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형리
탐정소설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에 자리매김한 뒤렌마트의 문제작!
추리, 또는 탐정소설이라는 전통적 카테고리를 이어받되 그 전형적 도식에 반기를 든 내용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인정받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판사와 형리』. 1950년대 출간되자마자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대중적·문학적인 성취를 인정받은 《판사와 형리》, 《혐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두 작품은 모두 괴물이 되어버린 범죄자를 쫓는 노회한 수사관을 그린다. 《판사와 형리》는 경찰관 슈미트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이가 많고 죽을 날이 멀지 않았지만 수사관으로서의 능력은 녹슬지 않은 베르라하는 동료인 찬츠와 수사를 진행한다. 슈미트의 시체가 발견된 차 옆 길가에서 찾아낸 총알 하나, 그리고 희생자의 일기에 쓰여 있는 한 글자, G. 이 두 번째 단서를 파고든 베르라하는 냉혹하고 영리한 수수께끼의 사나이, 가스트만의 집으로 향한다.
《판사와 형리》의 연장 시점에서 서술된 또 다른 작품 《혐의》는 베르라하가 우연히 펼쳐 든 ‘라이프’지의 사진 한 장이 사건의 발화점이 된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전형을 따르는 명백한 범죄 현장이 아예 없다. 다만 사진 속 수용소 의사가 현재 취리히에서 버젓이 고급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와 동일 인물일 수 있다는 수사관의 막연한 ‘혐의’만이 사건의 발달이 된다.
두 사건 모두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계획보다는 우연이야말로 세계를 지배하는 원칙이자 창작의 원천이라는 세계관과 절망하지 않고 세계와 맞서 싸우는 나약한 개인의 무한한 가능성에 믿음을 보여주는 인생관을 피력한다. 완전범죄가 가능한가를 두고 벌어진 하찮은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태연히 살인을 저지르고 40여 년 동안 베르라하의 추격을 피해 다닌 가스트만과,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는 엠멘베르거의 모습에서 저자는 악의 대행자로서 인간의 어두운 면모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