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
‘은폐와 말살’을 넘어 ‘왜곡’의 단계에까지 이른
친일문학사에 대한 기억 투쟁
“부끄러운 그들의 이름, 잊으면 우리의 이름이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조국을 배반하고 나치에 협력한 문학·예술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탄원이나 구명운동도 받아들이지 않고 부역자를 숙청하였다. “그들이 도덕과 윤리의 상직적 존재”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35년 동안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그에 부역한 단 한 명의 문인도 단죄하지 못했다. 그 후 그들은 일말의 참회도 없이 해방된 독립 조국의 과실까지 아낌없이 챙겼다. 각종 문학단체의 대표를 역임하며 문화훈장을 받고, 나아가 문학상으로 기려지고 있기도 하다.
과거의 행적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들은 왜 민족과 역사 앞에 친일을 하였는가? 저명한 친일작가는 문학사에 획을 그은 작품들로 인해서, 잊힌 친일작가는 문학사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친일의 기록이 문학사에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저명하기에 또 잊혔기에 더욱더 일제 강점기 그들의 삶과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친일작가의 혐의는 식민 지배 시기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을 미화한 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들은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떠밀면서 국가(일본)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선동했으며, 여자정신대가 후방의 여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애국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저자 장호철은 30년 동안 국어 과목을 가르치고 교단을 떠나면서 느낀 마음속의 짐 때문에 이 책을 집필하였다. 한국 현대 문학사의 장을 연 유명한 문인들에 대해서 가르칠 때마다 일제에 협력하여 민족을 배반한 그들의 ‘과(過)’를 함께 가르치지 못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친일파 연구의 고전이 된 고 임종국 선생의『친일문학론』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전 3권)을 넘나들면서 부역문인들의 친일 작품 목록과 내용들을 인물별로 꼼꼼히 정리하였다.
친일파, 친일문인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보면 그와 함께해 온 임정 100년, 독립 100년의 역사를 따로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친일문인의 일제 강점기 행적이 독립운동가의 삶과 따로 떨어진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며, 이후 독립된 국가를 세우기 위한 반독재, 반쿠데타 민주주의운동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그들의 삶 전체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또한 남한 현대사에서 친일문인들이 ‘메인 스트림’에서 밀려나지 않고 전 생애를 주류로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해방 후 승승장구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비극이 현대사를 얼마나 왜곡하고 굴절시켜 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삶을 친일 이전과 이후, 그 뒤 다시 변절한 이후까지를 온전히 그려내는 작업은 역사를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시작이며, 이후 분단된 남북의 한국 근현대 문학사를 총체적으로 완성하는 미래를 향한 첫 발걸음이다.
부역문인들의 삶과 친일 행적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다
“《매일신보》에 창씨개명으로 히가시 후미히토(東文仁)가 된 소설가 김동인의 친일 논설 「반도 민중의 황민화」가 실린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가 숨졌다. 이튿날인 1월 17일,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이광수는 ‘축 입영(入營)의 노보리(깃발)’와 ‘센닌바리(천인침)’를 찬양한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입영기(入營旗)」라는 글을 《매일신보》에 발표하였다. 이틀 후인 1월 19일,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가 된 시인 주요한이 《매일신보》에 「천인침(千人針)」을 발표하였다.”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독립과 해방을 위해 몸을 던진 민족시인의 삶과 친일문인들의 삶이 마치 별개의 경로로 전개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기실 이들의 삶과 문학은 이렇듯 동시대에 엇갈리고 있었다. 지난 시대의 역사지만 우리가 친일부역의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어떻게 친일부역의 길로 들어섰는가? 일제 말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이 대일 협력에 대거 나서게 되는 계기는 대체로 만주사변(1931) 직후, 중일전쟁(1937) 직후, 태평양전쟁(1941) 개전 이후 등 세 단계로 나뉜다. 나름대로 국제 정세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던 조선 지식인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세 사건 직후에 결정적으로 무너진 것이다. 이들은 일제가 선전한 ‘대동아공영권’ 또는 ‘아시아·태평양 체제’의 구축이 불가항력이라고 ‘오판’하였다. 이로써 보듯이 그들의 친일은 “그때 태어났다는 것, 그때 살았다는 것 자체가 친일이 될 수도 있”는 정황론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변절 이후 친일 문필 활동은 물론, ‘호국신사 어조영지 근로봉사’나 ‘군복 수리 근로’ 등에 동참하고, ‘저축 강조의 결전 대강연회’, ‘순국영령방문단’,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 등에 부지런히 참여하였다.
