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장르문화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장르 너머로 확장시킨 영국의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 마크 피셔의 유작
러브크래프트, 필립 K. 딕, 데이비드 린치의 기이함과
대프니 듀 모리에, 마거릿 애트우드, 조앤 린제이의 으스스함까지
풍부하고 일상적이면서도, 정치적이고 철학적 방식으로 대중문화를 읽어내는 통찰력과 기교의 장르문화 비평서
기이한 것이란 특정한 형태의 동요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포함된다. 기이한 존재 혹은 대상은 너무나 이상해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혹은 적어도 여기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그런 존재 혹은 사물이 여기에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껏 차용해 왔던 범주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결국, 기이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이해가 불충분했을 뿐이다.
으스스한 것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질문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질문들과 관계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때에 여기 어째서 무언가 있는가? 무언가 있어야 하는 때에 어째서 여기 아무것도 없는가? 죽은 자의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 기억상실증 환자의 당혹스러운 눈─이런 것들은 버려진 마을 혹은 환상열석이 그러하듯 으스스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독창적이면서 진보적인 k-punk라는 문화비평 블로그로 2000년대 초반부터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던 마크 피셔는 2009년 첫 저작물이자 대표작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통해 문화 이론가로서 독자적 입지를 다지게 된다. 피셔의 2017년작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은 그가 항상 주목해왔던 장르문화와 인간의 본질을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파헤친 독특한 문화 비평서이다.
피셔는 (아마도 그가 가장 열렬한 애정을 가진 듯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대한 심오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H. G. 웰스, 필립 K. 딕, 데이비드 린치, 더 폴, 대프니 듀 모리에, 마거릿 애트우드, 조앤 린제이 등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전설이 된 장르 작가를 비롯, 포스트 록그룹까지 그들의 작품을 특별한 시각으로 해체, 분석한다. 그러나 사실 이 각각의 에세이는 모두 ‘기이함’과 ‘으스스함’ 그리고 이를 통합하는 보다 고차원의 거대 담론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저술가 유진 태커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의 리뷰에서 “알 수 있는 것의 한계, 느낄 수 있는 것의 한계, 성취될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이 책의 주요한 주제”라고 언급했다. 피셔는 책 속에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은 우주적 공포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자아와 세계의 일상적 관계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이는 피셔의 책을 관통하는 주제인 급진적 계몽주의까지 나아가는데, 바로 “인류가 세계 역사의 원인이 아니라 우리가 흐릿하게 직감할 뿐인 물리적 법칙의 결과에 불과하다면?”이라는 질문을 통해서이다. 러브크래프트의 모든 작품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샤이닝〉, 데이비드 린치의 최근 영화들이 그에 대한 예시로 언급된다.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 대한 피셔의 각기 다른 접근은,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아무도 구분 짓지 않은 것으로, 바로 이 측면에서 독자들을 흥분시킨다. 공포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1부 ‘기이한 것’에 이어 독창성을 드러내는 2부 ‘으스스한 것’을 통해 신체적 공포나 물리적인 끔찍함이 아닌, 서서히 옥죄는 공포와 인간의 운명과 관련한 정서의 으스스함을 설명한다. 피셔에 따르면, “기이한 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무언가가 끼어든 것이다. 바로 외부 세계, 미지의 힘에 대한 숨 막힐 듯하고 불가해한 공포심”을 뜻한다. 으스스한 것에 대한 피셔의 해석은 보다 독창적이다. 장소의 으스스함, 텅 빈 풍광의 으스스함, 폐허의 으스스함. 인간 주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빈 장소들에서 움직이는 것들. 으스스한 것에 대한 피셔의 에세이 중 압권은 책의 마지막 챕터 조앤 린제이 편이다. 소녀들의 미해결 실종사건에 대한 원작소설과 영화 〈행잉록에서의 소풍〉을 다룬 마지막 챕터야말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아무 해답도 없는 것이야말로 커튼 뒤에 무엇이 있으리라는 수수께끼로 기능한다.”
피셔의 특별하고도 이상한 생각들은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힘든 러브크래프트 소설과 같은 매력과 흥미를 유발한다. 이 책의 장점은 작품에 부여된 이전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광범위한 문화에 대한 이해와 함께 한 단계 나아간 심오한 분석을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기이함과 으스스함을 대비시킨 두드러진 주제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놓친 사상가이기도 한 피셔의 엄청나고 심오한 지식들과 뛰어난 글쓰기는 독자를 단번에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실 피셔가 제시한 모든 철학적 사유와 난해한 개념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기괴한 요소를 재미있게 다루는 그의 책을 읽고 나면 이 책에 등장한 작가들의 소설과 영화, 그리고 음악을 꼭 한 번 찾아듣게 되고 말 것이다. 앞으로 다시 만나기 힘들 이 희귀한 장르문화 비평서의 분위기를 읽고 마음을 열고 즐긴다면 200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기이함과 으스스한 존재들과 함께하는 환상적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감히 단언컨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은 독자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문화 비평의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책이다.
