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철학이 이토록 도움이 될 줄이야

철학이 이토록 도움이 될 줄이야

저자
나오에 기요타카
출판사
블랙피쉬
출판일
2019-07-12
등록일
2019-08-08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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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도, 힐링도, 처세술도 아닌

‘철학’이 필요한 시대!

지금보다 더 나은 당신의 내일을 위한 철학 입문서



‘어떻게 살 것인지’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순간만을 모면하는 처세술이 아닌, 내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가게 할 철학과 사색의 힘이다!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어렵고 막막한 인생에서, 오늘도 고민만 하다 끝난 사람들을 위한 쓸모 있는 인문서 《철학이 이토록 도움이 될 줄이야》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소설책처럼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철학을 만나볼 수 있는 철학 입문서로, 철학과 사상학 분야의 전문가 35인이 공동으로 참여해 완성한 ‘집단지성의 결정판’이다.



일상 속 현실 고민에서 출발해 동서고금의 다양한 철학을 맛볼 수 있는 이 책에는, 성경에서부터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비트겐슈타인, 포퍼, 존 롤스 등 철학의 대표주자들은 물론,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현대 철학자인 아마르티아 센에 이르기까지, 들어는 봤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대표 고전이 알차게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어려운 철학 이론을 달달 외우기보다는, 그저 현실 속 내 고민의 실타래가 풀리는 과정을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연습’을 하면 된다.



가혹한 수용소 생활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빅터 프랭클, ‘나는 무엇을 아는가’ 어느 것도 섣불리 단정하지 않았던 몽테뉴,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존재를 확인했던 데카르트까지. 하루하루를 단단하게 성찰과 사색으로 다져갔던 철학자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함께 일상의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어가는 지적 쾌감을 만끽해보자.



* 본문 중에서



〈다양한 의견 속에서 ‘정답’을 찾는 게 가능할까?〉

_ 포퍼 《추측과 논박》



포퍼는 독단과 편견으로 뭔가를 단정 짓지 않고 말을 사용해 하나하나 확인하며 이치에 맞는 방식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태도와 방법을 ‘합리주의’라고 부른다. 단, 효율을 중시하는 방식이나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강요와는 전혀 다르다. 대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는, 제법 어려운 방법을 제시한다.

분명 타인이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하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친구 사이라도 뜻밖의 의견 충돌로 사이가 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감정적이 될까 두려운 나머지 표면적인 논의로 그치게 되면 이야기는 전혀 진전되지 않고 내 생각이 넓어지지도 않는다. 포퍼는 독단을 그만두고 다른 생각에 마음을 열라고 권한다. 저마다 가치관이 다르다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견을 나누며 생각을 거듭해 상대주의를 넘어서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상대주의를 넘어설 것인가. 이때 중요한 것이 ‘비판’이라는 방법이다.

포퍼에 따르면 비판이란 경험에 비추어 주장과 이론의 정당성을 음미하고 검토하는 일이다. 비판이란 한쪽이 상대에게 감정을 부딪치지 않고 함께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삶, 가치 없는 삶일까?〉

_ 《노자》, 《장자》



생명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 있을 때 그냥 살아가기보다는 풍요롭게 살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풍요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이든 쉽게 얻을 수 있는, 빠르고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그 때문에 눈앞에 닥친 일만 신경 쓰며 불편하거나 효율이 낮은 일, 실용적이지 않은 것이나 당장 쓸모가 없는 일은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편리하고 빠른 현대사회는 결과가 바로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그에 부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애쓰는 만큼 다른 사람도 노력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 인간에게는 노력해야 할 도리가 있으며,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약하거나 게으르다는 생각에 약자를 비난하고 공격하기도 한다. 강한 사람은 가치가 크고 약한 사람은 가치가 작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정반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는 약자는 물론, 노력하고 싶어도 못 하는 처지에 있는 약자도 쓸모없다고 생각해 무의식적으로 못 본 체하기 쉽다. 심지어 쓸모없는 사람은 방해되는 존재, 약자는 사회의 해악이라고 여기고 의식적으로 배제하려고 하기도 한다.



