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의 도중
한 장의 사진, 그리고 떨림…
그것이 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도쿄의 헌책방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알래스카 사진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이 운명의 시작이었다. 시슈머레프라는 작은 마을의 항공사진에 마음을 빼앗긴 호시노 미치오는 1972년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시슈머레프 촌장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듬해 4월, 마침내 답장이 도착한 것은 마치 기적 같았다. 그리고 그해 여름, 그는 시슈머레프 마을을 찾아가 에스키모 가족과 생활하게 된다. 그것이 알래스카로 이주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빛을 찾아다니는 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이후 호시노 미치오는 단정한 문장과 경이로운 사진들로 알래스카의 숭고한 풍경을 기록하는 일에 일생을 보냈다. 불행이 찾아온 것은 1996년 8월 8일. 캄차카반도에서 TBS 텔레비전 프로그램 취재에 동행하던 중, 쿠릴 호반에서 불곰에게 습격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알래스카의 강인함과 연약함을 동시에 사랑했던 그는 툰드라의 식물에게 약간의 양분을 내어주며 흙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긴 여행의 도중』은 이른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운 그의 유고집이다.
알래스카 설원에 생을 바친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
그가 남긴, 인간과 자연을 향한 다정하고 정중한 문장들
『긴 여행의 도중』에는 호시노 미치오의 본업이 사진작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시정 가득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알래스카의 풍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그가 보고 느낀 것들을 천천히 음미하게 된다. 그가 찍은 야생사진들에서 전해지는 생명의 숨결을 느끼노라면, 이 한 권만으로도 지금껏 알지 못했던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팬이 되기에 충분하다. 작가의 이른 죽음이 그지없이 안타까워진다.
『긴 여행의 도중』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간결하고 고요한 문장에 담긴 다정하고 감동적인 시선. 현대 사회에 덧씌워진 두꺼운 필터 너머의 세계를 보고 있는 맑은 눈동자. 알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굳센 팔과 다리. 여리고 약한 것들을 향한 위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존중하는 마음.
『긴 여행의 도중』에는 알래스카의 설원에 생을 바친 사진작가가 인생의 길 위에서 만난 귀한 풍경과 깊은 사색의 문장들이 흰 눈처럼 소복소복 담겨 있다. 알래스카에 간 적이라곤 없는데 알래스카의 풍경이 우리의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가혹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동식물,
굳세게 나아가는 모든 연약한 것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
풍요로운 인생이란,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11월의 어느 날, 눈 속에서 가만히 있는 무스를 봤다. 번식기의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싸움에 몰두하는 수컷 무스는 몸무게가 약 20퍼센트나 줄어드는데 이런 혹독한 상황 속에서 극북의 겨울을 맞이한다. 생물들은 어떤 마음으로 첫눈을 맞이할까? 이제 곧 떨어질 것 같은 무스의 뿔 위로 조용히 눈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겨울을 제대로 넘기지 않고서야 봄의 실감은 아득히 멀다.”
“작은 공간에 가만히 웅크리고 누워 봄을 기다리는 곰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여름날 곰이 들판을 걸어가는 모습에서보다 훨씬 더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까지 그의 글에 끌리는 것일까? 알래스카의 압도적인 자연은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식물에게도 안락한 생활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거부하는 듯한 가혹한 자연을 말하면서도, 그는 조바심이 없다. 저마다 처한 조건을 긍정하고, 그것을 조용히 헤쳐 나가는 모든 연약한 생명들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봐줄 뿐이다. 그가 써내려가는 알래스카는 고요하고 강건한 생명이 약동하는 곳이다.
『긴 여행의 도중』은 또한, 우리에게 또 다른 시간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시계에 쫓기는 일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한다. 가만히 멈춰 서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자신의 삶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은 우리를 이상한 기분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어쩌면 인생을 풍요롭게 지나가는 한 가지 방법일지도 모른다.
제인 구달과 아프리카에서 함께 보낸 2주의 시간을 회상하면서 작가는 말한다. “사람이 여행을 떠나 새로운 땅의 풍경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는 결국, 누군가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많은 나라를 간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넓은 세계를 느낄 수 없다. 누군가와 만나고 그 사람이 좋아졌을 때에야 비로소 풍경은 넓어지며 깊이를 갖게 된다.”