■ 추천의 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은 다채로운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문화적 미학에 대해 세심하게 풀어낸 짧은 연구서이다. 피셔가 제시하는 다방면의 사례들은 뱀파이어, 좀비, 악마라는 친숙한 진용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는 인간 지식의 한계, 공포의 다양한 형태, 모든 경계들의 모호함 등 호러 장르의 주요 주제들을 곧장 지적한다. 그의 단순한 개념적 구분은 이내 반전되고, 치환되고, 복잡해지면서 궁극적으로는 어떤 기괴하고 이질적이며 비인간적인 ‘저 너머’의 개념을 거부한다. 피셔에게 비인간적인 것은 인간 자체에 내재된 것에 가까운 것이다. _유진 태커(미국의 저술가, 《In the Dust of This Planet》 저자)
마크 피셔의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은 음울하고 어려운 것들에 관해 알기 쉽게 쓰는, 그리고 틈과 지하, 간과되었던 것에 대한 어휘를 찾아내는 드문 능력을 갖추고 있다. 나는 이 책을 빅토리아 시대 묘지에서 볼 수 있는 무너진 기둥 중 하나로, 갑작스럽고 너무 빨리 떠나 버린 삶과 업적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비평가들이 피셔가 이 책에서 이론화한 으스스한 것을 습득하여 이렇게 전율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장을 활짝 여는 작업을 계속해 주기를 바란다. _로저 럭허스트(영국 작가, SF 학자)
마크 피셔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서 자본주의와 외부 세계 사이의 연결고리를 다루는, 가장 정치적인 관찰까지 제시한다. 짧게 언급되긴 하지만 피셔는 자본에 으스스함이 내재되어 있다고 관찰한다. “무(無)에서 나왔음에도 자본은 소위 그 어떤 실재하는 개체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자본을 인간에 대한 위협으로 구조화하면서, 피셔는 그의 비평이 궁극적으로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 사회적 안녕과 관련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_제임스 러싱 대니얼(필라델피아대학 철학 연구교수)
■ 책 속으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의 공통점은 낯선 무엇에 대한 집착이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낯선 것 말이다.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의 매력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을 즐긴다’는 개념으로는 획득할 수 없다. 그보다 그 매력은 통상적 개념이나 인식, 경험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무엇, 외부 세계에 대한 매혹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매혹은 대게 어떤 불안이나 어쩌면 두려움까지 아우르지만,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이 반드시 무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여기서 외부 세계가 늘 친절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 세계에서도 공포는 차고 넘치게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공포는 외부 세계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_8p
H. P. 러브크래프트의 기이한 소설에 영감을 준 것은 다음과 같은 통찰이다. “지금부터 내 모든 이야기는 보편적인 인간의 규칙과 관심사와 감정들은 이 광대한 우주에서 전혀 유효하지도 중요하지 않다는 근원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러브크래프트는 1927년, 잡지 〈기이한 이야기들Weird Tales〉의 편집자에게 이렇게 썼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차원이든, 진정한 외부성의 본질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유기적인 삶, 선과 악, 사랑과 증오 같은, 인간이라 불리는 하찮고 덧없는 종족이 가진 그 모든 편협한 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야 합니다.” 이 ‘진정한 외부성’이야말로 기이한 것의 결정적인 특성이다. _22p
문, 문턱, 포털들의 중요성은 사이라는 개념이 기이한 것에 결정적임을 의미한다. 웰스의 이야기가 벽 뒤에 위치한 정원에서만 발생했다면, 기이한 충격을 자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C. S. 루이스의 이야기에서 기이한 감정이 엄밀하게는 나니아가 아니라 나니아 가장자리에 위치한 가로등 기둥에 부여되는 이유이다.) 이야기가 완전히 문 너머에 자리하면 우리는 판타지 장르라는 영역에 있게 된다. 이런 판타지 방식은 다른 세계들을 자연법칙에 맞추어 설명한다. 하지만 기이한 것은 세상의 불안정함, 외부 세계에 대한 개방성들을 노출해서 모든 세계를 자연법칙에서 벗어나게 한다. _43p
히치콕이 각색한 영화에 친숙한 독자라면, 듀 모리에의 원작은 놀라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듀 모리에는 공공연하게 히치콕의 영화를 싫어했다) 태양이 반짝이는 캘리포니아 배경 대신, 우리는 아직도 전후의 궁핍에 시달리는 우중충하고 폭풍이 몰아치는 콘웰을 마주하게 된다. 갓 연애를 시작한 시시덕대는 커플 대신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새들의 공격에 맞서 가정을 지키려는 가족─호킨 가족─이다. 어떤 면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에 에워싸인 채 판자를 덧댄 집 안으로 숨어드는 것에 초점을 둔 「새」는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의 선례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캐릭터들이 목가적인 공동생활에서 내쫓겨 로메로가 묘사하는 생존주의자의 와해된 삶으로 들어서는 과정을 보여 준다. _10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