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비밀
2017 공쿠르상 수상작
짧지만 강렬한 공쿠르상 수상작 『그날의 비밀』 출간
공쿠르상 수상작 『그날의 비밀』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 최고의 권위를 지닌 공쿠르상은 1903년부터 지금까지 수상작을 발표해 온 유서 깊은 문학상이며, 상금은 단돈 10유로에 불과하지만 수상작은 발표 즉시 엄청난 주목을 받는다. 150페이지의 짧은 소설로 2017년 공쿠르상을 수상한 에리크 뷔야르 역시 단숨에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며 『그날의 비밀』은 30여 개국에서 번역 계약이 이뤄지고 프랑스에서만 42만 부가 판매되었다. 『그날의 비밀』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뷔야르의 작품이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을 옮긴 바 있는 불문학자 이재룡 교수가 번역을 맡았다.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1930년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 『그날의 비밀』은 16개의 짤막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1933년 2월 20일, 독일 국회 의장 궁전에서 있었던 비밀 회동에 대한 것이다. 히틀러와 괴링을 만나는 자리인 이곳에는 크루프, 오펠, 지멘스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그다음에는 히틀러를 시종장으로 착각한 핼리팩스, 히틀러와 슈슈니크의 만남, 정신 병원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 수테르, 리벤트로프를 위한 작별 오찬, 오스트리아로 행진하다 멈춰 버린 독일군 탱크, 할리우드 소품 가게에 입고된 나치스 군복,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한 장면, 오스트리아 병합 다음 날 실린 네 건의 부고 기사 등이 이어진다.
2차 대전으로 향하는 유럽, 커다란 재앙은 살금살금 다가온다!
에리크 뷔야르의 역사 다시 읽기, 역사 다시 쓰기
뷔야르는 자신의 작품을[소설roman]이라 부르지 않고[이야기r?cit]라 부르며 대표작 『그날의 비밀』 외에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스페인 정복자들을 다룬 『콩키스타도르』(2009), 1차 대전을 다룬 『서쪽의 전투』(2012), 식민지와 노예제를 소재로 한 『콩고』 (2012), 서부 개척 시대를 다룬 『대지의 슬픔』(2014), 프랑스 혁명이 배경인 『7월 14일』(2016), 종교 개혁 당시의 이야기인 『가난한 사람들의 전쟁』(2019)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관심사는 공식 역사의 조명을 받은 주연들보다는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무수한 조연들이다.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얼핏 사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건들을 다룬다. 『그날의 비밀』 또한 2차 대전 무렵을 배경으로 했음에도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외교적 협상이나 드라마틱한 전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뷔야르 특유의 블랙 유머로 버무린 장면들은 생생하게 살아나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1933년의 비밀 회동은 아직 2차 대전의 막이 오르기 이전의 모습이지만 예상치 못한 곳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는 강렬하고 가차 없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현재 진행형의 역사
뷔야르는 말한다.[한순간이라도 이 모든 것이 먼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작품을 읽고 나면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30년대, 유럽, 2차 대전은 너무나 먼 이야기 같지만 읽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히틀러나 괴링 같은 정치인의 뻔뻔스러움보다도 크루프 같은 기업가들의 무덤덤함이다. 정치인과 군인들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해도 기업가들은 놀라지 않는다.[그들은 뇌물과 뒷거래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며[부패는 대기업의 회계 장부에서 긴축 불가 항목]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가 죽고 다른 전범들이 처형당한 후에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나치당원의 금배지가 있던 자리에 독일 연방 공로 훈장을 달고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일상화된 부패, 정경 유착, 그리고 거대한 경제 권력의 위험성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구스타프 크루프가 별장에서 자신의 아내, 아들과 식사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2차 대전 당시 크루프사는 거대 군수 기업이었고 강제 수용소에서 노동력을 빌려 썼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치매에 걸렸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않았고, 냉전이 심화되자 아들 알프레트는 경영을 재개했다. 아버지는 과거 비밀 회동에서 1백만 마르크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쾌척했지만 아들은 유대인 생존자 한 명당 2,250달러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전범 기업의 문제 역시 우리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어느 것 하나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일이다.
추천사
굳어 있는 역사의 사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렉스프레스』
소심한 겁쟁이들이 어떻게 나치의 승리로 가는 길을 닦았는지 보여 준다.
『파리 마치』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독자들도 뷔야르에게 동의하게 될 것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이 책의 힘은 그 단순성에 있다.
『르 몽드』
에리크 뷔야르는 메스를 들고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해부한다.
『르 누벨 옵스』
에리크 뷔야르의 는 그 방식이 일관적이다. 버펄로 빌에서 프랑스 대혁명, 2차 대전에 이르기까지, 구석에서 찾아낸 조각들을 세심하게 모아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 흥미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르 수아르』
짧지만 충격적인 이야기.
『리르』
얇지만 강력한 한 권의 책
『포린 폴리시』
이 독특한 작품은 역사적 재앙을 가리고 있는 가식과 위선, 정당화를 벗겨 버린다
『월 스트리트 저널』
뷔야르가 전쟁, 제국, 식민지 사람들의 운명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날카롭다. 그는 블랙 유머의 대가다.
『뉴욕 리뷰 오브 북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슈피겔』
굳어 있는 역사의 사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렉스프레스』
에리크 뷔야르의 글은 맑고, 통렬하며, 가차 없다.
