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를 캐는 사람들
현장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개흙을 파내며
밧줄을 맨 채 땅과 우물 속으로 들어간 고고학자들
흙 속에서 건져올린 수만 년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진다
2015년 경주 월지 동편지구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우물이 발견됐다. 7미터의 깊은 우물은 1.2~1.4미터로 폭이 좁았다. 체구가 작은 여성 조사원 한 명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밧줄에 의지한 채 우물 속으로 내려가 조사하는 위험을 감수했다. 그 당사자인 장은혜 학예연구사는 "캄캄한 우물 안에서 혼자 작업하는 일은 고되었다"고 회상했다. 1970년대에 첫 삽을 뜨고 현재까지 진행 중인 월지 발굴 현장의 일이다. 그 후 우물이 연이어 발견됐는데, 이 중 2015년에 발굴 조사한 3호 우물에서는 토기, 기와와 더불어 노루, 쥐, 어류 등 다양한 동물들의 뼈가 나와 동·식물 고고학자들이 현장 조사에 투입되기도 했다.
21세기의 상황과 달리 발굴에 박차를 가했던 박정희 시대의 1970년대는 상황이 훨씬 더 열악했다. 그 시대 고고학자들은 과학적 협업은 꿈도 못 꾼 채 발굴 성과를 재촉하는 국가와 기관들의 압박으로 고된 작업을 해나갔다. 특히 해방 이후의 발굴은 일제의 발굴과 왜곡을 수정, 극복하는 차원에서 이뤄지기도 했다. 고고 발굴에는 영광과 상처가 함께했다. 유물은 빛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역사 해석의 준거가 돼준다. 하지만 한번 발굴이 이뤄지면 현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즉 서둘러 파내고 빼내고 정리하다보면 무언가를 놓치고 부수며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국내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담당했던 고고학자들을 기록한다. 박물관 속 유물은 원래 흙 속의 진주처럼 캐내기 전에는 아무도 그 존재 가치를 몰랐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이 꽁꽁 언 손으로 흙을 파내고 바가지로 물을 퍼내며 현장에서 먹고 잔 덕분에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이 책 속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황금빛 불상이나 화려한 도자기만 아름다워 보이는 게 아니라 똥화석, 돌멩이 한 조각, 깨진 도자기 파편만 봐도 무한한 텍스트처럼 여겨질 것이다. 유물은 생명도 없고 어쩌면 역사의 작은 파편에 불과하지만, 인간이 죽어 썩는 사이 역사의 증언자로서 자기 역할을 묵묵히 해오고 있는 것이다.
살벌하고 집요한 발굴 현장
지하수에 침수된 목관을 건지기 위해 맹추위에 언 손으로 물을 퍼내고, 로프에 의지해 깜깜한 우물로 들어가고, 목선의 나무 판이 상할까봐 한 시간에 걸쳐 맨손으로 개흙을 파내고, 포항제철을 찾아가 100톤짜리 크레인을 빌려달라 요청하고……. 『국보를 캐는 사람들』 속 고고 발굴자들은 유물을 온전히 건질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오랫동안 땅속에 있던 유물은 갑작스럽게 외부 공기에 노출되면 훼손될 가능성이 크고, 작은 자극에도 부서질 우려가 있기에 발굴 현장에는 늘 긴장감이 맴돌 수밖에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이러한 긴박하고 역동적인 발굴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것. “두 번째 심주석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린 순간 배병선과 연구원들은 저절로 ‘동작 그만’이 되었다. 살짝 벌어진 심주석 틈 사이로 1370년 동안 갇혀 있던 사리장엄구가 은은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구절에서는 읽는 이도 잠시 숨을 멎게 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유물들도 수차례의 외침 속에서 적잖이 분실되거나 소실되었지만, 고대 문화의 경우 터만 남아 있거나 혹은 터가 어디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숱하다. 고고학자의 역할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발굴 운運’이라는 말이 고고학계에 있는 것도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그 ‘운’은 운명처럼 주어지기도 하고, 몇십 년에 걸친 끈질긴 조사와 답사를 통해 얻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신비롭고 아찔하며 때로는 안타까운 유물과의 인연은 복합적인 감정을 더한다.
유물이 있을 법한 장소를 유추하는 일, 유물의 학술적 의미를 분석하는 일은 역사적 지식을 지닌 고고학자들의 몫이지만, 유물 훼손을 최소화하는 발굴 방법과 보존 방법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누구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발굴 현장은 역사학자뿐 아니라 건축공학자, 금속공학자, 화학자, 동·식물 고고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아우른다. 그 엄청난 협업 아래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저 나무막대기이거나 돌멩이일 뿐인 유물들이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보고, 과거를 되살리는 중요한 단서로 거듭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왜 굴뚝 근처에서 발견됐을까
공주 성안마을 내 백제시대 저수지 터 발굴 현장에서 당나라 연호가 새겨진 옻칠 갑옷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갑옷이 발견된 정황을 분석해보니 누군가 일부러 이 갑옷을 물에 가라앉힌 것으로 나온다. 왜 그랬을까? 더군다나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긴급한 상황에서 이 갑옷을 저수지에 묻은 이유가 무엇일까?
