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군주론의 탄생
위기의 피렌체, 메디치의 몰락, 격동의 시대가 빚어낸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그의 역작을 읽다
500년의 세월을 견뎌온, 인간 본성과 권력에 대한 예리한 통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인간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의 감춰진 이야기
우리는 마키아벨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으나 제대로 읽지는 않은 〈군주론〉의 저자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고 왜 〈군주론〉을 썼는지 ? 혹은 써야 했는지 ?, 그리고 왜 그토록 비난을 받았는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이 매우 친절한 답이 될 것이다. 그의 사상과 책에 대한 오해와 비난을 거둬내고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관, 마키아벨리가 처했던 상황과 그의 사상이 무르익어가는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500년을 살아남은 진정한 정치철학의 대가를 만나게 된다. 시대를 거슬러 15세기 피렌체와 이탈리아로 독자들을 데려가는 책의 서술 방식은 마치 살아 있는 마키아벨리를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전하며, 르네상스가 꽃피웠던 메디치 치하의 피렌체와 마키아벨리와 동시대 인물(메디치와 교황, 단테,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이의 흥미로움을 더한다. 〈군주론〉의 모델로 알려진 체사레 보르자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과연 마키아벨리에 대한 비난은 정당한가?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는 왜, 누구를 위해 〈군주론〉을 썼는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하나씩 얻어가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마키아벨리를 둘러싸고 있는 짙은 안개를 걷어내고, 그의 본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내용의 이해를 돕는 그 시대 주요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도판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책, 군주론.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누구도 그 생애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물, 마키아벨리. 평전 형식을 띤 이 책에서 저자는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의 이탈리아 형세와 주요 인물들, 역사적인 사건들을 설명하고 이런 외부적 환경과 요인이 약소국인 피렌체의 한 외교관에게 어떤 사상적 영향을 끼쳤는지 집중 탐구한다.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통치 하에 번영을 누리던 피렌체는 그의 죽음과 함께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된다. 프랑스의 이탈리아 반도 침공으로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은 무려 15년을 끌면서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엄청난 피해를 안겼으며 각 공화국과 도시국가들은 이합집산을 통해서 안위를 꾀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적이 되는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이 가운데서 군사적인 약체인 피렌체는 늘 돈으로 안보를 사야만 했다.
외교와 안보에서 밀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사절로서 외국과 협상을 해야 했던 마키아벨리는 약소국의 서러움을 몸소 느꼈고 강한 군주들의 카리스마에 끌렸다. 이는 늘 애매모호하고 갈팡질팡하는 피렌체 지도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었다. 이런 오랜 관찰 속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나라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군주는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해지기 위해서” 그는 약간의 속임수와 희생은 수반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마키아벨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국가의 안위”였다. 나라가 온통 쓰러질 지경인데 어떻게 선대 철학자들의 ‘윤리’와 ‘정의’에 기대 나라를 이끌 수 있다는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훌륭한 통치의 본질’을 논하고 그들의 후예들 또한 ‘권력이 아니라 정의’를 더 내세운 반면,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힘이 없으면 정의의 구현은 물론이고 그 어떤 것도 백성에게 베풀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메디치가를 일으켜 세운 코시모 데 메디치의 말을 인용한다. “나라는 주 기도문으로 지탱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가 비난을 받는 주된 이유는 그가 인간의 이기심과 사악함, 기회주의적인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사실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동정을 표하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그가 정작 자신이 말한 “여우처럼” 처신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팽’당하고 만 것을 안타까워한다.
우리가 몰랐던 마키아벨리
▶ 그는 애국심이 남달랐다. 피렌체를 위해서 일할 수만 있다면 정부 형태를 문제 삼지 않았다. 즉, 공화정 정부이든, 메디치가의 참주제이든, 그는 오로지 피렌체를 위해서 일하고자 했다.
▶ 그는 단순히 관료와 문필가로 머물지 않고 전장에서 직접 군 지휘를 하는 등, 군사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줬다.
▶ 그는 메디치가와 악연이었다.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 시대의 막이 내리면서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가 다시 복귀해서 정권을 잡는 수순을 반복했다. 이때마다 마키아벨리는, 의도치 않게, 반대편에 줄을 섬으로써 메디치가의 미움을 샀고 자리에서 쫓겨났다.
▶ 마찬가지로 메디치가가 쫓겨나고 공화정이 들어섰을 때도 그는 메디치가와 연줄이 닿았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 〈군주론〉보다 그는 사실 〈로마사논고〉에 대한 애착이 더 컸다. 그의 사후에 얄팍한 책자인 〈군주론〉이 훨씬 더 큰 명성을 얻은 것을 알았다면 그 자신도 놀랄 것이다.
▶ 그는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가 공직에서 물러나 시골집에 머물렀을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심심풀이로 쓴 희곡, 〈만드라골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이탈리아 전역에서 공연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이탈리어로 쓴 가장 뛰어난 희곡 중의 하나로 꼽힌다. 〈군주론〉이 불후의 명작 반열에 오른 것도 그의 뛰어난 문장력에 기댄 바 크다.