또한 그들의 친일은 그저 일제의 프로파간다에 이용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해방되는 그날까지 동족을 향해 친일과 순종을 강요하고 징병과 학병을 위한 선전·선동에 매진하였다. 친일작가 정인택은 1945년 8월에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회 간사장을 맡음으로써, 박영희는 1945년 8월 1일 조선문인보국회 평론부 회장으로 선출됨으로써 마지막 친일부역의 역사를 완성하였다. 최남선은 해방되던 해에 「특공대의 정신으로 성은에 보답합시다」라는 글을 통해 “대동아의 전쟁은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치는 싸움”이라며 “조선 동포도 대동아 민중으로서” 특공대 정신으로 거룩한 사업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김동인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는 날까지도 일본의 패망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당일 오전 10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을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해방 이후 그들의 행적은 더욱 화려하다.
이처럼 친일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단순하게 학도병에 지원하라는 식의 구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발성으로 끌어내는 확고한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갖췄으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소멸되지 않기에 계속하여 이식·번식하고 증가하였다. 최재서는 일본정신에 바탕을 둔 국민문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국민문학론’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박영희는 평론의 형식으로 일제의 각종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조선인과 조선 문인이 가져야 할 자세와 ‘국민문학’, ‘전시문학’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친일작가는 모두 27명이다.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에 실린 28명 가운데 21명(이광수·김기진·김동인·김동환·김억·김종한·노천명·모윤숙·박영희·유진오·이무영·정비석·주요한·채만식·최정희·최남선·최재서·백철·이석훈·김용제·정인택)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의 6명(윤해영·서정주·이원수·유치진·장덕조·이인직) 등이다. 김문집과 장혁주, 정인섭, 조용만 등 16명은 일반에 낯설거나 덜 알려진 이들이라서 책 끝에 ‘나머지 문인들’로 모아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저자는 그들의 친일 행적을 밝히는 자료들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문인들이 어떻게 친일부역의 길을 걸어갔는지를 생애와 작품을 연결하여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이 책의 특징
마지막이자 첫 ‘친일문학론’ 수업
학생들과 함께하는 문학 수업에서처럼 저자는 친일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와 문학사적 위치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들이 현재 문학사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나아가 변절의 순간에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꼼꼼하게 소개하고 있다. 학생들과의 문학 수업에서 할 수 없었던 ‘친일문학론’ 강의를 글쓰기를 통해 더 많은 독자들과 함께하고자 한 저자의 노력이 담겨 있다.
기억을 통해 앞으로
친일문인들의 행적에 대하여 최근까지 검증된 자료를 바탕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하였다. 실제로 발표된 지면 도판을 확인하고 친일작품 인용문을 읽다 보면, 그들의 행적이 어떻게 민족을 배반하고 역사를 왜곡하였는지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국내에 세워지고 있는 친일문인들의 동상과 기념관을 직접 답사하고, 그들이 현재 어떻게 기려지고 있는지, 그에 대하여 시민단체를 비롯한 친일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그려내었다. 이를 통해 친일 청산이 결코 미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기억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변절 이전과 이후, 그리고 해방 이후의 삶까지
해방 이후 친일문인들의 행적까지 추적함으로써 전 생애에 걸쳐 문학사적 공과를 온전히 그려내고자 하였다. 친군부, 친쿠데타로 이어지는 변신의 모습을 통해 작가로서의 자기 부정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신생 대한민국에 대한 헌신으로 포장된 지식인의 기회주의적 모습과 여전히 각 장르의 원로로 대우받는 모습을 통해 청산하지 못한 굴절과 왜곡의 역사를 담아내었다.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에 대한 성찰
글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에 대하여 일침을 가한다. 학계조차 친일 문제 연구를 외면하고 과거 친일에 연루된 언론이 이 문제를 호도하면서 그 대중적 논의 구조마저 차단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무분별한 기념사업과 함께 ‘공익보다는 사익, 주관적·집단적 이익 몰이 등이 기념사업의 주축’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은폐와 말살’을 넘어 ‘왜곡’의 단계에까지 이른 친일문학사에 대한 기억 투쟁에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본문 속으로
친일파 옹호란, 사상사적으로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을 강조하고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며 나아가 부추기기도 하는 극우파적인 이데올로기다. 인종 편견, 신앙 편견, 약소국 억누르기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무력 침략을 감행해도 좋다는 파시즘적 가치관을 고수한다. 친일파가 ‘친미파, 독재권력 옹호, 민주화운동 반대, 평화통일 반대, 개혁과 개방 반대, 노동자·농민 등의 관점이 아닌 재벌과 상류층 이익 옹호, 사회복지보다 성장 일변도의 신화 옹호, 해외 파병 지지, 국가보안법 지지,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 지지, 일본의 대북 강경책 지지, 박근혜식 국정교과서 지지, 이명박·박근혜 등 지지, 태극기 부대 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터이다. 따라서 촛불혁명과 친일문학은 너무나 궁합이 안 맞고, 남북 민족화해와 평화의 시대와도 걸맞지 않다. - 「추천사」(문학평론가 임헌영)
친일 인사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참회한 예도 드물지만, 후손이 선대의 친일 행위를 사죄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김동환의 삼남 김영식은 부친이 친일문인으로 지목된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다’며, 역사적 평가에서 공과가 교차된 선친의 행적은 그 분야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분명 교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 총경으로 은퇴한 김영식은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후손들을 직접 만나 사죄하기도 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 04 김동환, 일제에 엎드려 ‘웃은 죄’
문인들의 친일 행위를 들여다보면 일정한 시기를 지나면서 이들의 반민족적 일탈이 매우 위태위태하게 치달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본인이 얼마나 체감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자기 부정과 굴욕의 수사들 너머에 최소한의 민족적 정체성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다.
