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감각
2500년의 지적 유산,
인문학적 통찰을 선물하다
여느 학문처럼 수학 역시 인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수학 하면 공식이나 계산을 먼저 떠올려 도리질할 분들도 있겠지만, 그 유구한 세월 동안 인류의 삶에 수학의 지혜가 깊게 스며든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학에서 발견한
삶의 지혜
《수학의 감각》은 무한, 수와 셈, 숫자 0, 평행선 공리, 등차수열의 합, 소수 등 우리에게 익숙한 수학 요소들에서 인문학적인 메시지를 끌어낸다. ‘무한’을 통해서는 어떤 문제에 부닥쳤을 때 좌절 대신 긍정적인 에너지를 상상하게 하고, ‘수와 셈’에선 우리 모두 수와 셈처럼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음을 깨우치며, ‘숫자 0’에선 세상엔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 있고 그걸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순응’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평행선 공리’를 통해서는 아무리 해도 어떤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는 시스템 자체를 의심해 보길 권한다.
또 ‘쾨니히스베르크의 7개 다리 문제’를 오일러가 어떻게 해결했는지 보여 줌으로써 유연함이 타협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태도일 수 있다고 말하며, 어린 가우스가 1부터 100까지 더하는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다른 방법들과 비교해 보이면서 “정해진 자원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도 잘 안 된다면, 먼저 문제 상황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지 보라”고 한다. 가우스처럼 일단 문제와 거리를 두고 문제 자체의 틀을 보는 것도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란 것이다.
또 숫자와 식이 단순한 형식을 얻기까지 과정을 보여 주면서 단순화 과정은 군더더기에 가려졌던 본질을 전면에 드러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생각이 싹튼다고 피력한다. ‘소수’에서는 수학 발전의 기폭제 중 하나가 수학자들의 ‘실수’였다는 점을 짚으며 “누적된 실수가 패러다임을 조금씩 업그레이드해 가”듯이 실수는 ‘실패’가 아니라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임을 확인시켜 준다.
수학 발전의 원동력은 ‘질문’이다. 지극히 당연해 보였던 사실에 대해 “정말 그럴까? 왜 그렇지?”라고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서 진짜 수학은 시작되었다. 의심과 질문이야말로 수학의 힘이요, 창조의 원천이다. 질문은 살아가는 데에서도 놓아선 안 되는 것이다. 주어진 대로 무조건 받아들이는 마음, 쉽게 ‘당연하지’ 해 버리는 마음은 우리 삶을 고착시키기 때문이다.
인문 독자들에게
지평을 넓혀 줄 수학의 세계
보통 수학 교양서들은 대부분 일상에 숨겨진 수학의 원리를 밝혀내는 데 초점을 둔 반면, 《수학의 감각》은 수학이 품고 있는 삶의 지혜를 뽑아냄으로써 수학을 우리 곁으로 더 바싹 끌어당긴다. 저자가 수학뿐 아니라 인문사회학을 오래 공부해 가능해진 일이다.
인문사회학에서 수학 세계로 ‘이민’을 가고 수학 세계에 적응하면서 그런 생각이(수학 하면 공식과 계산 기술만 떠올리는) 바뀌어 갔다. 마침내 수학과 인문학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 적어도 나에게 수학은 삶의 지혜를 가르쳐 준 마력을 가진 학문이었다. -〈저자 서문〉에서
저자 박병하는 인문학을 공부하다 수학에 매료돼 러시아로 건너가 10여 년간 공부했다. 귀국 후에도 계속 수학을 공부하고 있다. 우연히 아르키메데스 저작을 읽으며 고전 공부 하는 재미에 홀려 꾸준히 수학 고전도 본다. 아르키메데스, 데카르트, 오일러 등이 남긴 고전을 번역했고, 4년간 유클리드 《원론》을 강독하기도 했다.
이 책엔 수식이 많지 않다. 중학 수학 정도의 지식만 있으면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게 쓰였다. 수학의 세계가 궁금해 기웃거린 적이 있는 인문 독자라면 좋은 출발점이 될 책이다.
〈책 속에서〉
상상에 무한을 ‘모셔’ 오면 무한의 괴력을 빌려 올 수 있다. 무한은 작렬하는 태양처럼 어떤 제약 조건도 녹여 버리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면 제약 조건이 완전히 사라진, 툭 트인 상상의 공간에 서서 먼저 그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시작해 보라. -14쪽
무한을 머릿속에 도입해 상상하는 것은 단순히 놀이가 아니다. ‘이건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은 상상력을 좀먹는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조언하고 싶다. 머릿속에 무한을 데려와 가정해 보아야 한다고. “이건 말도 안 돼!”라고 말하는 순간 자기 스스로 상황을 말도 안 되게 만들고 있는 거니까.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까지 못하게 된다. -26쪽
질문에 다가갈수록 더 모호해지는 것들은 수학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엄격함이 생명인 수학에서도 어쩔 수 없이 모호해지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수학은 이런 질문에 답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남겼다. 이 방법이다며 보란 듯이 통쾌한 해법을 내놓지는 않지만 어떤 대상이나 일의 본질을 파악할 때 되새겨 볼 만하다. 조언의 핵심은 “그것 자체를 보려고 하지 말고 관계망으로 보라”는 문장으로 응축할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 장에서는 점과 직선, 수와 셈을 도우미로 쓰기로 했다. 익숙하고 기본적인 것들이라 상상력의 뿌리로 가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30쪽
점에게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점은 아무 말 않고 직선을 가리킬 것이다. 직선에게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직선은 ‘나를 반듯한 것이라고 보기 전에 저쪽을 봐 주세요’ 할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점이 있다. 너는 누구냐고 음수에게 물으면 곱셈을 가리키고 곱셈에게 물어보면 음수를 가리키고 분수에게 물으면 나눗셈을 가리키고 나눗셈에게 물으면 곱셈을 가리킬 것이다. 돌고 돈다.
