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영혼
집중! 에고와 싸워 이기는 난사難事에 대하여
현실에 코 박고 살아가는 대신
지금 여기에 없는 현실적 공허를 살피는 집중은 왜 필요한가
장인에 이르는 성실한 적습은 어떻게
영혼을 생성시킬 만큼 존재를 거듭나게 하는가
철학자 김영민은 지난 25년여 간 꾸준히 새로운 글쓰기와 철학적 개념들로 한국 인문학의 독특한 줄기를 이뤄왔다.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신간은 그간의 공부론을 집대성하고, 공부론의 실천을 통한 인간의 가능성을 가장 밀도 있게 담아냈다. 이 책의 주제는 제목에 드러나 있다시피 "집중"과 "영혼"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즉자적 동물성을 벗어나는 메타적 순간들을 살핀다. 공부의 목표에 "열중"하는 일에서 벗어나, 공부의 수행성을 다양한 각도로 "집중적"으로 살핌으로써 "영혼"이라는 삶의 내용을 모아내고 있다.
‘열중’과 ‘집중’, 그 차이에 대하여
우리 시대 개인들은 제대로 된 집중의 삶을 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기 일쑤다. 대부분이 도시인인 우리는 이유 없는 피로에 젖어 삶에 대한 지속적인 에너지를 유지하지 못한다. 저자는 한국인이 매사에 들떠 부스대고, 명멸하는 하나의 매력에도 전체가 쉽사리 쏠려가 도무지 집중의 미학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관찰한다. 집중 대신 열중과 몰입만이 흔하게 보인다. ‘몰입 학습’ ‘열중 성공론’과 같이 집중은 변질된 형태로 성과주의의 중요한 도구가 된다. 돈으로 뛰고 인기로 먹고사는 축구 선수도 열중하며, 상가 재건축을 위해 세입자들을 솎아내는 이들도 열중한다.
하지만 열중은 집중과 다르다. 열중은 도구적이고 호흡이 짧으며 자기 배리를 보인다. 따라서 그 행위들은 언뜻 순수하고 멋있어 보일지 모르나, 사욕에 좌우되며 어느새 정신의 진보를 막는 수렁으로 작용한다는 게 이 책의 큰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집중과 열중을 구분케 하는가? 저자는 열중에 비해 집중은 ‘존재론적 겸허’를 갖춘 태도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과 무늬를 형성케 한다. 마음은 뇌의 활동에 따라 떠오르는 것이며, 뇌는 몸의 활동에 의해 내면화된 것이고, 몸은 타자와의 조응적 활동에 의해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단계에서 집중이 행위의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집중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하자면 그 길은 좁은데,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차분하고 견결하게 이루어지는 집중과 정성이야말로 달達과 성聖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이 ‘좁다’ 함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에고와 싸워 이겨야 하는 난사이기 때문이며, 그래도 그게 ‘길’일 수 있는 것은 여러 틀로써 그 본을 보여준 학學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집중을 하기로 하자면 그 행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방향이다. “사랑은 영혼의 상태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시몬 베유가 말했듯, 집중은 무엇보다 갖은 정신적 에너지의 밑절미가 되기에 그 방향에 따라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 죽 쒀서 개주어서는 안 되고, 공들여 오른 산이 엉뚱한 곳이어서는 곤란하며, 호의가 지옥으로 안내하는 길라잡이 노릇을 해서는 파국이다. 마찬가지로 전념해서 일군 재능과 성취가 폭력과 죽임의 매체로 전락하는 것도 비극이다.
그러므로 집중하는 사람이 집중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의 집중이 얹힌 생활양식은 어떤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지, 그리고 그 집중이 이웃과 세상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하는 문제가 다시 ‘문제’가 된다. 이런 뜻에서 집중은 문제의 해결이 아닌, 가장 중요한 문제를 발굴한 것인 셈이다. 그러므로 집중은 구체적인 여건과 매체의 조건에 얹혀 점진적으로 개량되는 극히 인간적인 과정으로 봐야 한다.
