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제왕의 생애
2018년 12월, 쑤퉁의 장편소설 『나 제왕의 생애我的帝王生涯』가 문학동네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어 10여 년 만에 독자들을 다시 만난다. 옮긴이 김택규는 “출판업의 부진으로 판매 규모가 적은 중국소설은 출간 종수가 크게 줄어 쑤퉁의 구간들도 차례로 품절되었다. 하지만 구간들 중 『나 제왕의 생애』만큼은 문학적, 상업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학동네에서 재출간하기로 결정했다. 이 장편소설은 쑤퉁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상상력이 넘친다”라 평했다. 한국에서 동일한 중국소설이 두 번 이상 번역된 예가 극히 드문 것을 감안하면 『나 제왕의 생애』의 재출간은 한국 중국문학 번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라 할 만하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란 불과 물, 독과 꿀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최초의 동인이다.”_쑤퉁
『나 제왕의 생애』의 첫인상은 역사소설이다.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명, 지명, 역사적 사건은 모두 상상의 산물이다. 작가 쑤퉁은 현실에는 없었던 ‘섭국’이라는 왕조를 배경으로, 어린 나이에 제왕이 된 소년 단백의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단백은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열네 살의 나이에 갑작스레 제왕이 된다. 왕이 될 준비도 하지 않았고 왕이 되길 원하지도 않았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왕이다. 수렴청정의 틈바구니, 비빈들의 암투, 변방 외적의 침입, 왕위를 노리는 경쟁자들이 시시때때로 시도하는 암살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상황에서 소년 단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실제로 미미하다. 숨막히는 생활 속 단백은 늘 악몽에 시달리고 죽은 자들의 망령에 쫓긴다. 소심하고 겁이 많았던 단백은 점점 무기력해지고 히스테릭하게 변하는 한편 마음 깊은 곳에선 하늘을 나는 새를 동경하며 매인 데 없이 훨훨 날 수 있기를 강렬히 소망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민의 옷을 입고 궁 밖으로 나가 줄타기꾼의 멋진 기예를 감상할 기회를 얻고, 그의 자유로운 모습에서 해방감을 느낀다.
이후 단백은 음모와 정치적 투쟁의 결과 제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서민으로 전락한다. 서민의 삶이 고단하고 불편하긴 하지만 수치스럽진 않다. 기형적으로 억눌렸던 그간의 자신을 돌아본 후 숨겨진 재능을 찾은 그의 앞에 완벽히 다른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겉모습은 물론, 속모습까지 완벽히 탈바꿈한 그는 도읍으로 돌아가지만 섭국을 집어삼킨 팽국의 군대와 불에 타 재가 된 섭궁만 그를 맞는다.
제왕의 삶이란 지극히 고유하고 특별한 그 무엇이리라 예상하지만, 작가 쑤퉁이 그려내는 제왕의 삶은 다르다. 작가 자신의 말처럼 불과 물, 독과 꿀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제왕에서 서민이 되는, 불가능한 상황들이 발생하고, 무한정의 권력과 자유를 누릴 것 같으면서도 주어진 선택의 폭은 협소하다. 굴곡과 모순으로 점철된 삶이란 특정한 어느 개인이 아니라 결국 우리 보편의 모습이 아니던가. 때문에 이 소설은 『나 (제왕)의 생애』라 읽을 수 있겠다. 소설가 김숨이 이 소설을 두고 “상상 속 고대 왕국 섭의 제왕이었던 단백의 생애와 나의 생애, 두 생애가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하는 황홀함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리는 “불과 물, 독과 꿀”이 어우러진 인생에 어쩔 수 없이 너그러워지게 된다”고 평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성장이 멈춰버린 ‘제왕’
제왕으로서 단백은, “문무백관의 격렬한 논쟁을 듣고도 결코 끼어들지 않는, 무능한 허수아비 왕”(본문 137쪽)이며 “섭국의 재난이 머지않았다”(본문에서 이 표현은 무려 스무 번이나 등장한다)는,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저주 혹은 예언을 감내해야 하는 궁지에 몰린 왕이다. 세상은 단백이 왕으로 성장하길 바라지 않는다. 아니,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서 성장하는 것도 막는다.
