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재위 11년
냉혹한 혁명가이자 탁월한 국가경영자, 태종 이방원
왜 지금 그를 읽어야 하는가?
새로운 시각과 해석으로 다시 태어난
대한민국 정치 리더십의 고전, 『태종실록』 완역본
“진련이 어떻게 색의 행적을 알기에
그 지은 것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는가?”
태종 11년, 명나라의 이색 비명을 둘러싼 논쟁
국가는 한 척의 배와 같아서 역량이 부족한 리더가 키를 잡으면 그 배는 침몰한다. 우리는 리더의 역량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해왔다. 리더의 역할과 덕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지금, 가장 가까운 곳 즉 우리 역사에서 답을 찾을 때이다.
원대한 구상을 하고 확고하게 결의하며,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난세를 치세로 바꾼 왕이 있다.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 이방원이다. 『이한우의 태종실록 재위 11년』(21세기북스)은 태종의 재위기간 18년 중 태종 11년의 기록을 완역했다. 태종 11년, 명나라의 진련이 이색의 비문을 지어 보내왔다. 비문의 문구가 화두로 떠오르며, 찬자인 하륜은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정도전과 남은을 탓했고, 결국 정도전은 폐서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이색 비명의 논쟁은 자칫 탁상공론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태종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다.
예리한 시각과 올바른 해석을 통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동시에 태종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통찰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기존의 번역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담았으며, 실록 완역본을 처음 읽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번역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도 가슴 한편에 애민심을 잃지 않았던 태종 이방원의 진면목을 확인할 시간이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총 18권으로 발간됩니다.
난세를 치세로 바꾼 18년의 역사,
그 치열한 기록이 펼쳐진다!
태종 이방원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형제들을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 조선의 설계자라 평가받는 정도전을 죽인 ‘냉혈한’… 그에 대한 이해는 즉위 이전의 비정한 면모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태종의 자취를 좇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오랜 기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저자는 최근 역사 저술가로서 매진하며 우리 사회의 기본을 밝혀줄 고전 번역에 힘쓰고 있다. 군주의 리더십 함양의 필독서인 『대학연의』를 비롯해 『논어로 대학을 풀다』 등 ‘사서삼경’ 등을 번역해온 저자의 시선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로 이동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에 이르렀고, 그 성과를 묶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 ‘이한우의 군주열전(전6권)’ 시리즈를 집필했다. 이러한 행보에서 나아가 조선의 여러 왕 중에서도 가장 먼저 『태종실록』을 번역한 이유는 그만큼 태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큰 통찰을 주는 군주인 까닭이다.
나는 왜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 우리의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방대한 실록 번역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를 얻고 싶어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실록 중에서 『태종실록』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 _본문 중에서
태종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부터 왕이 되기까지 냉혹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였지만, 재위기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상왕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외교 전략을 펼치고 관제개혁에 힘쓰는 등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우리가 태종에 집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태종실록』 곳곳에는 세종의 한글 창제의 밑바탕이 된 민본정치의 기조가 담겨 있는데, 저자는 예리한 시각으로 이러한 부분을 짚어내며 태종의 정치철학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세종을 비롯하여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태종을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자, 우리 역사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군주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올바른 번역, 치밀한 해석, 섬세한 역주…
우리에겐 친절한 실록 완역본이 필요하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실록 원문의 편년체 서술을 따라 1년 단위로 책을 구성하여 재위기간 18년의 기록을 18권의 책으로 엮는 방대한 시리즈이다. 실록을 처음 읽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문 번역 과정을 친절하게 담았고, 실록에 등장하는 인물ㆍ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기존 번역물의 오류를 바로잡고 저자의 새로운 해석을 담아냈다. 번역본과 함께 한문 원문을 책에 실었고, 독자들에게 한문 읽기의 묘미를 전하고자 ‘원문 읽기를 위한 도움말’을 통해 저자만의 번역 노하우를 소개한다.