노자는 눈에 보이는 ‘유(有)’에만 눈을 빼앗기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무(無)’의 진정한 의미를 놓친다고 했다. 장자 또한 ‘무용’하다고 여기던 것이 정말 유용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노자와 장자 모두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상식과 믿음을 뒤집고 딱딱하게 굳은 발상을 전환해 다양한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상대적 가치관을 버리면 이 세상에서 언뜻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무용’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노자와 장자의 글은 진정 풍요로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할 실마리를 준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며, 주어진 수명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이라는 진실에 눈을 돌리라고 장자는 말한다. 잠재능력을 살리려고 할수록 우리의 수명은 줄어든다. 유용한 능력이 얼마만큼 있건 정신과 육체를 해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애써 노력한다. 하지만 부드럽고 약한 물이 굳세고 단단한 바위를 깬다는 노자의 말을 생각해보면, 견고하다고 반드시 가치가 높다거나 승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고사성어가 말하듯 물처럼 부드럽고 강하게 사는 것이 진정 단단한 삶이 아닐까.





〈난임, 불임이 늘어나는데, 대리모 출산은 안 될까?〉

_ 칸트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현대자유주의 사회에서 공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시민이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에 한한다. 달리 말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우리의 의사 결정은 존중된다는 뜻이다(이를 타인 위해의 원칙이라 한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자기 몸은 자기 것이니 어떻게 다루든 자유라는 뜻일까? 자기 몸에는 스스로 해를 가해도 된다는 말일까?

이를 생각하는 데 기본이 되는 것은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의 사상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간은 물건이 아니다. 따라서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다루어져서는 안 되며 그의 온갖 행위는 늘 목적 자체로 봐야 한다. 따라서 나는 내 인격 가운데 있는 인간을 멋대로 처리하여 그것을 해하거나 무너뜨리거나 죽일 수 없다.”

칸트,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칸트는 인간처럼 이성을 갖춘 존재에 대해서는 설령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해를 가하거나 죽이면 안 된다고 여겼다.

칸트에 따르면 물건이란 이성이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그것을 수단(도구)으로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 물건은 등가물로 바꿀 수도 있다. 이에 비해 이성을 갖춘 인간은 존엄을 지닌 인격이며 소중한 존재다. 존엄은 비길 데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런 인간에게 해를 가한다는 것은 신성한 존엄에 대한 모독이다.

타인에게는 해를 끼치면 안 되지만 자신에게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타인과 자신은 동등하므로, 인간이 존엄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존엄에 대한 침해이고 따라서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다시 대리 출산으로 돌아가보자. 대리 출산에 대리모의 몸을 임신, 출산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만약 수정란을 투입할 경우 아기로 자라는 기계가 있다면 굳이 대리모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엄의 관점에서 대리 출산을 위해 대리모의 몸을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에 노출하는 것은 설사 대리모 본인이 동의했다고 해도 용인될 수 없다. 더군다나 미국과 인도, 태국에서 금전적 보상을 받고 대리모가 되는 대리 출산 사업쯤 되면 몸이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의미가 한층 강해진다.





〈칼럼_ 적당히 살아도 괜찮을까?〉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다고들 하지요.”

“일선에서 활약하거나 돈을 벌어서 풍족하게 생활하는 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그렇고말고요! 그런데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도 나름대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삶의 괴로움 아니겠습니까.”

“맛있는 것을 먹으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그걸 위해 열심히 일해야 삶의 기쁨도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애써 맛있는 음식을 손에 넣어도 과로로 건강을 해치면 먹을 수조차 없지요.”

“노자나 장자라면 뭐라고 했을까요?”

“‘그와 정반대의 삶이야말로 행복이다’라고 하겠지요. 맛있는 것을 애써 찾으려 하지 말고 지금 얻은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느끼라는 거죠.”