▶ 마키아벨리는 평민은 아니었으나 빈한한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평생을 비주류로 자처했고 약자의 시각을 가졌다. 또한 평생 풍족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 한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힘을 합쳐 피렌체 국방력을 높이기 위한 군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했던 그는 “이탈리아를 이제까지 갈라놓았고, 지금도 갈라놓고 있는 것은 교회이다”라면서 통일의 가장 큰 장애 요소로 교황과 교황청을 꼽았다.
〈군주론〉 의 탄생과 책을 둘러싼 오해
▶ 《군주론》은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탄생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의 공직생활은 이미 끝장나버린 상태였고, 가난이 닥쳐왔다. 그는 권력과 통치에 대한 자신의 모든 지혜를 이 한 권의 책에 담아 메디치가의 영주에게 바침으로써 다시 공직에 임명되고자 했다.
▶ 그가 《군주론》에서 떠올리는 “이상적인” 통치자는 평화의 시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고난의 시기에 어울리는 섬뜩한 인물이다.
▶ 《군주론》은 1513년 완성되었으나 복사본을 읽은 사람들이 내용에 대한 우려를 표해 출간되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사후 5년 뒤인 1532년 출간되었다. 그러나 입소문을 타고 지배자들 사이에서 읽히기 시작해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559년 기록에 의하면 그 때까지 17쇄를 찍었다.
▶ 마키아벨리와 그의 저작에 대한 최초의 반격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시작되었다. 1559년, 마키아벨리는 교황청의 금서목록에 오른 최초의 저술가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높은 인지도를 나타내는 반증이기도 하다. 독자가 없었다면 교황이 굳이 그의 책을 금서목록에 올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전에 교황과 교황청에 대한 반감을 여러 차례 드러낸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 《군주론》은 카를 5세,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무솔리니 같은 폭군과 독재자들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많이 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대부분 부정하고 좁은 범위의 전술적 쟁점에만 집중한 결과다. 마키아벨리가 남긴 더 중요한 교훈은 무자비한 행위와 기만 같은 전술이 결국 공익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 마키아벨리를 전제정의 옹호자로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군주론》의 내용에 집중하는 반면 《로마사 논고》의 내용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로마사 논고》에서 그는 독재권력의 장악은 정상적인 통치수단이 위기에 대처하지 못할 때만 정당하다고 분명히 밝힌다.
▶ 마키아벨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는 원칙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인물이지만, 그의 저작 어디에서도 그런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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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마르크스주의자로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치적 견해를 규정하는 것인 반면, 누군가를 마키아벨리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의 인성에 대한 판단으로 들린다. 마키아벨리는 확실히 세계 최초의 냉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모종의 파렴치함과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었기 때문에 능숙하고 이기적인 모든 행위는 이제 마키아벨리적인 행위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 424P
피렌체에서 중세 시대를 거치며 서서히 발전한 통치형태는 공화정이었다. 잦은 선거와 서로 겹치는 여러 가지 사법권은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역동적인 정치제도를 만들어냈다. 참정권은 부유한 상인들과 보다 중도적인 장인들에게만 허락되었다. 비록 도시의 일반 대중은 정치 분야에서 일체의 역할이 배제되었지만, 당시 피렌체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였다. 마키아벨리의 청춘기 내내 피렌체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단 하나의 가문, 어마어마한 부를 자랑한 메디치 가문과 그 추종자들이었다. 따라서 본인들에게도 통치의 자격이 있다고 여긴 다른 집안사람들은 불만을 나타냈고, 이따금 폭력사태를 연출하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이 실질적인 정치적 발언권을 상실한 시민들을 달래는 한 가지 방법은 도시의 번영과 화려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 35P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진정한 아들이었다. 그는 창의성이 꽃피고 이리저리 요동치는 시대의 가치 기준과 병리현상의 산물이었다. 그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윤리적인 시각과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혼란 상태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초반의 이탈리아에서는 숱한 권력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졌다. 승리를 거둔 군대는 금세 패배를 맛봤고, 외부 세력의 공격과 내부적 반목에 시달리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그런 가장 극명한 현장이 바로 피렌체였다. 피렌체의 역사는 파벌 간 분쟁과 정치적 동요로 점철된 유혈의 역사였다. 정부가 무너지고, 적군이 마을을 불태우고, 농토를 황무지로 만들어버리고, 강간과 살인을 자행하는 상황에서 이상적 국가에 대해 차분하게 숙고한다는 것은 사치로 보였다. - 287P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문의 궁정에 자리를 잡지 못한 데는 그의 예민한 성격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친구가 부족하지 않았지만, 가까운 친구들은 마키아벨리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몇 년 뒤, 마키아벨리가 공직 생활을 시작했을 때 친구인 비아조 부오나코르시는 그가 동료들을 멀리하지 않도록 나서야 했다. 평생 동안 그는 윗사람들에게 아부를 떨 줄 몰랐는데, 그의 그런 결점은 뛰어난 재주보다 비굴한 아첨을 더 좋아하는 군주들이 《군주론》의 헌정을 거절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 44P
