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문학동네시인선 124)
“사랑은 사랑에게로 사랑일 수 없는 곳까지”
사람이라는 변심이 사랑이라는 뚝심으로
우뚝 서는 기적 앞에 두 손을 모으는 마음
문학동네시인선 124 황학주 시집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를 펴낸다.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근 32년 동안 꾸준한 시작활동을 해온 시인 황학주. 특유의 섬세한 촉수로 그 어떤 주제보다도 ‘사랑’을 기저로 할 때 제 시의 온도를 인간의 체온과 거의 흡사하게 맞춰왔다 할 시인 황학주. 인간과 인간이 포옹할 때의 온도가 가장 뜨겁고 인간과 인간이 돌아서 제각각 첫 발을 내딛었을 때의 온도가 가장 차가움을 제 시를 온도계로 재왔다 할 시인 황학주.
특히나 이번 그의 신작 시집은 그 처음과 그 끝이 전부 ‘사랑’으로 거룩하게 이룩되는 과정 속에 있다 할 수 있는 바, 그의 시력을 힌트 삼아 봤을 때 그의 첫 시집 제목이기도 했던 ‘사람’이 ‘사랑’으로 포개지는 과정 속에 있다 싶으니 묘한 재미 속에 뜻하지 않는 깨달음 속에 새삼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도 한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일평생 한 사랑일 수 있는가. 어떻게 그 한 사람이 일평생 그 한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가. 사람이라는 변심이 사랑이라는 뚝심으로 동상처럼 우뚝 서는 기적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두 손을 모으는 마음으로 이 시집의 제목을 다시금 읽어본다.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목숨 수(壽)가 수놓인 흰 베개가 차마 더러워질까 내 더러움을 아는 까닭으로 벨 수 없이 가만 쳐다만 볼뿐이던 잠시 잠깐의 망설임 같은 거, 그리하여 그 찰나에 갖다 붙여 보고 다시 뒤져보는 국어사전 속 거룩하다, 라는 단어 같은 거. 그래, 그렇듯 뜬 눈 속의 생과 감은 눈 속의 꿈을 거는 이가 있다면 사랑은 그 걸고 걸음만으로도 더는 수식이 필요 없을 놓여 있음 그 자체로 명징한 돌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총 5부로 나뉘어 담긴 이번 시집은 아픈 만큼 예쁘고 예쁜 만큼 아픈 시들의 집합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처음 사랑을 하던 그때로의 몸과 정신으로 자꾸만 돌아가게 하여 조금 웃게 하고 자주 울게 한다.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기도 하겠으나 몰라서 놓았던 마음, 알아도 놓을 수밖에 없던 마음, 그 마음들은 정말이지 왜 평생 어렵고 어려울 그것인가. 그럼에도 자꾸만 생겨나는 마음. 꽃처럼 피었다 지는 마음. 계절처럼 왔다 가고 갔다 오는 마음. 그 옛날 둘이 하나되곤 하였겠으나 냉정하게 따져보건대 “약여히 당신을 살아본 적이”(「여기엔 시간이 많지 않다」) 실은 있을 리 없었던 것도 같은 마음. 그 마음을 이제야 아는 것 같은 마음. 그 마음을 이제야 들킨 것 같은 마음. “마음이 뛰면 감고 마음이 멎으면 풀어도 되는 사랑일 때/ 생각나는 사람”을 오늘에야 만나 이렇게 고백하는 마음. “당신은 내게 너무나 첫사랑을 못한, 그렇고 그런 사람”(「당신을 위한 작은 기도」), 그러니까 이 시집은 어떤 둘에게는 “이 장르의 가장 진한 사담”(「노을 화첩」)으로 얼룩덜룩한 이야기일 텐데 바로 이러한 대목에서 이 둘의 숙명 같은 걸 그대로 지켜보고 섰는 나를 보게도 한다. “뽀삭뽀삭 눈에 밟히는/ 그 사람 오지 못한 길에서/ 그 한 사람, 마주치는 일”(「사려니숲길을 가는」), 그 속수무책, 그 어찌할 수 없음을 대체 누군들 어찌할 수 있으랴.
황학주의 이번 시편들을 읽어나가는 데는 무수한 느림이 동반된다. 공감은 빠른 이입일 것이나 “솔기 미어지는 사랑은 어디까지인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의 넓이와 깊이가 끊임없이 몸을 뒤틀어대는 탓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걸 사랑한다는 것”(「키스」)이다 할 때의 ‘그걸’은 얼마나 많은 발견을 품은 지시이련가. “눈을 뗄 수 없어 끝이 안 나고/ 발이 떨어지지 않아 지지 않는/ 이별들”(「노을을 위한 근정(謹呈)」) 와중에 “모든 나무는 혼자서/ 가슴에 울렁이는 것/ 흔들리는 것으로/ 어느새 특이해지지”(「해변고아원」)하고 나지막하게 읊조려주는 시인에게서 우리는 사랑의 있음, 그 존재의 더한 성숙으로 사랑의 오늘을 살아보려고 기대하는 이들의 설렘에 모터가 도는 소리도 뺏어 듣게 된다. 내 주변을 둘러보지 않겠는가. 내 안을 헤집어보지 않겠는가. “갈변하는 사랑을 꼭 쥔 사람”(「매화상회 앞으로 눈이 몰리기 시작한다」) 누구인가 하고. 그 사람에 대한 집중과 그 사랑에 대한 노력으로 내가 달라져가고 내가 변화되어갈 때의 조용한 흥분, 그 “연한 마음의 자줏빛 봉지들”(「다시 그걸 뭐라고 불러」)을 비밀처럼 고백처럼 안고 갖고 살아가도록 등을 밀어주는 황학주의 시편들. 무모하다 한들 세상 긴한 아름다움은 다 계서 파생되어 나온 것을, 하룻저녁 어느 입으로 이리 말하지도 않았던가. “사랑은 사랑에게로 사랑일 수 없는 곳까지”(「크리스마스에 오는 눈」) 가보는 일이라고!
“삶은 여기서 시 쓰는 조건인데”(「편도」) 겨울 여행자라 할 법한 시인의 추위 속에 노란 수선화라는 사랑이 깃들어 불과 같은 달과 같은 온기가 전신에 퍼져가는 느낌이다. 어딜 만져도 피가 돌고 있구나, 그 따스함이 손바닥을 관통하여 마음까지 전해지는 와중인데 불쑥 이런 마음도 들고야 마는 것이다. “한 눈송이를 당기는 한 수선화”(「얼만가 지나가는 아침」)의 힘이란 얼마나 가엾이도 센가. “식고 퍼진 사랑의 환상을 어깨에 메고 가슴에 죽을 흘리고 있는 나”(「5부두」)란 사람에게 돌이켜보면 “추억은 춥게 서서 춘 춤들뿐”(「해변에서」)일 수도 있었겠으나 이젠 좀 아니 그러할 것도 같은 것이 바로 이런 구절 덕분이다. “왜인지 집에 누군가가 와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폭낭에게 말 걸기」)라지 않는가. “모란을 읽는 사람은 모란을 계속 읽는 사람일 수밖에 없”(「모란잠, 좀 짧은 듯한」)듯이 사랑을 쓰는 사람은 사랑을 계속 쓰는 사람일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자나 깨나 평생 사랑이었고 여생 또한 평생 사랑일 것이 빤한 황학주의 이번 시집에서 우리는 그와 별개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우리 사랑만 욕심껏 떼와도 아주 좋을 성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넘치고, 또 넘치고 있을 것이므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