“하지만 일단 맛있는 것을 경험하면 다음엔 더 맛있는 걸 찾게 될 텐데요.”

“맞습니다. 그러다 결국 메뉴에 없는 요리를 원하게 되는 거지요.”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이건가요? ‘어느 시점에 만족할 것인가’, 어렵지만 알아야 될 일이에요.”

“이것도 저것도 다 갖고 싶다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받아들여야 해요.”

“‘자족’을 중시하는 에피쿠로스처럼요. 에피쿠로스는 어떤 음식도 치즈만 있으면 충분히 맛있는 요리를 즐길 수 있다, 그러니 풍요로운 삶을 원하면 재산을 불리지 말고 욕망을 줄이라고 합니다. 본래 욕망이란 부족감에서 출발한다고 해요. 욕망을 줄이면 이미 내가 가진 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야말로 노자가 말한 ‘만족을 아는’ 정신이군요.”





〈칼럼_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모두가 생각하지 않고 뭔가에 휩쓸린다면 우리 앞에는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프랑크 파블로프의 《갈색아침》은 그런 생각을 풀어가는 실마리를 준다.

줄거리는 이렇다. 한 나라에서 갈색 이외의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자 주인공도 자신의 애완동물을 죽이고 만다. 반정부 신문은 폐간되고 언론은 통제된다. 처음에는 반감을 가지던 주인공도 ‘세상의 흐름에 거스르지만 않으면 편하게 살 수 있다’며 주위에 휩쓸리게 된다.

어느 날 아침, 법률이 개정되어 갈색 이외의 동물을 예전에 길렀던 사람도 국가 반역죄로 체포된다는 뉴스가 흐르고 주인공은 자경단에 연행된다. 아니, 정확히는 자기 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자경단에게 “그렇게 세게 두드리지 말아주세요. 지금 나가요” 하고 대답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아베 고보의 〈양식파〉라는 단편 소설도 있다. 주인공은 닭이다. 외적이 많아 먹이를 손에 넣으려면 멀리 나가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이 나타나 철망으로 튼튼한 닭장을 만들어주고 먹이도 주겠다고 한다. 단, 그 닭장은 열쇠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다. 불안해하는 닭에게 인간은 말한다.

“닭이 열 수 있으면 고양이도 열 수 있어.”

이말에 의문을 품은 닭도 있었지만 결국 스파이로 몰려 쫓겨난다. 마지막에 ‘양식(良識, 사물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능력)파’라 불리는 닭들이 결론을 내린다.

“인간이 저만큼 해주겠다고 하니 그 말대로 하자. 잘못되면 다 같이 상의해서 결정하면 돼.”

결국 그들은 스스로 닭장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두 우화의 공통점은 반감과 의문을 품었으면서도 주인공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상황에 휩쓸린 결과 스스로 ‘자유’를 잃었다는 데 있다. 생각하지 않으면 자유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 본문 중에서



〈다양한 의견 속에서 ‘정답’을 찾는 게 가능할까?〉

_ 포퍼 《추측과 논박》



포퍼는 독단과 편견으로 뭔가를 단정 짓지 않고 말을 사용해 하나하나 확인하며 이치에 맞는 방식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태도와 방법을 ‘합리주의’라고 부른다. 단, 효율을 중시하는 방식이나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강요와는 전혀 다르다. 대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는, 제법 어려운 방법을 제시한다.

분명 타인이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하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친구 사이라도 뜻밖의 의견 충돌로 사이가 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감정적이 될까 두려운 나머지 표면적인 논의로 그치게 되면 이야기는 전혀 진전되지 않고 내 생각이 넓어지지도 않는다. 포퍼는 독단을 그만두고 다른 생각에 마음을 열라고 권한다. 저마다 가치관이 다르다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견을 나누며 생각을 거듭해 상대주의를 넘어서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상대주의를 넘어설 것인가. 이때 중요한 것이 ‘비판’이라는 방법이다.