역사적으로 최고의 격동기에 피렌체 정부에서 일했던 경험은 마키아벨리에게 이상적인 교육의 기회가 되었다. 그 경험은 그의 눈이 트이고 정신이 단단해지도록 이끈 역경의 학교였다. 거기서 그는 현실 정치에 관한 수많은 실용적 교훈을 배웠고, 가끔 거둔 승리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자주 겪은 패배를 통해서도 교훈을 얻었다. 《군주론》과 《전술론》에 이르는 마키아벨리의 여러 저작은 군사적 사안을 다루고 있다. 실제로 그는 국가가 스스로를 확실히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적절한 통치 형태를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 100P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gia, 즉 스페인 태생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7대 죄악 가운데 대부분을 저지르고 살았다. 탐욕, 분노, 정욕, 대식, 오만 등은 그가 최대한도 이상으로 지닌 악덕이었다. 마치 그는 붉은 황소의 모습이 돋보이는 보르자 가문의 문장을 본보기로 삼은 사람 같았다. 타락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면서도 더 어리석었던 전임 교황들과 달리 로드리고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 대신 마음껏 탐닉하면서 성적 능력과 엄청난 식욕을 뽐냈다. 1501년 7월, 마키아벨리의 친구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로마에서 보내온 보고서에는 교황의 비행이 열거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성직록聖職祿이 멜론처럼 팔리고 있어. 매일 저녁, 기도 시간부터 일몰 후 1시간까지, 스물다섯 명이 넘는 여자들이 궁전으로 들어간다네. …… (바티칸) 궁전 전체가 온갖 음탕한 것으로 가득한 매음굴로 바뀔 때까지.” - 117P
프랑스에 사절로 파견된 것은 유럽의 권력 중심지 내부를 현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였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국왕과 그의 측근들에게 애원하는 동안 여생 내내 간직하게 될, 그리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형성하게 될 교훈을 얻었다. 아마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거창한 웅변에도 불구하고 한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그런 장소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는 ‘힘’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가진 자는 세상을 호령했지만, 가지지 못한 자는 동정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동정은 뛰어난 자가 불운한 자에 주는, 쓸모없다는 표현도 아까울 정도인 선물이었다.
프랑스에 체류하는 동안 마키아벨리는 흥정에서 강자의 위치에 서지 못할 바에는 아예 흥정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점을 배웠다. 사자와 양의 거래에 비유되는 그런 모든 거래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군주론》에서 그는 “무기를 든 자와 무기를 들지 않은 자 사이에는 합당한 관계가 있을 수 없다. 무기를 든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스스로 복종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했다. 한쪽이 다른 쪽의 목을 조르는 상태에서 양심이나 공정한 태도에 호소한들 소용없었다. - 130P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에게 품은 존경심은 이성의 산물인 동시에 감정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아찔하고 경솔한 사춘기 여학생의 짝사랑과 비슷한 면이 있다. 문약한 사람들이 종종 정력적인 활동가들에게 품는 흠모의 감정과도 비슷했다.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거의 취하지 않았으며 이 태도는 그로부터 불과 몇 년 후, 발렌티노의 급작스런 추락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 사내에게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마키아벨리의 마음은 아마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 진짜 사나이가 있다!” 그의 단점이 무엇이었든 간에 보르자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고, 대범함과 교활함을 바탕으로 자신보다 더 많은 수단과 자원을 보유한 여러 국가에게 치욕을 안겼다. - 142P
혁명적 파장을 일으킨 모든 작품과 마찬가지로 《군주론》도 이 책이 거둔 성공의 제물이 되었다. 이 책에 담긴 여러 가지 독창적인 통찰은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 마키아벨리가 당대의 정설에 맞서 벌인 여러 번의 전투는 이제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그가 적들을 확실하게 무찔렀기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탐험가처럼 마키아벨리도 실수를 저질렀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의 실수를 포착해 교정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를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가 간략하게 그린 미완성 지도의 덕을 봤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혼란스러운 지정학적 배경에서 탄생한 작품을 오늘날의 독자들도 즐겁게 읽고 훌륭한 참고자료로 삼는다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저술가적 재능과 인간적 동기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 279P
플라톤에 의하면 정치학은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런 식의 설명을 거부한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따르면 정치학의 유일한 역할은 현실 속의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후학들 또한 큰 뜻을 품은 군주에게 통치 요령을 가르쳐주는 것을 책무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하찮거나 비도덕적인 일로 여겼다. 그들의 저작은 추상적인 훌륭한 통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숙고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후학들이 파고든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정의였는데 마키아벨리가 볼 때 그것은 무의미한 지적 활동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힘이 없으면 정의의 구현은 물론이고 그 어떤 것도 백성에게 베풀어줄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 281P
마키아벨리는 특정 이념을 선전하지 않았기에 서로 다투는 두진영 모두 부담 없이 그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17세기에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프랑스혁명이 “민주적 폭정”이라는 이유로 “마키아벨리식 정책의 혐오스러운 원리”라고 비난했는가 하면, 그로부터 100여 년 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마키아벨리식 정책”이 반혁명적 반동이라고 주장했다. - 43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