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저 어둠 속을 걸어보아라.
어둠도 익숙해지면 길이 된단다.”
고금란의 세 번째 소설집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는 길 찾기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사람 사이로 난 길을 따라나서고 있다. 그 길은 각자의 길이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고통을 넘어선 한 가지 인간이라는 운명의 공동체와 만나질 길이기도 하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사는 와중에 제각각 삶의 길을 찾아내는 여러 인물이 띄우는 무지개도 그리하여 가지각색일 수밖에 없다.
행복한 유년기 추억을 품고 귀향한 50대 중반의 남자가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이 현실에 길들여진 자신을 발견하고는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음주운전을 감행함으로써 틀을 깨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애쓰는 모습도 나름의 길 찾기이고, 남편에게 의존적이던 삶을 깨부수고 시골 낯선 환경에서 홀로서기하려는 여자의 모습도 제 삶에서의 길 찾기이다.
어쩌다가 탈북하게 된 한 사내가 남한 사회에 변변히 적응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새 삶의 방향을 찾는 것이나, 굶주림을 피해 의도적으로 탈북한 한 남자가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려 애쓰지만 그조차 쉽지 않아 새 삶으로 난 길을 끙끙대며 걷는 것이나 매한가지 길 찾기다.
변화하는 시골 생활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소(牛)를 키우며 원래 시골 아낙이 그랬다는 듯이 먼지 뽀얗게 쓰고 종종걸음 치며 일하는 여자의 삶도, 반려동물로서 개를 가족처럼 대하는 현재 시점에서 젊은 날부터 그랬듯이 부지런히 몸 놀려 개장사를 해서 판 돈으로 생활을 영위하려 드는 여자의 삶도 온종일 길 찾기라 보여진다.
그뿐인가. 생산력을 잃은 여자의 몸으로 제 핏줄이 떠돌던 땅을 찾아 어머니의 삶으로 거듭나는 여자의 삶과, 짐승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려 애쓰는 여교사의 삶도 나름의 길 찾기이다. 또, 평생 결핵을 앓아온 남편 수발과 좋은 일보다 후회스럽고 억울한 일이 더 많은 생애였지만 천 년이 지나도 계속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를 올려다보며 보잘 것 없는 존재이거나 덧없는 생이라 느낄 이유가 없어진 삶과,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라 여기며 남편과 젊은 날 조우했던 한씨와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통해 노구(老軀)의 자신을 바라보는 삶 모두 살아지며 걸어가는 한 길이다.
그리하여 삶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연단되고 조련되어 각각의 무지개를 띄우니 이것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희망이요 남루한 삶을 견뎌내는 지렛대이다. 그 삶을 걸어가라고, 그 길을 만들어가라며, 작가 고금란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쓰고 말하고 있다.
용서하거나 잊을 수는 있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고통을 길들일 순 없다. 주체의 의지에 복종하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엄살이기 십상이다. 따라서 고금란의 소설에서 고통의 조련이란 상처 입은 자의 자기단련일 것이다. 작중인물들을 둘러싼 현실은 삼엄하지만, 자기단련을 통해 인물들은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와 근거를 발견한다. 이런 의미에서, 고금란 소설의 인물들은 빛을 찾아 어두운 황천바다를 헤쳐나가는 조타수와 같다.
- 황국명, <고금란 소설 따져 읽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