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봄
1728년 봄, 조선 땅에 불어온 뜨거운 바람
무너진 종묘사직을 바로 세우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라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한양 한복판 군기시 앞으로 쇠사슬에 묶여 끌려 나온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곧 임금과 대소 신료들,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능지처참을 당했다. 1728년 3월, 반역죄로 처형된 이 사내의 이름은 이인좌였다.
“나는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소. 전대미문의 패륜 군주를 처단하고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봉기한 녹림당의 대원수일 따름이오.”
역사는 이 사건을 ‘이인좌의 난’ 또는 ‘무신란’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명신 대작 후손들이 대거 참여했을 뿐 아니라 부패한 세상에 등을 돌렸던 화적패, 수탈과 불평등에 괴로워하는 민중들 등 전국적으로 20만여 명이 가담한 이 거사를 ‘난’이라고 부르는 일은 과연 합당한가. 이인좌를 한낱 ‘역적’이라고만 일컫는 일은 타당한가.
승자(勝者)들의 횡포와 무지막지한 파괴 행위에 묻혀간 역사 속 패자(敗者)들의 진실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는, 승자만이 독점해온 역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인좌의 난’을 재조명한다.
독살 당한 경종의 위패에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고 영조의 군사들과 싸우러 나갔던
이인좌의 이야기가 300년 만에 살아서 돌아온다. ?이덕일(역사학자)
무신혁명군 대원수 이인좌!
그가 혁명의 대의로 삼은 이념과 철학은 무엇인가
그는 어떤 지략으로 청주성을 단숨에 점령했나
이인좌가 품었던 꿈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1728년(영조 4년, 무신년), 나라 안에는 영조가 왕의 혈통이 아니라는 풍문과 선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영조가 노론의 적극적인 지지로 왕세제가 된 뒤 왕위에까지 오르자, 경종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일부 소론파는 전국을 다니며 뜻있는 선비들을 규합하기 시작한다.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 온건파로 바꾸는 정미환국(1727년, 정미년)으로 소론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무신혁명군은 영조의 영악한 정치력으로 인한 폐해와 백성들의 가혹한 삶에 더는 참지 못하고 종묘사직을 바로 세우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거사를 준비한다.
이인좌가 대원수로서 선봉에 선 무신혁명군은 제대로 된 혈통을 가진 밀풍군 이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왕위에 올리고, 동시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도 백성을 여전히 양반과 상놈으로 갈라놓은 채 수탈에만 혈안이 된 기득권 세력을 처단함으로써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구해내는 것을 기치로 내걸고 거병한다. 이인좌가 이끄는 호서군이 청주성을 단숨에 함락시키면서 시작된 무신봉기는 정희량이 중심이 된 영남 지역, 박필현이 앞장선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진다. 영남의 정희량은 안음현과 거창현 두 지역을 단숨에 장악하고 한때 합천·함양 등 4개 군현까지 석권할 정도였다.
“우리의 봉기는 우선, 선왕을 독살하고 왕좌를 차지한 말도 안 되는 패륜을 저지른
임금을 갈아치우기 위함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상천지를 제대로 만드는 것이요.”
무신혁명군의 봉기는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다. 이 봉기는 노론·소론·남인의 당쟁이 극심했던 조선 정당정치의 폐해가 표출된 사건이며, 농업생산력 증가와 상공업 발전으로 인해 유민으로 전락한 농민, 두 차례의 큰 전란과 정부의 계속된 실정으로 삶이 피폐해져 가던 피지배층의 저항이 행동으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이 봉기 이후 영조는 다시 탕평책을 실시해 당쟁의 폐해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소론의 힘이 약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노론의 집권이 한층 굳건해지는 동시에 영조의 왕권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봉기가 평정된 후에는 경상도의 감영 소재지인 대구부의 남문 밖에 ‘영남반란평정기념비(평영남비)’가 세워져 진압에 끝까지 저항한 영남은 반역향으로 못 밖히게 된다. 아울러 부농층·중소상인과 하층민이 중세 봉건 신분 사회를 해체하는 변혁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서 그저 ‘반란’으로 치부하고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건이다. 무신봉기는 조선 후기 정치·사회 체제 및 권력 구조의 내부 모순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민중과 연대하여 실행된 가장 큰 규모의 권력투쟁이면서 의리와 명분이 분출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승자의 역사’ 뒤안길에 수백 년 동안 묻혀있던 진실을
끈질긴 탐구심과 왕성한 상상력으로 펼쳐낸 뜨거운 역사소설
“역사란 고작 승자의 반쪽 기록에 불과하다. 하지만 패자의 대의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림자처럼 숨겨져 있어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서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철저하게 승자의 기록이다. 이긴 자들은 패자의 삶을 잔인하게 말살하고, 그 흔적마저 무자비하게 훼손해왔음을 부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대개가 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역사에 미처 담기지 못한 패자의 시선으로 무신봉기의 진행 과정을 정밀하고 생생하게 그려낸 『이인좌의 봄』 안에 올올히 박힌 깨달음과 교훈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패자의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있는가? 진정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었는가? ‘진실’은 ‘거짓’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무신혁명군 대원수 이인좌가 품었던 꿈에 어느 정도 당도해 있는가!