『텔레라마』
현재 우리의 민주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작품.
『엘 문도』
책 속으로
괴링이 발언권을 잡고 몇몇 사안을 힘주어 설명한 후 다시 3월 5일의 선거를 거론했다. 봉착한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선거 유세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치당은 수중에 한 푼도 없었고 선거 유세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순간 얄마르 샤흐트가 벌떡 일어나 좌중을 향해 미소 지으며 소리쳤다. 「자, 신사 여러분, 모금함으로!」
분명히 조금 돌출된 행동이었지만 이 제안이 사업가들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뇌물과 뒷거래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부패는 대기업의 회계 장부에서 긴축 불가 항목이며 거기에는 로비, 신년 인사, 정당 후원 등 다양한 명칭이 붙는다. 그래서 초청 인사의 대다수가 곧바로 수천 마르크를 쏟아부었고 구스타프 크루프가 1백만 마르크, 게오르크 폰 슈니츨러가 4만 마르크를 헌금한 덕분에 두둑한 금액이 수금되었다. 경영자들의 역사상 유일한 순간이자 나치스와의 미증유의 타협이라 볼 수 있는 1933년 2월 20일 회동은 크루프 일가, 오펠 일가, 지멘스 일가에게는 사업하다 보면 겪게 되는 매우 일상적 일화, 진부한 모금 활동과 다를 게 없었다. 이들 모두 나치 정권 이후에도 살아남았고 나중에도 정당의 능력에 비례해서 여러 정당에 돈을 대줄 것이다.
- 23~24면
그러나 2월 20일의 의미, 그 영구불변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이 사람들을 그들의 진정한 이름으로 호칭해야만 한다. 1933년 2월 20일 그날 오후, 국회 의장 궁전에 있었던 그들은 더 이상 오펠, 구스타프 크루프, 아우구스트 폰 핑크가 아니다. 그들은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중략)
그들의 이름은 바스프, 바이엘,아그파, 오펠, IG 파르벤, 지멘스, 알리안츠, 텔레풍켄이다. 우리는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을 알고 있다. 심지어 매우 잘 알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 사이에, 우리 속에 그렇게 존재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동차, 세탁기, 세제, 라디오 시계, 화재 보험, 그리고 건전지의 이름이다. 그들은 사물의 형태로 도처에 존재한다. 우리의 일상이 그들의 일상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를 치료하고, 옷을 입혀 주고, 빛을 밝히고, 세계 도처로 우리를 수송하고, 우리를 위로한다.
- 24~26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어쨌거나 형식을 갖춘 초대였다면 보다 확실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받았으면 좋았을 내용의 전보문을 작성했다. 자기가 꿈꾸었던 연애편지를 애인에게 받아쓰게 하는 것으로 흡족해하는 사람들도 있고 사랑이 그런 식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3분 후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자기가 히틀러에게 보내야만 하는 전문을 받았다. 그렇게 교묘한 소급 효과를 통해 침공은 초대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빵이 살로, 포도주가 피로 변해야만 한다. 그런데 또 다른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주 고분고분하던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아직 오스트리아의 껍질을 벗겨 팔아먹을 준비가 되지 않은 듯했다. 시간은 흐르는데 전보는 오지 않았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자정 무렵, 나치당원들이 권력의 핵심 자리를 이미 차지했고,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여전히 고집스레 전보문의 결재를 거부하는 와중에, 빈 도심에서는 살인, 폭동, 방화와 비명소리로 어지러운 거리에서 유대인들이 머리채가 잡힌 채 끌려다니는 등 광기 어린 장면이 이어졌던 반면,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영국은 드러누워 평화롭게 코를 골고 프랑스는 단꿈에 빠져서 세상 모두가 나 몰라라 하는 그 순간, 늙은 미클라스는 마침내 무거운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지치고, 아마도 역겨운 심정으로 마지못해 나치당원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오스트리아의 총리로 임명했다. 종종 커다란 재앙은 살금살금 다가온다.
- 80~81면
그 순간, 시계가 걸려 있는 피고인석에서 시간이 멈췄다.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프랑스 수아르』 특파원 자격으로 취재했던 케셀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경이롭습니다〉라는 단어를 듣자 괴링이 웃기 시작했다고 한다. 과장된 연기가 곁들여진 이 감탄사를 기억하며, 아마도 이 연극적 대사가 위대한 역사, 그 품위, 거대한 사건들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생각과 얼마나 대척점에 놓여 있는지를 느낀 나머지 괴링은 리벤트로프를 쳐다보고 웃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리벤트로프 역시 몸을 흔들며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국제 법정에 앉아서, 그들의 재판관들 앞에서, 전 세계의 기자들 앞에서, 그들은 그 폐허 속에서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이다.
- 116면
병합 다음 날,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에 네 건의 부고 기사가 실렸다. 〈3월 12일 아침, 공무원 알마 비로(40세)가 면도칼로 혈관을 끊은 후 가스 밸브를 열었다. 같은 시간대에 작가 카를 슐레징거(49세)가 자기 머리에 총을 쏘았다. 가정주부 헬레네 쿠너(69세)도 자살했다. 그날 오후, 공무원 레오폴트 빈(36세)이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 그들 행위의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평범한 기사는 수치스러운 진실로 채워져 있다. 왜냐하면, 3월 13일, 모두가 자살 동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말할 수 없지만 유일하고 동일한 원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 1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