더욱이 집중이라는 행위는 ‘완전히 순수한 집중’, 즉 강도가 중요하다. 엄벙덤벙, 데면데면하다면 그것은 이미 집중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주의의 상혼이 인문적 집중과 버성길 수밖에 없는 변덕과 자의의 시대에 제 나름의 형식과 강밀도를 지닌 집중의 생활을 유지하는 일은 어렵고 또 그만큼 중요한 생활정치의 노력일 것이다. 요약하자면, 집중은 강도-지속성-방향이 핵심이다.
인문학적 존재-새로운 말을 배우며 낯선 감성에 응대하기
인문학의 토대는 무엇보다 문자학으로, 그 알짬은 ‘(새로운) 말을 배우는 일’이다. 그런 뜻에서 문학적 감수성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곧 문학’으로, 어쩌면 문학 혹은 문학스러운 것들은 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근엄한 인상의 신사들이 감히 내뱉지 못하는 말과 글을 쉼 없이 흘리면서 인간의 앎과 그 의미를 내내 드러내왔는지도 모른다. 모든 좋은 문학은 그 글쓰기의 의도를 벗어나 빛살처럼 사방으로 튄다. 논리나 추론보다 빠르고, 인정이나 공감보다 빠른 곳곳에서 독자들은 인간 및 삶의 진실과 마주친다. 진리와 의미 생성에서 문학스러운 표현들은 논문처럼 쥐어짜내지 않아도 오히려 생생하게 그 취지를 그려낸다. 그리하여 토대로서의 문학은 철학, 경제학, 법학 등 학문 전 영역에 스며들어 그 실천적 지평에서 공감의 기반을 만들어내며 배제와 편향으로 기우는 이론들이 해결 못한 빈곳들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세계는 이로써 조금씩 자기수정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도로서의 인간이 즉자적 동물성을 벗어나는 메타적 순간마다 피할 수 없이 접속하게 되는 인문人紋의 터는 곧 (낯선) 말이다. 가령 사투리든 외국어든 한 언어의 세계는 구조적으로 하나의 ‘완결’된 방으로 기능한다. 그 방이 복도로 이웃 방으로 마루로 마당으로 고샅으로 신작로로, 그리고 선창이나 국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상당한 실존적 비용이 든다. 그야말로 우연찮게 들어가 살게 된 자신의 집은 이처럼 스스로의 습관과 환상 속에서 그 세계를 완결짓는데, 공부, 특히 철학적 사유는 바로 이 세계의 미결을 실존적으로 알아채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성과 겹치거나 어긋나는 언어성의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의 방 안에 묵새기고 있으면서 그 내부 풍경이 익숙해지면 질수록 다른 방들의 존재는 잊혀가지만, 다양한 소통의 망을 통해 운행되는 인간의 갖은 말은 이러한 타성에 균열을 내고 다른 방, 다른 말, 다른 세계에 대한 비교적·메타적 관심을 촉발시킨다.
집중의 사례-일본이라는 내면
낯선 말과 낯선 감성의 세계의 하나로서 일본을 들 수 있다. 일본인은 한국인과 놀랍도록 닮았지만 기실 둘 사이엔 공통점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만치 서로 낯설며, 한국과 달리 일본의 내면은 ‘집중’의 한 사례로서 깊이 들여다볼 만하다. 특히 저자는 여행자처럼 건정건정 스쳐가며 보지 않고 한 집 한 집에 눈을 머물러두면 참 다르다고 말한다. (이는 처음 미국을 접할 때 그 표면은 매우 달라 보였지만 결국 한국과 닮았다고 결론 내리게 된 것과는 정반대다.)