포퍼에 따르면 비판이란 경험에 비추어 주장과 이론의 정당성을 음미하고 검토하는 일이다. 비판이란 한쪽이 상대에게 감정을 부딪치지 않고 함께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삶, 가치 없는 삶일까?〉

_ 《노자》, 《장자》



생명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 있을 때 그냥 살아가기보다는 풍요롭게 살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풍요로운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이든 쉽게 얻을 수 있는, 빠르고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그 때문에 눈앞에 닥친 일만 신경 쓰며 불편하거나 효율이 낮은 일, 실용적이지 않은 것이나 당장 쓸모가 없는 일은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편리하고 빠른 현대사회는 결과가 바로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그에 부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애쓰는 만큼 다른 사람도 노력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 인간에게는 노력해야 할 도리가 있으며,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약하거나 게으르다는 생각에 약자를 비난하고 공격하기도 한다. 강한 사람은 가치가 크고 약한 사람은 가치가 작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정반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는 약자는 물론, 노력하고 싶어도 못 하는 처지에 있는 약자도 쓸모없다고 생각해 무의식적으로 못 본 체하기 쉽다. 심지어 쓸모없는 사람은 방해되는 존재, 약자는 사회의 해악이라고 여기고 의식적으로 배제하려고 하기도 한다.



노자는 눈에 보이는 ‘유(有)’에만 눈을 빼앗기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무(無)’의 진정한 의미를 놓친다고 했다. 장자 또한 ‘무용’하다고 여기던 것이 정말 유용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노자와 장자 모두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상식과 믿음을 뒤집고 딱딱하게 굳은 발상을 전환해 다양한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상대적 가치관을 버리면 이 세상에서 언뜻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무용’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노자와 장자의 글은 진정 풍요로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할 실마리를 준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며, 주어진 수명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이라는 진실에 눈을 돌리라고 장자는 말한다. 잠재능력을 살리려고 할수록 우리의 수명은 줄어든다. 유용한 능력이 얼마만큼 있건 정신과 육체를 해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애써 노력한다. 하지만 부드럽고 약한 물이 굳세고 단단한 바위를 깬다는 노자의 말을 생각해보면, 견고하다고 반드시 가치가 높다거나 승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고사성어가 말하듯 물처럼 부드럽고 강하게 사는 것이 진정 단단한 삶이 아닐까.





〈난임, 불임이 늘어나는데, 대리모 출산은 안 될까?〉

_ 칸트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현대자유주의 사회에서 공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시민이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에 한한다. 달리 말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우리의 의사 결정은 존중된다는 뜻이다(이를 타인 위해의 원칙이라 한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자기 몸은 자기 것이니 어떻게 다루든 자유라는 뜻일까? 자기 몸에는 스스로 해를 가해도 된다는 말일까?

이를 생각하는 데 기본이 되는 것은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의 사상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간은 물건이 아니다. 따라서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다루어져서는 안 되며 그의 온갖 행위는 늘 목적 자체로 봐야 한다. 따라서 나는 내 인격 가운데 있는 인간을 멋대로 처리하여 그것을 해하거나 무너뜨리거나 죽일 수 없다.”

칸트,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칸트는 인간처럼 이성을 갖춘 존재에 대해서는 설령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해를 가하거나 죽이면 안 된다고 여겼다.

칸트에 따르면 물건이란 이성이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그것을 수단(도구)으로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 물건은 등가물로 바꿀 수도 있다. 이에 비해 이성을 갖춘 인간은 존엄을 지닌 인격이며 소중한 존재다. 존엄은 비길 데 없는 절대인 가치를 지닌다. 그런 인간에게 해를 가한다는 것은 신성한 존엄에 대한 모독이다.