“조회중에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입을 천으로 틀어막고 두 손을 옥좌에 결박”(본문 102쪽)해 발언권을 막아 왕으로서 기본적인 직무를 방해하는 일은 예사고 “궁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가는 걸 허락지 않”는다(본문 46쪽). 자유가 없다. 첫 몽정을 하고 속옷이 젖자 궁녀들은 “이게 뭔지 아느냐?”는 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그 속옷을 잡아채 수렴첨정을 하는 할머니 황보부인에게 대령하기 바쁘다. 신체의 변화를 겪으며 사춘기에 접어든 그에게 그 누구도 이렇다 할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몸은 커지지만 정신은 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단백은 소년이 되기보다 유아기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회의 시간에 정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귀뚜라미를 들여다보고 있는가 하면, 하얀 꼬마귀신을 보는 착란 증상을 보이고, 죽은 자와 관계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경계하는 등 정신적 지체를 겪는다.
정신적?정서적 지체는 악순환을 낳는다. 정사를 장악하는 실질적 권한과 정세를 파악하는 통찰이 부재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시국은 어려워진다. 변방에 외적이 침입하고, 이를 막기 위한 순행 길에서 “날씨가 너무 추워서 떠나고 싶지 않단 말이다!”라는 논리로 수비를 위해 움직이자는 장수의 간언을 무시한 후 나아가 그를 베어 없애버린다. 이 일은 훗날 단백을 해하려는 음모가 되어 되돌아온다. 무지막지한 세금 부과에 반발해 들고 일어난 농민의 반란도 막지 못한다. 유일하게 사랑했고,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에게는 ‘흰여우’를 출산하게 하고, 궁 밖으로 쫓겨나는 기구한 운명을 가져다준다. 종국에는, 왕위를 이어받은 후 끊임없이 자신과 경쟁했던 장자 단문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스스로를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서민’으로 전락한 후 진정한 자신으로 서다
무더운 여름, 세속의 삶으로 내팽겨쳐진 단백. 제왕의 용포를 벗자, 단백은 벌거벗은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고자 한다. 자유가 극도로 제한된 궁 안에서 줄곧 갈망해온 자유로운 ‘줄타기꾼’의 길을 가리라 결심한다. 그에게 줄타기는 “재능을 타고났으나 삶 때문에 묻혀버렸던 아름다운 기예”(본문 293쪽)였다. 왕이었을 때는 매사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답을 남에게 묻기 바빴으나 줄타는 방법만큼은 스스로 찾기 위해 분투한다.
“나는 왼쪽의 멧대추나무를 타고 올라가 허공의 밧줄 위에 흔들흔들 서다가 아래로 쿵 떨어졌다. 그다음에는 오른쪽 멧대추나무를 타고 올라가 밧줄 위에 서다가 역시 아래로 쿵 떨어졌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외침이 얼마나 뜨겁고 비장한지 깨달았다. (…) 스승 없이 모두 스스로 깨우쳤다. 그러다 어느 가랑비 내리는 아침, 그 긴 밧줄을 수월하게 다 건넜다. (…) 구월의 가을비가 내 얼굴 위에 뚝뚝 떨어지자 이미 시들어버린 지난 일들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피어났다. 나는 만면에 눈물을 흘리며 밧줄 한가운데에 서서 밧줄의 반동에 따라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내 몸과 영혼이 함께 솟구쳤다가 떨어져내렸다.”(본문 292~293쪽)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왔으나 그가 보고 주유하는 세상은 밀폐된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바뀌었다. 수직적 지위 하락이 역설적으로 수평적 시야 확장을 일궈냈다. 그는 더 나아가 초연함까지 얻는다. “나는 서민이고 줄 타는 광대다. 내 앞에 있는 것은 망국 군주의 죄업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선택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 무서울 게 없다(본문 317쪽).” 단백은 그렇게 뒤늦게 도약을 이루고, 줄 위에서 진정한 자신으로 곧추선다.
“이토록 예스럽고 우아한 정조는 어디서 왔을까”
가상역사소설의 짙은 센티멘털리즘 출처=옮긴이 김택규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luxun2004/80030493034
전통과 모던이 공존하는 작법
왕들의 솔직한 심정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기록으로 남은 실록이나 왕의 일기를 통해서 ‘추측’을 해볼 수는 있겠지만, 왕의 용포를 입고 있는 자라면 철저한 자기검열을 했을 테고, 그렇다면 기록된 그 심정은 ‘진짜’일까. 게다가 폐위된 왕의 그것이라면, 그 심정을 알 리 만무하다. 작가 쑤퉁은 궁금했다. ‘역사소설 쓰기 벽癖’이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고, 정사正史보다는 야사野史나 전설 속 소재들을 재구성해 새로운 세계를 고안하길 즐겨하는 그다(구습이 남겨진 1920년대, 어느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처첩성군」이나 맹강녀 설화를 다룬『눈물』등이 그러하다). 『나 제왕의 생애』에서는 역사에서 길어올린 소재뿐 아니라 작법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중국 고대소설의 요소들을 빌려와 양이(?毅)의 논문 〈서정 스타일의 재현과 재구성-쑤퉁 소설론(抒情?格的再??重????童小??)〉을 참고했다.