노천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친일에 대한 변명이나 해명도 따로 보이지 않으니, 일말의 갈등이나 번뇌조차도 상정해 볼 수 없다. 정말 그는 친일부역, 그 반민족적 선택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던 것일까. 노천명의 친일은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는 시기까지 일관되게 이루어졌다.
- 07 노천명, 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애국문학자가 제작한 위대한 문학 작품은 그 한 자 한 구절이 포탄이며 전선 장병이 목말라하며 후방의 국민에게 요청하는 비행기이기 때문에 우수한 문학자를 결전하(決戰下) 생산 각 부분에 계속 투입하고, 그들에게도 생산 수량 전임제랄까, 일정한 기간 내에 국가가 요청하는 우수한 문학 작품을 생산시키자.”(「결전문학의 수립을 위해(決戰文學樹立の爲めに)」, 『문학보국』 1944년 8월호)
- 12 이무영, 총독상을 수상한 농촌소설가
그는 또 농촌 생산 현장의 ‘총후보국’을 독려하면서 지식인의 분발도 촉구하였다. 「지식인」(『동양지광』 1942년 7월호)에서 과거에는 ‘숨쉬는 편리한 농기구’ 정도에 지나지 않던 농민이 ‘열렬한 국가의식’ 아래 새로 태어났다고 칭송하였다. 그는 ‘놋쇠제품 헌납운동’에 참여하고, 쌀 절약을 위해 모내기 때에도 도시락을 싸 오고, 생산 확충을 위해 밤잠도 안 자며 가마니를 짜는 등의 모습을 보여 주는 농민과 견주어 이제 간신히 시국에 눈을 뜬 지식인으로서 부끄럽다고 자책하기도 하였다.
- 14 정비석, 낙원 일본을 칭송하던 『자유부인』의 작가
1943년 4월에 최재서는 『전환기의 조선 문학(轉換期の朝鮮文學)』을 발간하였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먼저 가 버린 아들 강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면서 “네가 죽었을 때 나는 막 태어난 『국민문학』을 너의 추억과 함께 키워 가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한다. 그 자신이 “일본 국가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르기까지의 혼의 기록”이라고 하였으니, 이 책은 황국신민 최재서의 ‘국가 정체성 발견 기록’이라 할 만하다.
- 23 최재서, ‘천황에게 봉사하는 문학’ 완성
여기에 실린 단편 소설 「선령(善靈)」(『국민문학』 1944년 5월호)은 「고요한 폭풍」(1941) 이후 주인공 박태민의 정신 생활을 그린 작품이다. …… 어느 날, 한 시인이 그의 연재소설에 대해 시비를 걸면서 “아부하는 꼴이란 볼 만하더군!” 하고 냉소하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먹을 휘둘러 그를 때려눕힌다. 착잡한 심리 상태가 민족적 양심을 지적한 시인에 대한 폭행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는 권고받은 문학대회에 출석하는 대신 만주로 떠난다.
임종국은 이 작품의 주인공 박이 ‘이미 이성을 상실해 버린 친일파들의 자화상’이라고 지적한다. 짙어지는 ‘패전의 음영’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하여 ‘자기혐오’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팔던 이들 부역 문인들의 본능적 자기방어일지도 모른다.
- 25 이석훈,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을 꿈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