내가 있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고, 너는 내가 있기 때문에 있다. 좋건 싫건 그 관계망 속에 내가 있다. 나는 관계 자체이며 관계의 ‘사이’에 있기도 하다. 점과 직선, 수와 셈은 악기와 손의 관계처럼 따로 있어서는 소리를 못 낸다. -41, 42쪽
그렇게 있어야만 하는 것은 그렇게 있어 줘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묻고 그렇게 했을 때 가장 좋다면 고정관념을 과감히 버리고 ‘그래야만 한다!’고 순응하는 것이다. 0은 말한다. 먼저 ‘그래야만 하나?’를 물어보라.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62쪽
아무리 해도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시스템 자체의 결함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을 직시하고 과감하게 껴안아야 한다. 시스템을 새로 정립하는 방법은 개인이나 기업처럼 단위의 크기, 그리고 문제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시스템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93쪽
나의 고유한 속성을 알고 나를 변신시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오일러가 길을 텄던 새로운 기하학을 생각한다. 오일러는 쾨니히스베르크 시와 강과 다리를 말랑말랑하게 변화시키며 점과 선의 연결 상태가 될 때까지 다 지워 갔다. 그러자 문제의 근본 골격이 드러났고 문제가 매우 단순한 형태로 바뀌어 간단히 해법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해도 되었다. 점과 선의 연결 상태는 그대로 두되, 점과 선 대신 다른 무엇으로 말랑말랑하게 바꿔 보기 말이다. 그런 말랑말랑한 세계 안에서 찻잔은 반지를 꿈꾸자 반지가 되었다. -111, 112쪽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우스를 떠올려 봐도 좋을 것 같다. 정해진 자원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도 잘 안 된다면, 먼저 문제 상황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지 봐야 한다. 가우스가 1, 2, 3, …, 100의 수들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보았듯이, 일단 문제와 거리를 두고 문제 자체의 틀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바꿔 보며 무엇이든 해 보라. 넘치는 것은 나중에 덜어 내면 되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채우면 될 일 아닌가. -150쪽
충분히 단순한 형식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증거다.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할 만큼 군더더기가 있다는 반증이다. 지금 어떤 문제가 지독하게 얽혀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면 문제를 나타내는 형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유치할 만큼 단순한 형식으로 문제를 나타낼 수만 있다면 그 문제는 반 이상 해결된 것이라고, 그 단순한 형식이 다른 문제까지 해결하게 도울지도 모른다고, 지금 수학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167쪽
같아 보이는 것 중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참-거짓표를 증거 삼아 명명백백 드러냈더니 반대로 달라 보이는 것 중에 같은 것도 있었다. 이 발견을 발전시켜 생각을 계산해 내는 단순한 예도 보았다. 여기서 생각 덜어 내기는 다시 한번 도약한다. 낯익은 생각을 낯설게 하고, 낯설게 된 생각을 뒤집어 더 낯설게 하는 식으로 현실에서 무한히 변용될 수 있다. 이처럼 생각 다이어트는 생각의 골격을 드러내고 우리의 잠자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것은 생각이 형식에 얹혔기 때문에 가능했다. -217쪽
계산이 없으면 현대 문명은 1초도 작동할 수 없을 것 같다. 계산이라는 비창조적인 행위들이 어떻게 현대 문명을 탄생시킨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계산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이끈다.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와 정반대 현상을 맞대어 보듯 나는 가장 비창조적이라는 계산에게 창조의 길을 물어보라 제안한다. -222쪽
숫자 표기의 혁신이 기본 셈의 혁신을 이루었듯이 작은 혁신이 밑거름되어 큰 혁신을 낳는다. 복잡한 과정을 단순하게 해서 창조에 집중하도록 하려고 수학은 계산을 창조해 왔다. 초고속 빅데이터 시대일수록 계산은 더 계산다워져야 한다. 일과 생활에서도 계산을 창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수학은 이렇게 조언한다. -238쪽
수학의 역사에서는 실수가 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정답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쐐기를 박아 버릴 수 있지만 ‘잘 틀리는 것’은 생각의 빈 지점을 드러내기 때문에 상상력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살아가면서도 이런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어떤 질문을 던졌는데 한 사람이 쐐기를 박는 정답을 말해 버리면 더 할 이야기가 없어지는 반면 잘 틀려 주면 분위기는 역동적이 되고 상황을 더 면밀히 검토하게 된다. 틀린 사람 덕분에 함께한 사람 모두의 사고가 일제히 고양되는 것이다. 반대로, 그만큼 개인이나 조직이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상상력의 공간도 제한된다. -244쪽
직관은 ‘당연하다. 그냥 받아들이라’고 속삭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직관이 시키는 대로, 그래 당연해, 하다 보면 현실은 고착된다. 딱딱한 땅에 상상력은 뿌리내릴 수 없다. 동양 수학이 고대와 중세의 높은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변방의 변방으로 퇴보한 원인도 여기에 있다. 의심을 허락하지 않고 실용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만 수학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열쇠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정말?’과 ‘왜?’에 붙어 있는 물음표, 그것이 창조의 광맥을 찾는 열쇠다. -277, 2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