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로맨스 푸어들을 위한 로맨스
‘한 발짝’의 거리감이 만들어내는 지속되는 잔열
한겨레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용익소설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두루 인정받고, 독자에게는 그다음 ‘메이드 인 윤고은’의 작품세계를 고대하게 만드는 작가 윤고은. 2008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무중력 증후군』을 시작으로, 평균 이 년에 한 번씩은 독자들에게 새 책을 선물하는 작가의 행보를 지켜보노라면 ‘간단없이’라는 부사가 떠오른다. 새로운 소설을 선보이는 데 그침 없고, 이야기의 발상은 거침없다. 한국문학의 가능성과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온 윤고은 소설가의 네번째 소설집이자 일곱번째 책을 선보인다. 신작 소설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은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이후 두 해에 걸쳐 써내려간 여섯 편의 단편소설을 묶었다.
이번 작품집을 관통하는 두 개의 단어는 ‘로맨스 푸어’ 그리고 또하나는 ‘한 발짝’이다. 윤고은 특유의 상상력을 ‘한 발짝’으로, 일상의 풍경을 꼼꼼하게 관찰한 결과물을 ‘로맨스 푸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작품집에 유독 30대 커플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20대 때처럼 불타오르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40대처럼 안정적이지도 못한, 위태롭고도 애매한 결절에 다다른 사람이 그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무지 로맨스가 빈곤한 사람들로 바꿔 말할 수 있을 이들은 완전히 몰입해버리지도 그렇다고 아예 무심해질 수도 없는 세대를 포착한 것이기도 한데, 해설을 쓴 평론가 한영인의 말처럼 그리하여 작가는 “현실에서 딱 한 발짝 비켜섬으로써 현실과의 정면충돌을 방지하는 동시에 여전히 독자의 눈이 지금 이곳을 향하게끔 시야의 좌표를 설정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메이드 인 윤고은 작품의 특유와 생기가 발생하고, 작가는 30대라는 ‘한 발짝’을 때로는 거리감으로 때로는 도약으로 풀어내 이야기를 지어 건넨다.
“제가 문자를 잘못 보냈어요. 그런데 그 메시지는 진심입니다.”
윤고은의 의아해하는 인물들을 사랑한다.
다른 작가라면 애잔하게 그릴 순간을 의아하게 그리는 윤고은을 사랑한다. _정세랑(소설가)
“제가 문자를 잘못 보냈어요. 그런데 그 메시지는 진심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의아해하며, 골똘해지지 않을까? 윤고은 소설의 또다른 인장(印章)이 있다면, 그것은 파토스가 아닌 아이러니를 건네는 데 있다. 작가는 착각 혹은 오해라고 말해질 수 있는 인생의 순간들을 그저 해프닝으로 넘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리한 핀셋으로 포착하고 집어내 골똘하고도 유심하게 바라본다. 파토스의 뜨거움 속이라면 거의 불가능할 응시를 한 발짝 벗어나 계속하다보면 ‘미스커뮤니케이션의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
“핏빛으로.”
취향은 확실히 비슷하네,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뒤에 한쪽은 스테이크에 대해, 다른 한쪽은 와인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나는 와인 리스트, 다른 하나가 스테이크 리스트였다. 우린 서로 다른 메뉴판을 보고 있었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빛깔이 닮은 스테이크와 와인을 적당히 고른 셈이었다. _「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에서
표제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은 선뜻 결혼을 결정하지 못하는 구 년 차 연인 앞에, 경기도 용인시에 세워진 개성신도시의 모델하우스가 나타나며 시작된다. 결혼이라는 냉혹한 ‘현실’과 개성과 평양의 ‘모델하우스’라는 이중의 낙차가 충돌하는 이 이야기는 결혼에서 ‘한 발짝’ 물러난 이들이 서울에서 평양으로 ‘한 발짝’ 내딛은 예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성이나 평양에 건설될 신도시의 아파트에 투자하는 것과 남한에서 젊은 청춘 남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비현실적일까? (……) 이 땅에서 남녀가 사랑으로 결합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이제 리얼리즘 서사가 아니라 SF 서사가 담당해야 하는 영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랑과 결혼과 출산은 북한에 대한 직접투자만큼이나 우리 세대에게는 비현실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_한영인(문학평론가), 해설 「잔존하는 잔열」에서
작가가 심리적-물리적 거리를 반복적으로 의식하고 또 생성해내는 이유를 우리는 ‘잔열’이라는 개념으로 조금은 추측해볼 수 있을 듯하다. 파토스의 뜨거움이 아니라 아이러니와 공백에서 생기는 ‘지속되는 잔열’ 말이다. “어떤 순간들은 잔열을 갖고 있어서 물리적 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를 움직이는 건 의외로 아주 큰 에너지가 아니라, 그런 잔열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물의 터널」)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서정을 자아내지만, 작가 윤고은의 미학이자 윤리를 발견할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절제된 감정으로 더욱 진실하게 생의 단면을 그려내 보이겠다는 뜻이기도 할 터.