‘진짜’ 같은 왕의 일대기를 완성시켰다.
『나 제왕의 생애』는 주인공 단백이 자신의 마음 깊숙이 숨긴 이야기들을 마음껏 펼쳐보이는 1인칭 시점이다. 단백이 느끼는 실존에 대한 공포와 불안, 자아 분열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서술되어, 한국 문학 모더니즘의 선두주자인 이상李箱의 시나 소설을 떠오르게도 한다.
나는 내가 진짜 섭왕 같지 않았다. 단문이 나보다 더 진짜 섭왕 같았다.
그것은 말 못할 내 마음의 병이었다. 나는 이처럼 스스로를 비하하는 의심을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연랑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위태로워 보여도 진정한 위험은 없었던 내 제왕의 생애 초반에 그러한 의심은 커다란 바위가 되어 깨지기 쉬운 내 왕관을 누르며 내 정신에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나는 괴팍하고 고집 센 소년 천자가 되었다.
나는 예민했다. 나는 잔인하고 난폭했다.(본문 106~107쪽)
*
“그러면 나는? 나는 아직 살아 있느냐?”
“폐하는 만수무강하실 겁니다.”
연랑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 『논어』를 다 읽기는 그른 듯하구나.”
소란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마침내 밀물처럼 광섭문을 통과해 왕궁으로 쏟아져들어왔다.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서 말했다.
“들었느냐? 이렇게 섭국의 마지막날이 왔다.”(본문 238쪽)
인물의 심리 상태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러한 작법은 모던하면서도, 인물의 성격을 행동이나 언행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발화해 욕망과 상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중국 고대소설과 닮아 있다. 전통과 모던의 공존이다. 한편 이미지나 몽환적인 암시 등을 통해 작품의 분위기를 주조하고 복선으로 작용하게 하는 것도 중국 전통소설의 예술적 흔적이다. 소설에서는 ‘새’가 단백의 심경을 대변하고, 분위기를 전환하는 주요한 소재다.
정말 숲속의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었다.
“날자!”
나는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그것은 오래 앓아온 내가 입 밖으로 뱉어낸 두 음절이었다.(본문 104쪽)
*
잿빛 새 한 마리가 내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기괴한 새 울음소리가 여름날의 하늘에 울려퍼졌다. 내 귀에는 그것이 마치 사람 소리처럼 들렸다.
“망했노라…… 망했노라…… 망했노라……”(본문 240쪽)
*
청년이 되어서는 자유로이 창공을 나는 새들을 가장 좋아했다. 이십여 종의 새 이름을 알았으며, 그 새들의 울음소리를 구별하고 흉내내기도 했다. 외로운 여행길에서 나는 나처럼 홀로 길을 가는 학자나 장사꾼을 숱하게 만났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들과는 적막한 길에서 늘 대화를 시도했다.
“망했노라…… 망했노라……”
나는 공중의 새를 향해 외쳤다.
“망했노라…… 망했노라…… 망했노라……”
곧 새떼의 응답이 내 목소리를 덮었다.(본문 280쪽)
무엇보다 참언讖言, 즉, 예언의 적절한 사용이 도드라진다. 참언의 사용은 중국 고대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다. 앞서 언급했듯, 『나 제왕의 생애』는 소설 전체가 “섭국의 재난이 머지않았다”는 거대한 저주에 휩싸여 있다. 이 주문은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반복되고, 많은 인물들에 의해 말해짐으로써 힘을 가져 섭국은 결국 소멸하고 만다.
작가 쑤퉁이 전통소설의 작법에서 빌려온 특징들과 ‘폐위된 왕’에게도 눈을 돌리는 작가 고유의 시선, 의식의 흐름을 좇는 모던한 작법으로, 소설은 “예스럽고 우아한 정조”를, “처연함의 미학”’(옮긴이의 말 341쪽)을, “가상역사소설의 짙은 센티멘털리즘”이라는 모순적이고도 독특한 울림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