩쓸리기 쉬운 군주정의 탈선을 보완”(188쪽)하는 귀족정치를 여왕벌을 근저에서 모시는 꿀벌들에서 발견한 것이다.
근대 정치혁명을 통해 정치의 주인이 바뀌면서 꿀벌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수천 년 동안 황제와 귀족들의 소유물이었던 꿀벌이 이제 민주주의자의 가장 든든한 정치적 스승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사상가들은 민주주의의 여러 형태들, 즉 무정부주의, 여성주의, 자유주의를 꿀벌과 결합한다. 프루동은 “꿀벌이 가진 완벽한 질서와 인간 이성의 숭고한 자유”(201쪽)가 조화된 사회를 그리며 ‘자주 관리’와 ‘상호 부조’라는 무정부주의의 핵심 원리를 도출해냈다. 바흐오펜에게 꿀벌 군집은 “모계 중심의 여권제에 기반을 둔 태초의 인간 사회를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사례”(211쪽)로서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자연적 증거물로 여겨졌다. 버나드 맨더빌은 부지런한 꿀벌이라는 기존 상에서 벗어나 “벌집의 풍요로움을 만들어낸 주된 원동력은 바로 욕심과 허영심”(218쪽)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시장 자유주의의 근거를 마련한다. 심지어 꿀벌은 반(反)민주주의자들마저 사로잡았다. 발데마어 본젤스는 《꿀벌 마야의 모험》이라는 동화를 집필해 꿀벌을 독일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꿀벌은 인류 역사에 출현한 모든 정치형태의 원리를 설명해주면서 황제와 혁명가, 민주주의자와 전체주의자가 떠받드는 정치철학의 스승으로 군림했다.
“꿀벌은 다시 한번 우리를 구원해줄 것인가”
진리를 탐구하려는 인류 지성의 영원한 동반자 곤충
오늘날 우리 사회의 두 축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위기를 겪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를 절대명제 삼아 자연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점점 더 위계적으로 변모하며 시민들의 의사를 효율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들은 과거 우리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실제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구원해줄 해결책을 벌집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을 주장을 분석하며 오늘날 꿀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
우선 사람들은 꿀벌에게서 대량 생산-소비 중심의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수분 매개형 자본주의’를 발견했다. “생산 과정에서 자원을 길어오면서도 환경의 균형을 유지하는”(294쪽) 꿀벌의 수분 방식에서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 논리가 새로운 착취를 정당화해줄 수 있다며 경계한다. 수분 매개형 자본주의를 대표한다는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의 디지털기업들을 보라. 이들 기업(양봉업자)은 네티즌(꿀벌)에게 하나의 플랫폼(생태계)을 제공하고 네티즌(꿀벌)은 별다른 의심 없이 검색엔진에 초당 3,000만에 육박하는 클릭을 하면서 사실상 기업(양봉업자)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들은 웹상에서 네티즌이 수분 역할을 하며 만들어낸 결실을 포획하는 새로운 포식자”(298쪽)인 것이다. 이것은 착취를 또 다른 착취로 대체하는 것과 다름없다.
다른 사람들은 꿀벌에게서 현재의 불평등한 민주주의를 변화시킬 ‘집단 지성’을 발견했다. “평범한 개체들이 모여 수많은 군집을 이룬 상황에서, 모두의 행복을 견인하는 의사 결정”(303쪽) 방법을 꿀벌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꿀벌의 의사결정 방식은 민주주의와 전혀 무관하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선거’, ‘구성원 모두의 공적 합의’, ‘정치적 의사결정’, ‘권력 대리인의 결산 보고’ 등 민주주의가 갖춰야 할 기본 제도를 벌집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벌집 안에서는 거짓말, 변심, 무관심, 기만, 파벌, 위선 같은 인간만의 고유한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없이도 꿀벌은 완벽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만, 이와 달리 인간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요”(313쪽)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벌집은 인류에게 “모든 차원의 인간 조건에 대해 물어보도록 부추기는 가상 실험장”(323쪽)이었다. 비록 꿀벌은 인간이 낀 색안경에 가장 걸맞은 세계상을 그들 눈앞에 펼쳐보였지만, 시대와 문화권을 막론하고 인간이 맞닥뜨린 세계와 존재의 위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동물이었다. 독자들은 인류 지성사의 주요 장면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며 진리의 안내자 역할을 담당한 꿀벌의 놀라운 이야기를 이 책에서 확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