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문구
책상 위 이상하게 좋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 『아무튼, 문구』
『뉴욕규림일기』에서 슥슥 쓰고 그린 귀여운 손글씨와 그림으로 여행의 매력을 기록했던 김규림 작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문난 문구 덕후이다. 학창 시절부터 아이돌 대신 문방구를 덕질했던 ‘뼛속 깊이 문구인’인 김규림은 자신의 잊을 수 없는 소중하고 따뜻한 기억들은 모두 문구와 얽혀 있으며 그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문방구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검정 플러스펜 하나로 족할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파도 파도 끝이 없는 세계, 문구. 평생을 문방구와 함께하고 싶은 문구인 김규림이 이 이상하고 아름답고 무궁무진한 세계를 함께 탐험해보자고 손을 내민다.
문구 소비에는 ‘실용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사실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종이 한 장과 펜 한 자루만 있으면 된다. 누군가에게는 문구가 정말 딱 그 정도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용성만을 가지고 논하기에는 수많은 문구점들에 꽉꽉 들어찬 수천 종류가 넘는 검정 볼펜들의 존재 이유를 좀처럼 설명하기 어렵다. 펜뿐만 아니라 다른 문구들도 그렇다. 자르기 위해서라면 가위 하나, 칼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내 책상과 서랍에는 재질과 컬러가 다른 수십 개의 칼과 가위가 있고, 언제 쓰일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스티커들과 엽서들과 새 노트들이 있다. 그렇다. 문구의 세상은 결코 실용성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일요일 저녁엔 문구점에 가요
일요일 저녁에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꼭 하는 의식 같은 것이 있으니, 바로 문구점에 가는 일이다. 일주일의 끝을 산뜻하게 마무리하는 데 문구점 방문만큼 좋은 것은 없다. 특별히 살 것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슬렁거리며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이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기분이다. 문구점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공기, 가지런히 놓인 여러 색깔의 펜, 각 잡힌 지류들을 보면 어딘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심지어 집보다 더 편안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자전거 바구니에 문구들을 한껏 사 담아 돌아오면서 ‘다음 한 주도 잘 살아보자!’ 하는 두둑한 마음까지 함께 안고 돌아온다.
작은 문구들의 힘을 믿는다
문구 소비에는 언제나 좋은 기운과 아이디어가 함께 따라온다고 믿는다.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문구를 사서 써봄으로써 돌파구 혹은 해결책을 얻은 적이 많다. 좋은 아이템이 장착되면 잘 싸우는 게임 캐릭터처럼 새 문구를 살 때마다 일주일치 에너지가 솟아나기도 하고, 열정이 끓어올라 새 취미를 만들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사인펜을 발견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예쁜 노트를 매일 가지고 다니려고 일기를 써왔다. 그러니까 문방구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불씨가 되기도 하고, 작업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기도 하고, 취향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 학창 시절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면서 생각하는 시간이 또래 친구들보다 많았던 것도, 숨 막히는 학창 시절에 조금은 숨 돌리며 취미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문구 덕분이다. 나는 생각보다 작은 문구들에게 훨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문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이다.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쓰거나 만드는 건 내가 나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만큼 나의 감정과 생각에도 곁을 내주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치면, 우선은 책상에 앉게 된다. 머릿속의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내가 느끼는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스친 아이디어를 놓칠세라, 혹은 새로 산 펜을 어서 테스트해보고 싶어서… 쓰는 이유도 가지가지다. 그저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만으로도 갑갑한 마음이 해소되고 위로를 얻는다. 때로는 지나간 기록 속에 담긴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위로를 해오기도 한다. 문구를 사용하면서 생겨나는 차분하고 고요한 순간들이 참 좋다.
문구인 여러분, 우리는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문구 소비에는 ‘실용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사실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종이 한 장과 펜 한 자루만 있으면 된다. 누군가에게는 문구가 정말 딱 그 정도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용성만을 가지고 논하기에는 수많은 문구점들에 꽉꽉 들어찬 수천 종류가 넘는 검정 볼펜들의 존재 이유를 좀처럼 설명하기 어렵다. 펜뿐만 아니라 다른 문구들도 그렇다. 자르기 위해서라면 가위 하나, 칼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내 책상과 서랍에는 재질과 컬러가 다른 수십 개의 칼과 가위가 있고, 언제 쓰일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스티커들과 엽서들과 새 노트들이 있다. 그렇다. 문구의 세상은 결코 실용성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문구를 사면서 실용성을 잣대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 굳이 실용적인 핑계를 찾아 소비를 하고 있을지 모르는 문구인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다. 문구의 진짜 가치는 실용성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예뻐서, 귀여워서, 써보고 싶어서, 그냥 사고 싶어서, 저걸 사면 오늘 하루가 더 나아질 것 같아서. 문구를 사고 싶은 이유는 실용적이라는 이유 말고도 너무나 많으니, 문구인 여러분, 우리는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