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
글로 읽는 ‘먹방’, 방콕 식도락 여행기
여행작가 박민우가 3년 만에 여행기를 펴냈다. 방콕 맛 여행기다. 2011년 이후 8년 동안 방콕에서 지낸 박민우 작가가 그곳에서 생활하며 찾아낸 보석 같은 맛집과 태국의 맛에 관한 글이다. 책을 준비하고 완성하는 데만 5년 이상이 걸렸다.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단순한 맛집 소개가 아니다. 태국의 음식 문화에 대한 소개, 여행자 혹은 이방인으로서의 태국을 보는 시선, 삶에 대한 성찰, 독자에게 건네는 위로 등이 담겨 있다. 박민우 작가 특유의 생생하게 살아 있는 글은 저절로 머릿속에 화면 하나를 만들어 음식과 그 맛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방콕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필독서가 될 것이며, 방콕을 가지 않아도 태국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건져 올린 꿀 정보
태국의 중심 방콕은 동남아시아의 중심이기도 하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여행자들이 모여들어 언제나 기분 좋은 떠들썩함으로 출렁거린다. 불교의 꽃을 피워온 역사와 문화가 여전히 살아 있으면서 도시의 쾌적함까지 담고 있다. 방콕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선택의 폭이 넓은 현란하고 화려한 음식이다. 길거리음식의 천국이기도 한 방콕은 종류를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쌀국수, 커리, 해산물 등을 비롯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무엇을 먹느냐는 여행 전체의 기억을 좌우할 만큼 커다란 기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행 전 맛집 정보를 찾기 위해 마우스의 클릭‘질’을 쉽게 단념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분류 없이 식당과 레스토랑의 정보가 넘쳐나는 데다 입맛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앞 다투어 올리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로 인해 여행지에서 실패하지 않고 충족한 포만감과 소중한 한 끼의 추억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태국 요리에 빠져 9년째 방콕에서 살고 있는 저자
사실 인터넷과 모바일이 정보의 세계를 점령한 마당에 맛집과 관련한 책은 더 이상 종이책으로 유의미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과 관련한 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가 단순히 레스토랑 정보만을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박민우는 2007년 《1만 시간 동안의 남미》와 《1만 시간 동안의 아시아》 시리즈를 출간한 이후, 현재 9년째 방콕에서 지내고 있다. 관광객들이 복작거리는 유적지에서 감흥 없는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현지인들 사이에 끼어 생활하며 가성비 뛰어난 음식을 찾아 맛보는 일에 더 큰 재미를 느끼는 저자는 방콕에 장기간 머무는 이유가 태국 음식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저자 박민우는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위해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식당을 찾아 하나하나 먹어보고, 확신이 드는 곳만을 선택했으며, 태국 요리의 역사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저자가 머무는 방콕을 찾은 수많은 지인과 현지인 친구들이 함께 방문해 검증된 곳만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그 이유는 인생에서 가장 값싸게 얻을 수 있는 황홀경이자 동시에 가장 훌륭한 위로이기도 한 ‘식도락’이라는 찰나의 환희를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에는 태국의 맛과 맛집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저자의 생활과 삶에 대한 성찰도 함께 녹아나 있다.
좀 더 맛있게, 즐겁게, 태국 요리 인문학
한국에서 태국 요리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시내에 나가면 얼마든지 태국 맛집을 찾을 수 있고, 태국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마사만커리, 팟풍파이뎅, 똠얌꿍 같은 이름은 낯설고 입에 착착 감기지 않는다. 게다가 똑같이 쌀국수, 똠얌꿍, 커리를 취급하는 태국, 베트남, 인도 요리의 차이에 대해 논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저자 박민우는 이 책을 통해 태국 음식의 역사를 간략하게 훑고 있다. 깊이 있는 학문의 영역까지는 아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맛을 즐기고 싶고, 요리에 대한 인문학적 호기심이 있는 독자라면 방콕 여행이 잡혀져 있지 않아도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로 지적 욕구에 대한 충족감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문명과 문화라는 피부를 입은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은 본능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맛있는 한 끼를 ‘기대’한다.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는 이런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책이 될 것이다.