기존의 공식 번역은 한자어가 너무 많고 문투도 낡았다. 게다가 역주가 거의 없어 불친절하다. 전문가도 주(註)가 없으면 정확히 읽을 수 없는 것이 실록이다. 특히 실록의 뛰어난 문체가 기존 번역 과정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_본문 중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논문 표절과 무단인용 문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저자는 최근 연구부정행위검증 민간기관인 연구진실성검증센터에서 실시한 논문표절 예비검증에서 모범 사례로 꼽혔다. 특히 인용문 번역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번역에 대한 저자의 철학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결과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태종에 대한 탐구를 넘어『조선왕조실록』을 편집ㆍ요약본만으로 읽어온 독자들과 기존 공식 번역에 아쉬움을 느껴온 독자들 모두에게 실록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역사의 진면목이 살아 숨 쉬는 우리 고전을 만나다
“또 이르기를 ‘공양군(恭讓君-공양왕) 때를 당해 용사(用事)하는 자들은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려했다’라고 했으니 그때 우리 태조께서는 나라의 수상(首相)이 됐으므로 모르긴 하지만 용사자(用事者)란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겠다.”
_본문 중에서
명나라 진련이 이색의 비명을 지어 보냈는데, “공양군 때를 당해 용사하는 자들은 공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려했다”라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태종은 이 ‘용사자’가 태조가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고, 비명의 찬자인 하륜은 지탄받게 된다. 하륜은 이숭인과 이종학의 죽음을 거론하면서 정도전, 남은에게 탄핵이 집중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왕조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정도전은 폐서인이 되었다. 태종 11년에 발생한 이색 비명 논쟁은 사실상 태종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태종은 이 사건으로 많은 세력들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군주의 덕목은 동서양을 막론한 수많은 고전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우리의 고전에 담긴 선조들의 살아 있는 정신을 발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지금 상국(上國-중국)의 진련(陳璉)이 지은 이색의 비명(碑銘)을 보고 또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이 지은 글을 보니 모두 국초(國初)의 일을 말했다. 권근의 글에 이르기를 ‘이(?)와 초(初)의 무리를 (중국에) 보낸 것으로 꾸몄다[誣]’라고 했으니 이는 윤이(尹?)와 이초(李初)의 일로 그 당시 신민(臣民)들이 모두 놀랐던 일인데 지금까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일이다. 권근의 글이 이와 같다면 이는 허위로써 사실을 삼은 것이니 사관(史官)이 쓴 글도 잘못된 것이다. 또 이르기를 ‘청주(淸州)에서 문초받을 때, 공의 정성(精誠)이 하늘을 감동시켜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친 변(變)이 있었다’라고 했으니 이는 대개 윤이와 이초의 일로서 고황제(高皇帝)께서도 말씀한 바이고, 본국(本國)에서도 떠들썩했던 일이니 어찌 거짓이 있겠는가? 또 풍수(風水)의 재변(災變)은 어느 시대나 없는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반드시 이색의 일에 감동된 것이겠는가? 또 이르기를 ‘공(公)은 부처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으니 공이 벽사(?寺)에 있었던 일을 내 눈으로 직접 본 바인데 권근이 어찌 그 진부(眞否)를 알겠는가? 또 이르기를 ‘공양군(恭讓君-공양왕) 때를 당해 용사(用事)하는 자들은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려했다’라고 했으니 그때 우리 태조께서는 나라의 수상(首相)이 됐으므로 모르긴 하지만 용사자(用事者)란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겠다.”_215~216쪽 (태종 11년 신묘년 6월 무오일 기사)
“하륜과 권근은 모두 나의 충신인데 어찌 우리 태조를 비방했겠는가? 이색(李穡)이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과 본래 틈이 있었고 하륜과 권근은 모두 이색의 문인(門人)이기 때문에 보복하려고 생각한 것일 뿐 실상은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또 사직(社稷)에 관계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보복하는 것은 대신(大臣)의 도리가 아니다. 권근은 이미 죽었으니[物故] 추후에 죄줄 수 없고, 하륜은 이미 집에서 침체(沈滯)해 국정에 참여해 듣지 않으니 경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태종 11년 신묘년 7월 경신일 기사)
“개국의 공은 남은(南誾)이 많았으니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 힘써 아뢴 일이 있었으나 정도전(鄭道傳)은 개국할 때에도 일찍이 한마디 말도 없었고, 그 뒤에 적서(嫡庶)를 분변할 때에도 한마디 언급하지 않았고, 고황제(高皇帝)에게 득죄(得罪)함에 이르러서는 굳이 피하고 가지 않고 사(私)를 끼고 임금을 속였고, 흉포(凶暴)한 짓을 자행해 그 몸의 허물을 없애고, 이숭인(李崇仁) 등을 함부로 죽여 그 입을 멸했으니 죄가 공(功)보다 크다. 마땅히 전민(田民)을 적몰(籍沒)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라.”_334쪽 (태종 11년 신묘년 8월 신묘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