타인에게는 해를 끼치면 안 되지만 자신에게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타인과 자신은 동등하므로, 인간이 존엄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존엄에 대한 침해이고 따라서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다시 대리 출산으로 돌아가보자. 대리 출산에 대리모의 몸을 임신, 출산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만약 수정란을 투입할 경우 아기로 자라는 기계가 있다면 굳이 대리모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엄의 관점에서 대리 출산을 위해 대리모의 몸을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에 노출하는 것은 설사 대리모 본인이 동의했다고 해도 용인될 수 없다. 더군다나 미국과 인도, 태국에서 금전적 보상을 받고 대리모가 되는 대리 출산 사업쯤 되면 몸이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의미가 한층 강해진다.





〈칼럼_ 적당히 살아도 괜찮을까?〉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다고들 하지요.”

“일선에서 활약하거나 돈을 벌어서 풍족하게 생활하는 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그렇고말고요! 그런데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도 나름대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삶의 괴로움 아니겠습니까.”

“맛있는 것을 먹으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그걸 위해 열심히 일해야 삶의 기쁨도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애써 맛있는 음식을 손에 넣어도 과로로 건강을 해치면 먹을 수조차 없지요.”

“노자나 장자라면 뭐라고 했을까요?”

“‘그와 정반대의 삶이야말로 행복이다’라고 하겠지요. 맛있는 것을 애써 찾으려 하지 말고 지금 얻은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느끼라는 거죠.”

“하지만 일단 맛있는 것을 경험하면 다음엔 더 맛있는 걸 찾게 될 텐데요.”

“맞습니다. 그러다 결국 메뉴에 없는 요리를 원하게 되는 거지요.”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이건가요? ‘어느 시점에 만족할 것인가’, 어렵지만 알아야 될 일이에요.”

“이것도 저것도 다 갖고 싶다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받아들여야 해요.”

“‘자족’을 중시하는 에피쿠로스처럼요. 에피쿠로스는 어떤 음식도 치즈만 있으면 충분히 맛있는 요리를 즐길 수 있다, 그러니 풍요로운 삶을 원하면 재산을 불리지 말고 욕망을 줄이라고 합니다. 본래 욕망이란 부족감에서 출발한다고 해요. 욕망을 줄이면 이미 내가 가진 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야말로 노자가 말한 ‘만족을 아는’ 정신이군요.”





〈칼럼_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모두가 생각하지 않고 뭔가에 휩쓸린다면 우리 앞에는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프랑크 파블로프의 《갈색아침》은 그런 생각을 풀어가는 실마리를 준다.

줄거리는 이렇다. 한 나라에서 갈색 이외의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자 주인공도 자신의 애완동물을 죽이고 만다. 반정부 신문은 폐간되고 언론은 통제된다. 처음에는 반감을 가지던 주인공도 ‘세상의 흐름에 거스르지만 않으면 편하게 살 수 있다’며 주위에 휩쓸리게 된다.

어느 날 아침, 법률이 개정되어 갈색 이외의 동물을 예전에 길렀던 사람도 국가 반역죄로 체포된다는 뉴스가 흐르고 주인공은 자경단에 연행된다. 아니, 정확히는 자기 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자경단에게 “그렇게 세게 두드리지 말아주세요. 지금 나가요” 하고 대답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아베 고보의 〈양식파〉라는 단편 소설도 있다. 주인공은 닭이다. 외적이 많아 먹이를 손에 넣으려면 멀리 나가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이 나타나 철망으로 튼튼한 닭장을 만들어주고 먹이도 주겠다고 한다. 단, 그 닭장은 열쇠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다. 불안해하는 닭에게 인간은 말한다.

“닭이 열 수 있으면 고양이도 열 수 있어.”

이말에 의문을 품은 닭도 있었지만 결국 스파이로 몰려 쫓겨난다. 마지막에 ‘양식(良識, 사물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능력)파’라 불리는 닭들이 결론을 내린다.

“인간이 저만큼 해주겠다고 하니 그 말대로 하자. 잘못되면 다 같이 상의해서 결정하면 돼.”

결국 그들은 스스로 닭장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두 우화의 공통점은 반감과 의문을 품었으면서도 주인공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상황에 휩쓸린 결과 스스로 ‘자유’를 잃었다는 데 있다. 생각하지 않으면 자유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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