이 책 『긴 여행의 도중』을 통해 많은 이들이 알래스카의 풍경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감정에 휩싸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루스 빙하의 투명한 고요에 휩싸이거나 오로라가 보고 싶어질지도. 자신의 빛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지도.
책 속으로
12쪽 :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서 있어도 각기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은 각자의 인생이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6쪽 : 지나가는 지금이 가진 영원성.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일의 심원함에 매료되었다.
24쪽 : 나는 문득 ‘추억’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사람의 일생에는 추억을 만들어야 하는 때가 있는 듯했다.
31쪽 :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해 이윽고 늙어가는 인간 각자의 시대를 향해 자연은 다양한 메시지를 보내준다.
52쪽 : “이 세상은 이미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역시 긍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만다. 체념과 희망이 공존하고, 밝음과 슬픔이 한데 섞인 채, 나는 내일을 생각한다.”
74쪽 :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려고 하는 한 시대의 역사를 어떻게든 기록에 남기고 싶었다. 그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75쪽 : 모든 것이 어지러운 속도로 사라지고 전설이 되어간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보면 수천 년 전과 변함없이 카리부 떼는 지금도 알래스카 북극권의 들판을 여행하고 있다.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91쪽 : “일이 바빴지만 알래스카에 오길 정말 잘했어. 왜냐고? 내가 도쿄에서 정신없이 흘러가는 나날을 보낼 때 알래스카의 바다에서는 고래가 솟구쳐 오를지도 모르잖아.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정말 좋았어.”
91쪽 : 내가 일상에 쫓길 때에도 다른 곳에서는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94쪽 : 몸을 바짝 굳게 하는 냉기에서 풍기는 티 없이 맑고 투명한 겨울의 냄새. 이 계절에는 마음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31쪽 : 내가 어디에 있는 모든 것에는 똑같은 시간이 평등하게 흐른다. 생각하면 한없이 심원한 기분이 드는 사실이다.
134쪽 : 알래스카 들판을 떠도는 카리부의 이동에 나는 계속 마음이 끌렸다. 그것은 넓은 공간과 자연이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숨 쉬고 있는 세계임을 언제나 실감케 했다.
139쪽 : 매일 머리 위를 날아가던 캐나다 두루미 편대도 모습을 감추고 맑게 갠 밤하늘에 오로라가 춤추기 시작하면, 가을색은 어느덧 퇴색한다. 가을은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든다. 짧은 극북의 여름이 순식간에 지나갔기 때문일까? 길고 어두운 겨울이 이제 곧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첫눈이 내리면 각오가 생겨서 마음이 안정될 텐데.
148쪽 : “동물의 뇌라는 것은 끝없는 시간을 들여서 쓴 한 편의 책이라고 생각해. 그 속에는 지금까지 그 종種이 살아온 몇만 년, 몇억 년이라는 역사가 전부 들어 있어. 물론 인간에 대해서도 한구석에 기록되어 있을 거야. 계속 관계를 맺어왔으니까. 그러니까, 자연이 계속해서 파괴되고 생물의 종이 조금씩 사라져간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씩 잃는 것과 같아.”
155쪽 : 분명히 똑같은 봄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기쁨의 크기는 각자가 넘긴 겨울의 모습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겨울을 제대로 넘기지 않고서야 봄의 실감은 아득히 멀다. 그것은 행복과 불행의 이상적인 모습과 어딘지 닮았다.
184쪽 : 작은 공간에 가만히 웅크리고 누워 봄을 기다리는 곰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여름날 곰이 들판을 걸어가는 모습에서보다 훨씬 더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193쪽 : 어린 시절에 본 풍경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 다양한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언젠가 본 풍경에게 위로를 받거나 용기를 얻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203쪽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를 희생해서 자신이 살아남는 선택의 과정이다.
208쪽 :나는 계절이 이동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단풍이 절정일 때가 고작 하루인 것처럼, 맑고 투명한 어린잎이 자라는 계절도 한순간이다. 자연의 색은 우리에게 한 번뿐인 인생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356쪽 : 인간이나 그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자연이 숨 쉬고 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아는 것이 언제나 놀라웠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항상 생각하게 만들었다. 알래스카의 자연은 그 사실을 매우 알기 쉽게, 끊임없이 알려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