그 다름은 가령 ‘장소감’이란 단어를 내세워 생각해볼 수 있다. 일본의 골목길이나 가게나 집 주변이나 정원 혹은 그 내부는 차분하고 정갈하며 작고 미학적이다. 그 어디에나 사람들의 지속적이며 알뜰한 노동이 일구어낸 ‘장소’들이 빼곡하다. 장소를 지배하는 존재의 책임은 사실 무한한 것인데, 가령 어떤 장소를 지배하는 인간의 책임은 자기 자손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길고양이는 물론 길섶의 야생화와 그 마을의 공기까지도 다 그의 책임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제 장소를 가꿀 줄 아는 이들이다. 그중 저자에게 일본의 내면과 생리를 풀어내는 데 주요 화두가 된 것은 바로 그들이 청소하는 모습이었다. 집중이라는 행위가 낮은 곳으로, 작은 것으로, 숨은 곳으로 정교하게 이뤄지는 지속성이라면 청소는 그 전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소는 비루하고 하찮게 여겨지지만, 사실 생활 내용의 길과 테두리를 짓고 그 형식을 빛나게 하며 더러 자기 성찰력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한쪽 무릎을 땅에 붙이고 마치 땅에 흘린 바늘이라도 주우려는 듯 청소하는 일본인의 태도는 차분한 집중의 전범이 될 수 있다. 일본인들이 이곳저곳에서 청소(소우지)를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타자를, 이웃을 배운다는 게 무엇인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청소가 섬세하고도 자신 있게 향하는 바로 그 낮은 곳으로부터, 졸부주의적 급속 근대화에 물든 한국사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 배움의 씨앗을 얻어낼 수 있다. 즉 졸부들이 갖지 못한 게, 무엇보다 ‘장소(감)’라는 사실을 이처럼 극명하게 드러낼 도리도 없어 보인다.
이 책에서 깊이 탐색하는 달인과 성인도 장소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이 유지해온 지속적이며 순도 높은 집중과 정성은 차츰 그 자신과 주변을 변화시켜 자기 자신을 웅숭깊고 으늑한 장소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했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장소성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존재하는 곳에 있는 생명과 물건들도 그의 정성의 역사가 깃든 장소감에 의해 순해지고 차분해질 것이다.
인문학, 사람의 무늬
-자아의 형식(자본제적 삶)과 창의적으로 길항하기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의 무늬人紋’를 다룬다. 사람이 지금의 삶의 형식과 무늬를 얻게 된 내력을 살피고, 그것의 문제점을 비평하며, 아름답고 생산적이기까지 한 무늬를 얻을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자리에는 당연히 여러 ‘값price’을 가진 것들이 오간다. 그러나 값의 체계는 흘리는 미소에 감동할 뿐, 의식의 집중을 넘어 영혼을 생성해내는 인간적 가치의 세계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 사람은 값이 매겨지는 차원을 훌쩍 넘어서면서 고유한 무늬를 얻고, 이에 따라 주변의 값을 지닌 물건들은 ‘가치value’를 띠게 된다.
따라서 인문학적 초심이란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가치와 값 사이를 가르는 심연을 응시하면서 그 심연을 가로지를 도약을 앞둔 상태다. 그러니까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이란 값이 매겨지긴 했으나 사람의 무늬 앞에서 아직 가치를 얻지 못한 상태 혹은 이제 막 얻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킨다.
인문학적으로 되려면 공부가 필요하며, 인간의 자아가 문제의 중심에 놓이는 것이 그 핵심이다. 즉 공부에 형식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자아의 형식과 창의적으로 길항하는 길일 것이며, 글쓰기가 에고의 죽음을 거쳐 생기는 지경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우선은 “칠십 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추사식의 절차탁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부와 수행의 눈은 특정 대상을 포착한다기보다 자기 자신의 에고를 깨고 비우고 넘어서려는 공력의 총체적 집중을 뜻한다. 그러므로 몸에 근착하고 있는 버릇을 손대지 않고서는 교양도 기도도 반성도 결심도 필경 도로 아미타불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정작 중요한 것은 ‘주체화’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스스로 지며리 지워나가는 희생양적 삶이며, 자신을 ‘체제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삶의 양식’에 따른 제물로써 주변을 차분하게 정화하는 데 진력하는 삶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시속時俗과 제 생각을 닮은 ‘꼴’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의 사유와 실천을 바꿀 수 있는 ‘본’을 얻어낼 것인지 하는 선택에 있다. 자신의 생각과 이유와 변덕과 냉소와 허영을 죽이고 이 선택에 조응하는 좁은 ‘틀’ 속에서 살아갈 의지와 실천력이 있는지 하는 데 공동체적 삶의 알속과 요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