줄거리 /
이인좌는 세종대왕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명망을 이어온 집안에 태어났지만, 당쟁에 휘말려 과거 시험도 보지 못하는 암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나라 안에는 왕의 씨가 아닌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며 왕위에 올랐다는 패륜적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이 상황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이인좌는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을 모은다. 무신혁명군의 대원수 자리에 추대된 이인좌는 그가 거병하면 영남 지역의 영남군과 호남 지역의 호남군이 동시에 거병하여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는 계획을 세운다.
1728년 봄, 이인좌가 지휘하는 청주 지역의 호서군이 기지를 발휘하여 순식간에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봉기는 곧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호남, 관서 지역까지 들불처럼 번져간다. 거듭된 자연재해와 잇따른 실정으로 고향에서 쫓겨나 화적패가 된 농민들, 두 번의 큰 전란으로 극한 상황에 몰린 민중들까지 참여하면서 봉기군의 세는 점차 불어난다. 각지에서 동조 거사가 잇따르고 이인좌가 마침내 한양으로 진격하려는 때, 조정에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출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본문 속으로 /
삼 년 전이었다. 그해 봄 남편은 열흘 남짓 한양을 다녀왔다. 말에서 내려 대문을 들어서는 남편은 노기가 가득 찬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남편은 자신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냈다. 몇 번씩이나 과거시험장 입구에서 석연찮은 퇴짜를 맞았다. 누군가가, 그 이유가 결국 우암의 후예 노론당파 벼슬아치들이 자신의 출사를 한사코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귀띔해주었던 것이다.
어디에선가 굵은 몽둥이를 하나씩 움켜 든 장정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계곡 건너 암서재를 향해 포효하고 있는 남편을 에워쌌다. 모두 여섯 명이었다. 남편은 그들의 모다깃매를 두려워하지 않고 온몸으로 다 받아냈다. 야, 이놈들아!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이냐? 무엇 때문에 네놈들이 번번이 내 전정을 가로막고, 이렇게 몽둥이질까지 해댄단 말이냐? -1장 ‘자정의 겨울’(16쪽)
“아, 오늘에야 이인좌 동지를 만나는군요. 나 이유익이라는 사람이오. 태인현 박필현 현감으로부터 이 동지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소이다. 정말 반갑소.”
이인좌가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저 역시 박 현감과 여기 일좌 형님으로부터 이유익 동지의 활약상을 익히 들어왔소이다. 대의를 위해 가산을 모두 정리했다는 이야기에 탄복했소.”
이유익이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탄복이라니요. 거사를 뜻한 자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오이다.”
이번에는 이일좌가 나서서 이유익 옆에 서 있는 통통한 사내를 소개했다.
“이 분은 양성에 사는 권서린 동지일세.”
이인좌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인좌라고 하오이다. 여기 일좌 형님으로부터 말씀을 익히 들었소. 삼 형제가 모두 우리 녹림당 동지들이라니 감탄스럽소이다. -3장 ‘밀풍군’(68쪽)
“도적패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한 치도 부끄럼이 없소.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날 때부터 도적이었겠소? 천재지변과 전쟁, 그리고 돌림병에다가 거듭되는 흉년으로 처음엔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을 씹으며 겨우 목숨만 연명했던 착한 백성들이었소. 묘방이 있으면 한번 말씀해보시오. 굶주림 속에 떠돌다가 결국 살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적질 말고 달리 무슨 길이 있소이까?”
부유사의 말은 그르지 않았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두 번의 큰 전쟁으로 처참해진 쪽으로 따지면 양반사회보다는 양민, 천민들 쪽이 훨씬 더 심한 게 사실이었다. 극한 상황에 몰린 사람들은 인육까지 먹을 지경이 아니던가. -4장 ‘변산 도적당’(94쪽)
“진실로 세상을 바꿀 수만 있다면, 조선을 지상낙원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오.”
“지름길이 있소? 자금 세상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된 게 아닐 터인데, 무슨 묘책이 있겠소.”
“평등한 세상을 만들면 되오.”
“평등이라……. 누가 누구와 평등한 세상을 말씀하시는 거요?”
“사람들 모두가 평등한 세상으로 바꾸자는 거요.” -4장 ‘변산 도적당’(97쪽)
“첫째, 백성들의 신역을 면제하거나 줄여주어야 한다. 둘째, 지금부터 우리가 점령하는 고을수령은 절대로 죽이지 말라. 셋째, 무고한 백성은 한 사람도 죽여서는 안 된다. 넷째,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지 말라. 다섯째, 부녀자들을 겁탈하지 말라. 여섯째, 환곡으로 군사들을 위로함에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 이 여섯 가지 강령의 실천 여부에 거사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오. 명심하고 또 명심하여 차질이 없도록 하시오. 알겠소이까?”
“예. 명심하겠나이다.”
장교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동헌을 저렁저렁 울렸다. -6장 ‘하늘이시여’(143쪽)
“혁신은 결코 서서히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오. 개 꼬리를 자를 일이 있다면 한꺼번에 잘라야지 설 잘랐다가는 개에게 물리기가 십상인 법이지요. 점진적으로 하자면 관료들과 사대부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몹쓸 짓을 다 할 것이오. 뜻과 이익에 맞지 않으면 다른 사상을 가진 유자(유학자)들을 악착같이 역모로 몰아 숱하게 죽여온 나라가 이 나라 아니오? 나의 처조부 되시는 백호 어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처럼 유자의 이론을 쓰지 않으면 그만일 터인데,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관성에 빠져 죽이고 죽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 아니오니까?” -9장 ‘봄날은 간다’(2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