/ 책 속으로 /
대만 내장국수가 그나마 비슷하다. 광동성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고는 하는데, 중국의 수많은 국수 중에서 못 찾아냈다. 방콕 아니, 태국에 와야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흥분되는가? 흥분하기 전에 부산 돼지국밥을 좋아하는가? 순댓국은? 선짓국, 내장탕은? 제주도 고기국수는? “예스”라고 답한 사람은 계속 흥분해도 된다. 싹싹 핥아먹고, 얼른 한 그릇 추가하라. “노”인 사람은 애써 관심 가질 필요 없다. 고기고기하고, 후추후추한 쌀국수다. 재료들은 다 까발려져 있다. 까발려진 재료들이 돼지 내장들이니, 뒷걸음이 절로 쳐진다. 차이나타운처럼 혼란스럽고, 위협적이다. _ p.38 환장하거나 혐오하거나! 내장국수, 꾸어이짭
작은 그릇에 세상의 모든 맛을 담았다. 세상의 모든 맛이 합쳐지니 짠맛과 매운맛이 된다. 내 입맛엔 영 아니라며, 숟가락을 내려놓아도 된다. 400원어치만 짜증내고 일어서면 되니까. 초보자에겐 어려운 맛이다. 어두컴컴한 색이 불길하다. 초보자에게는 어렵지만, 낯선 음식을 재밌어하는 이들에겐 큰 선물이다. 각각의 자극들이 힘을 합쳐, 레고블록 성을 만들었다. _ p.44 쌀국수 에스프레소. 선지국수, 보트누들
태국 국물엔 먹지 못하는 게 둥둥 떠다닌다. 육수로 끓인 후 걸러내는 계피나 월계수 잎이 국물에 둥
둥 떠다니는 격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갈랑갈이다. 소나무 향의 뒤를 쫓아 라임의 신맛과 코코넛 밀크의 고소함이 천천히 찾아온다. 좋아하게 되는 과정은 똠얌꿍과 판박이다.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약 올린다. 기
억 속에서 더 진해지고, 부드러워진다. 혓바닥이 삼림욕 좀 하고 싶다며 보챈다. 똠얌꿍에서 똠카까이로 넘어온 사람은 똠얌꿍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더 강렬한 음식에 눈을 뜨면 나면 대체로 그렇게 된다. 정말 이상한데, 결국 맛있다. _ p.73 소나무 향이 들끓는 닭곰탕, 똠카까이
시디신 김치찌개가 있는 나라에서 깽쏨 생각에 침이 고였다. 방콕에 돌아가자마자 콜리플라워와 배춧잎이 듬뿍 들어간 깽쏨에 밥을 말았다. 태국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국 사람들은 국에 밥을 말지 않는다. 나는 밥
을 말아서 쫓기듯 비웠다. 그제야 시선이 느껴졌다. 약간 멋쩍었지만, 갈증은 사라졌다. 꼭 해결해야 할 갈증이었다. 똠얌꿍은 특별하게 맛있고, 깽쏨은 가깝게 맛있다. 똠얌꿍은 요리로 대접받고, 깽쏨은 끼니로 사랑받는다. 똠얌꿍으로 태국 음식에 눈떴지만, 내 사랑은 깽쏨으로 기울었다. _ p.87 깔끔하게 새콤하다.
태국의 김치찌개, 깽쏨
한국은 나물의 나라다. 채소를 데치고, 참기름에 주물럭대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뭐든 나물로 만들지 못해 안달 난 한국인이다. 공심채는 한국인과 합이 잘 맞는다. 1분 요리다. 재료만 준비됐다면 1분 안에 끝이다. 굴 소스, 간장, 된장, 마늘, 고추에 공심채를 들들들 볶는다. 물 약간 끼얹고 좀 더 볶는다. 끝! 발효된 태국식 된장에선 익숙한 된장 맛이 난다. 고온에서 굴 소스는 마술이다. 커피 볶는 향과는 다르지만, 그 이상으로 감미롭다. 커피 향은 볶을 때 가장 향기롭다. 마실 땐 그만큼 안 난다. 팟풍파이뎅에선 볶을 때의 찬란한 향이, 먹는 내내 지속된다. 나물계의 라이브 콘서트. 순간을 잡은, 신비롭고, 흔한 음식이다. _ p.93 이깟 풀떼기 따위, 놀라움!
채소 볶음, 팟풍파이뎅
보랏빛 껍질, 반질거리는 표면, 물렁한 속. 눈 없고 주둥이 없는 돌고래 같은 채소. 내가 생각하는 가지다. 어머니는 손가락만하게 썬 가지를 절반만 익히셨다. 그래야 아삭아삭하다셨다. 세상에서 가지를 제일 싫어하
는 중학교 1학년 아들은 반찬통을 열고, 절반만 익은 가지를 입에 구겨 넣었다. 친구들이 손을 대기 전에, 내가 다 먹어치워야 한다. 나의 어머니는 나만 불평해야 한다. 점심시간에 숨도 안 쉬며 가지를 먹어 치웠다. 가지는 다른 비호감 음식 모두를 합친 것만큼이나 싫었다. 그런 내가 썬문식당을 찾는 이유는 가지를 먹기 위해서다. _p. 200 맥주 신들이 선택한 가지 튀김, 썬문
이 긴 의자에 앉으면, 지금을 볼 수 있다. 이파리들이 바람의 힘을 빌려 시간을 거른다. 씨리얼에서 건포도만 건져내듯, 시간만 캔다. 시간이 흔들린다. 싸구려 노트북은 난폭한 타이핑을 견디며, 한 글자 한 글자 받아 적는다. 모처럼 실시간으로 머문 곳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큰 병은 아니겠지? 인간은 멍청해서, 하찮은 몸살이 두렵다. 바짝 마른 낙엽처럼 언제든 부서질 것 같다. 아플 때만 고개를 쳐드는 나약한 감수성은, 결국 이 카페에 감탄한다. 가끔 ‘Blue’가 나를 쓰게 한다. Sometime Blue. 나무를 보러, 긴 의자에 앉으러 또 오겠다. 시간이 이파리 하나하나에 붙어서, 열심히 흐른다.
부은 편도선 사이로 쓴 커피가 흐른다. _ p.238 이토록 황홀한 블루, 썸타임 블루
오렌지색의 차가운 밀크티는 충격적으로 달다. 버터와 설탕 범벅의 식빵은 맛있다. 맛있지만, 나도 만들 수 있다. 소시지와 달걀프라이는 완벽하게 소시지와 달걀프라이다. 맛만 생각한다면 여기 올 필요가 없다. 평범한 메뉴는, 평범하게 맛있다. 이곳 돌의자에 앉아보는 건, 평범하지 않다. 꿈 많던 여고생이, 양복 입은 청년이 내 곁에서 늙은 채 있다. 그들은 기억하고, 추억한다. 내가 모르는 과거에서 논다. 그때의 젊음은, 곧 늙을 젊음들에게 작게 웃어준다. 늙음을 이해 못하는 젊음들은 마냥 해맑다. 젊음은 젊음대로, 늙음은 늙음대로 찬란하다. _ p.313 아흔 살 먹은 카페, 온록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