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시인선 125)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시인선 125)

저자
이은규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일
2019-08-29
등록일
2019-09-23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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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떠다니는 문장들은 다 어디로 가서 죽을까”

당신이 건네준 문장,

그 문장과 문장 사이를 진동했던 내 시간의 흔적, 그것은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1.



2012년 첫 시집 『다정한 호칭』으로 독자들에게 따뜻하고 애틋한 시세계를 열어 보인 이은규 시인. 그 무엇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다정하게 불러 새로이 돌아보게 한 시편들에 많은 독자들이 꾸준히 이 시집을 찾았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그가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49편을 담아 돌아왔다. 꽃이 피고 계절이 바뀌는 등의 익숙한 소재로부터,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것들/일들의 운동성과 그것이 환기하는 존재와 부재를 포착해내는 데 탁월한 그. 마치 한곳에 소리 없이 선 채 만물이 피고 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듯한 그만의 섬세한 세계는 두번째 시집에서도 아름답고 우아하게 펼쳐진다. 다음의 시를 보자.



2.



누가

봄을 열었을까, 열어줬을까



허공에서 새어나온 분홍 한 점이 떨고 있다

바다 밑 안부가 들려오지 않는데, 않고 있는데



덮어놓은 책처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말을 반복했다

미안(未安)

잘못을 저지른 내 마음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말

이제 그 말을 거두기로 하자, 거두자



슬플 때 분홍색으로 몸이 변한다는 돌고래를 본 적이 있다

모든 포유류는 분홍분홍 울지도 모른다



오는 것으로 가는 봄이어서

언제나 봄은 기억투쟁 특별구간이다

그렇게 봄은 열리고 열릴 것

_「봄의 미안」 부분





그때의 바다라면 파도라면 이야기라면, 한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이어질까 속삭이고도 다시 피어오르는 구름 같은 시간을 나눠 갖자 물결구름의 문장이 모래알에 닿기 전 흩어진다면, 차라리 음악일까 그러니 재앙 같은 청춘이여 오라, 아름답게 부서져버릴 마음이라면 더더욱

_「세상에서 가장 긴 의자」 부분





긴 겨울의 끝 어느 날 문득 ‘바로 오늘부터 봄이구나’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분홍 꽃잎 하나 날리는 것을 목격하는 바로 그 순간. 그렇게 봄이 열린다는 것은 시인에게 쏟아지는 기억과 마주해야 함을 의미한다. 언젠가 내 마음이 안녕하지 못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슬프게 분홍빛으로 변한 세상을 마주해야 함을 의미한다. 봄이 왔다, 는 것은 결국 봄이 간다, 는 것과도 같은 말이기에, 봄은 잠시 머무르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투쟁 특별구간’이라는, 이것은 시인에게만 해당하는 ‘봄의 미안(未安)’은 아니리라. 출렁이며 밀려왔다 쓸려가는, 아름답게 부서져버리는 파도를 앞에 두고 ‘재앙 같은 청춘’을 곱씹는 것 역시.



이렇듯 낯설지 않은 자연의 시어들을 그것이 가진 이미지 대신 운동성에 중심을 두고 맛볼 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읽는 이의 가슴에 곧바로 스민다.



3.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채시(采詩)’의 흔적이다. 떠다니는 문장들의 채집, 이상과 백석의 시에서부터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대사에 이르기까지, 사랑했던 이와 사랑했던 작품으로 추측되는 넓은 스펙트럼의 채집 활동은, 시인에게 “고요한 식물채집이 아닌, 뼈아픈 과제로” 주어졌다. “역사는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사람과 사람들이 나눈 문장들이”라는 데 기반을 두었으리라.(「채시(采詩)」) 때로는 채집 대상의 문장을 받아 적는 나와 그것을 부정하는 나 사이에서 흔들리는 문장으로, 때로는 바래고 표백되어 투명해진 문장으로, 때로는 그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지우는 날들과 그 날들을 넘어서기 위한 날들에 써내려간 문장으로 시집 곳곳에 박혀 있다. 나를 구원한 문장들인 동시에 “나는 그의 앵무입니까, 앵무가 아닙니까” 묻게 하는 문장들. “때로 한 문장을 넘어서기 위해서/ 모든 밤이 필요하기도” 한 법일지니. “도망쳐온 모든 밤에 안녕과 재앙이 있기를”(「하얀 밤, 앵무」).



4.



더불어 이은규 시인의 시세계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시간의 흐름, 계절의 변화, 희미해지는 기억, 무엇보다 그것의 반복에 대한 천착이 이번 시집에서는 시의 소재와 시의 형식으로까지 나아간 대목을 짚어볼 만하다. ‘줄넘기’ ‘이중나선’ ‘캐치볼’ 등의 반복의 운동성이 강한 소재가 그러하고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당신을 다 만나게 되지 않을까”(「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하는 대목의 둥근 지구, 그 움직임 또한 마찬가지다. 「봄의 미안」 「검은 숲」 「세상 쪽으로 한 뼘 더」 「홍역(紅疫)」 「빗장」 「탐구생활」 「웃는 돌」 「매핵(梅核)」 「캐치, 볼」 등 많은 시에서 등장하는 구조적 반복은 가령 다음과 같다.



“구름아 물결무늬 번지는/ 꽃잎 장난 하는 고양이야”와 “꽃잎 장난 하는 고양이야/ 구름아 물결무늬 번지는”(「웃는 돌」의 첫번째 연과 마지막 연), “지난봄을 다 걷지도 못했는데/ 이 가을 잘못 날아든 매화 소식은/ 꽃 이야기입니까, 기억 이야기입니까”와 “사랑 이야기입니까, 재앙 이야기입니까/ 이 가을 잘못 날아든 매화 소식은/ 지난봄을 다 걷지도 못했는데”(「매핵(梅核)」 첫번째 연과 마지막 연), “누가/ 봄을 열었을까, 열어줬을까”와 “봄을 닫기 전에, 닫아버리려 하기 전에/ 누군가”(「봄의 미안」 첫번째 연과 마지막 연).



미묘하게 변형된 대칭의 형식은 첫 시집 이후 시인이 몰두한 지점에 대해 추측해보게 한다. 시인이 맞서오던 시간의 흐름, 그 틀에서 시구의 배치와 시선의 전환으로 새로운 의미를 능동적으로 촉발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닐지. 시인의 다음 행보를 기다리며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갈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들을 음미해본다.



이은규 시의 반복은 단순히 과거의 슬픔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안이함으로 묻어두려 했던 부끄러움과 바다 아래로 갇혀버릴 뻔했던 어떤 가능성들을 다시 꺼내올리려는 시도가 아닐는지요. (…) 그것은 미덥지 못한 점괘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긴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건네받은 문장으로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선언처럼 입 밖으로 꺼낸 당신의 문장이 나의 행동을 이끌어가고, 그 문장과 문장을 고치고 부정하며 진동하는 시간 속에서 걸어간 거리만큼이 다시 내 운명을 주재하는 것 같습니다. _조대한 평론가, 해설 「봄의 꽃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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