또 하나. 국외 반출이 금지된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귀한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가 처음 발견된 곳은 공방 건물 안 굴뚝 근처의 나무 수조였다. 이처럼 화려하고 진귀한 유물은 사찰의 핵심 건물에 있기 마련인데, 기와, 토기 조각 등과 더불어 수조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에 고고학자들은 건물이 갑자기 붕괴되거나 화재가 일어나는 등의 비상 상황, 즉 전쟁 시에 누군가 이 향로를 지키기 위해 공방 수조에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외관을 통해 읽을 수 있는 백제의 세계관, 공예 기법도 흥미롭지만, 전쟁으로 급히 몸을 피신하는 와중에도 이 향로를 지키기 위해 공방에 향로를 숨긴 1500년 전의 인물을 상상하는 일은 긴장감을 더한다. 이것이야말로 발굴 현장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겹의 이야기이다.
“고고 유물은 발굴 못지않게 해석이 중요하다. 역사 기록과의 연관성은 물론이고 때로는 문헌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진 않는다. 아주 적은 단서를 갖고도 전체적인 맥락을 그려낼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이 그 바탕에 있다. 이들에게는 길고 큰 나무 판자, 몇 가닥 남지 않은 수레 바큇살 등 일부분만 남은 유물도, 곡식 껍질, 똥, 탄화미와 같은 자연 유물도 귀한 자료가 된다. 이를 통해 고대인들이 배를 타거나, 소나 말이 모는 수레를 타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지를 추론해내고, 고대인들이 어떤 식생활을 영위했는지 유추해낸다. 이처럼 고고학자들이 유물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작업들을 가까이서 보노라면, 유물들은 박제된 물건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체로 새롭게 다가온다.
기존의 역사 해석을 바꾸어놓은 발견들
박물관의 선사시대관은 다른 역사관보다 관람객의 발길이 뜸하다. 수려한 유물도 없거니와 주로 석기나 토기 등 예상 가능한 것들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뜻 보잘것없이 여겨지는 선사시대의 유물들은 의외로 엄청난 ‘스펙터클’을 품고 있다. 일례로 연천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세계 선사시대 교과서를 바꿔놓았다. 이전까지는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아프리카와 유럽에만 존재한다는 ‘모비우스의 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져왔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이 학설이 무너졌다. 이에 세계 고고학계의 관심이 경기도 연천의 작은 마을에 집중되기도 했다.
1976년 여주시 흔암리 발굴지에서 발견된 탄화미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0세기의 것으로 판정되면서, 일본 학자들의 벼농사 한반도 전파설을 반증하게 되었다. 이로써 1970년대까지 벼농사가 중국 남부에서 일본 열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일본 학계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이 결정적인 발견을 이루어낸 이효재 교수와 그 단원들은 화덕에서 퍼낸 흙의 부유물들을 핀셋으로 하나씩 집어가며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꼬박 6개월 동안 계속된 이 작업은 눈이 충혈될 정도로 고됐다. 게다가 이런 접근법은 당시 국내에서는 낯선 것이었기에 다른 학자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발견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인공 유물에만 치우쳐 있던 국내 고고학 연구의 흐름을 바꾸어 자연 유물에 대한 연구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유물 뒤의 인물, 고고 발굴의 주역들을 조명하다
박물관의 핀 조명 아래 고고하게 서 있는 유물이 그 자리에 가기까지 수많은 이의 분투가 자리한다. 여기에는 진흙 더미로부터 유물을 건져내는 발굴 작업뿐 아니라 외부 압력과의 싸움도 포함된다. 특히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황남대총 발굴에는 정치적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경주 발전에 열을 올렸던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발굴지에 방문까지 하며 발굴을 독려했는데, 그 독려가 한편으로는 크고 빠른 성과에 대한 요구였기에 담당자들은 그에 맞서면서 전략을 세워야 했다.
황남대총 발굴에 사학과 학부 졸업생의 신분으로 참여했었던 최병현 교수는 “지금이라면 발굴에 최고 10~15년은 걸릴 현장이었다”며 발굴이 너무 섣불리 이루어졌다고 회상한다. 담당자들은 황남대총 발굴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황남대총 외에도 다른 많은 유적지가 속도와 성과를 강조하는 시대적 목소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터는 조금만 늦었더라면 군청의 독촉에 의해 주차장으로 덮일 뻔했다.
자원 배정 문제도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사안이다. ‘볼거리가 될 만한’ 유물이 보장되지 않으면 예산도 기간도 각박하게 주어진다. 허가된 범위나 시간에 쫓겨 끝까지 발굴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도 많았다. 이런 상황적 조건 때문에 최초로 금관가야 왕릉을 발견한 신경철 교수는 “실패하면 전세 문서라도 내놓겠다”며 당시 재직 중이던 경성대 당국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늘 호의적이진 않았던 외적 조건에도 유물을 찾아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발굴을 강행하거나, 다가오는 공사로부터 유물을 구해내기 위해 밤을 새서 발굴하거나 혹은 성급한 발굴을 막기 위해 꾀를 내는 등 집념과 지혜를 발휘하며 자신만의 기준과 원칙으로 현장을 지켜온 전문가들. 그들의 고충과 분투, 후회와 보람을 듣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귀한 경험이다.
거대한 성벽, 석탑에서부터 말 그대로 ‘좁쌀’만 한 유물까지. 그 크기와 종류는 각양각색이지만 이를 대하는 고고학자들의 마음가짐은 모두 진지함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이 책 끝에 가서 알게 된다. 발굴 당시에는 학부생이거나 말단 공무원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고고학계의 대가가 된 학자들이 들려주는 인생의 발굴 이야기, 자신의 작업에 대한 책임감과 역사에 대한 애정이 담긴 이야기는 단단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