때로는 상상과 착각으로 때로는 오해와 시차라고 말해지는 변주를 이번 소설집에서 우리는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양말들」에서는 ‘나’의 장례식장에서 ‘나’와 ‘나’의 죽음을 둘러싼 오해가 시차를 두고 당도한다. 「오믈렛이 달리는 밤」에서는 로맨스를 향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연경 앞에 기이한 오믈렛이 나타나고, 「우리의 공진」에서는 사랑의 공진에서 비껴나고픈 한 남자가 프리미엄 출퇴근 버스에서 한 여자와 시차를 두고 대화한다. 「평범해진 처제」에서는 오류라고도 말할 수 있을 기억과 추억을, 「물의 터널」에서는 마치 “계절이 다른 터널 안에서” 유년의 풍경과 마주한다.
‘한 발짝’은 비단 로맨스와 관계의 문제일 뿐 아니라 작가와 독자와의 거리이기도 하다. 한 발짝 떨어져 그 사이에 바람이 흐를 때, 혹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게 공간을 만들어두는 것. 윤고은의 이번 신간을 통해 소설은 거리(Distance)가 만들어내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가슴 깊이 공감하게 될 것이다. 윤고은표 ‘미스커뮤니케이션의 커뮤니케이션’ ‘잘못 보낸 진심의 메시지’는 결국 문학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는 것 역시. 삶이 언제나 무겁지도, 한없이 가볍지도 않다는 것을 꿰뚫어보는 작가의 예리한 시선으로 인해 이야기는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졌다. 윤고은의 이야기라는 근사한 티켓이 준비되었고, 이제 독자는 주사위를 굴릴 차례다. 그 어느 때보다 이채로운 여행이 되기를!
■ 작가의 말
소설을 쓴다는 것 그러니까 어떤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 때문에 외롭지 않다고 하면 엄청난 착각이거나 위대한 발명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무용하지 않은 놀라운 일이기도 하고. 물론 이로 인해 외로워지는 순간을 헤아리자면 그 또한 한가득이겠지만, 모든 산술 계산을 마치면 (하지 않아도) 소설은 확실히 매혹적인 세계라는 결론이 난다. 이거야 말로 꽤 멋진 1인용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같은 책 한 권을 나란히 읽기 시작해도 잠시 후면 각자가 도달해 있는 문장이 다르다. 저마다의 속도로 흘러가는 세계, 밤의 꿈처럼 오롯한 1인용의 세계, 이 세계에서는 작가와 독자가 1:1로 만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산책을 한다.
■ 추천사
윤고은의 의아해하는 인물들을 사랑한다. 불운과 비극, 오해와 지겨움에 그대로 젖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 의아해하는 그들 덕에 소설은 기묘한 유머, 전복적인 통찰, 확장의 감각을 얻는다. 다른 작가라면 애잔하게 그릴 순간을 의아하게 그리는 윤고은을 사랑한다. 복잡하고 명확한 선으로 나뉘지 않는 세계를 끝없이 해석해내려는 이만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멀리 다녀와 또 새로운 이야기를 내밀어주길, 언제까지고 설레하며 기다릴 것이다.
_정세랑(소설가)
■ 책 속에서
내가 김과 나눴던 게 사랑이란 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처음엔 그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엔 정반대의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물불 안 가리고 덤비다 사랑에 실패한 거였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_24쪽, 「양말들」
“와…… 신혼집이 북한이라니 말 다 했네. 이젠 분단 현실 때문에 안 된다는 거구나. 통일이 되어야 가능한 거야, 그치? 결국 우리 결혼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네. 싫으면 싫다고 하지. 됐어.” _48쪽,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그 언니가 뭐랬는데?”
“결혼도 주차도 다 똑같다고. 더 좋은 상대가 나타나겠지 싶어서 기다리다보면, 빈자리는 하나도 없고, 결국 아까 갔던 곳으로 되돌아가도 그 자리는 이미 차 있다고. 어딘가 더 좋은 놈이 있을 것 같아서 기다리면 결국 예전에 놓친 그놈이 더 좋다는 걸 알게 된단 얘기야. 잠깐 주차하는 사이에 없어진 자리처럼.” _68쪽,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연경은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기대치를 낮추거나 아예 휘말리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 연경을 지탱해온 어떤 룰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5번 드럼통에서부터 자꾸 이상한 기운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경은 자신에게 특별한 순간, 사적인 시간, 그러니까 진짜 이벤트가 뚜벅뚜벅 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 과정이 길지 않았으면 했다. 마음 졸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무언가가 누군가가 다가온다면 차라리 아주 불시에 자신의 삶을 급습하는 방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_103쪽, 「오믈렛이 달리는 밤」
‘모든 존재는 다 파동을 가지고 있는데 그 파동이 겹칠 때 뭔가가 벌어집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만날 때도 그들의 진동수가 일치하면 스파크가 튀죠. 사랑도 공진의 결과물이에요.’ _127쪽, 「우리의 공진」
그 한 줄의 문장을 읽고 또 읽을수록 포만감 비슷한 걸 느낄 수 있었다. 유년의 행복했던 몇 순간을 떠올릴 때와 같은 따뜻한 기운, 규모를 떠나 이런 기분 자체가 꽤 오랜만이어서 한동안 나른해지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진짜 여름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견과류처럼 꼭꼭 씹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방식 중 하나가 쓰기였다. _156쪽, 「평범해진 처제」
“그런데 그거 알아? 난 그거 알아, 로 시작하면 기대가 되더라. 내가 당연히 모를 얘기들인데, 그러니까 그걸 알 리가 없는 얘기인데, 뭔가 아는 얘기 같기도 하고. 잘 들으면 알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래서.” _191쪽, 「물의 터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