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
우리는 엄혹한 시대였지만 연세대학교 교내 서클 「연세문학회」에서 만나 잘 놀았다. 아주 신나게, 아주 희한하게, 아주 은밀하게. 푸른 20대를 어깨동무하고서 푸르디푸르게 보내다가 서른 고갯마루 앞에서 기형도는 그만 푸른 노을 대신 검은 노을을 보고 말았다.
어언 만 29년이다. 어느 날 갑자기 기형도가 우리 곁을 기막힌 방식으로 떠난 지도, 벌써....(중략)... 아무리 기막힌 죽음일지라도 대개는 시간과 함께 통증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퇴색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허나 나에게 있어 기형도는 예외였다.
나는 왜 지금까지도 기형도를 한시도 잊지 못할까...(중략)... 도대체 왜, 나는 어이하여 기형도한테 이다지도 오래도록 연연하는 것일까.
이 소설은 여기에 대한 나의 진솔한 답이자 기록이다.
_저자 서문 중에서
29세에 세상을 떠난 기형도,
29년 만에 풀어내는 기형도 삶과 죽음의 비의(?意)!
이 세미_픽션을 쓴 계기는 기형도문학관 유품 수집을 총책임지고 난 후다.
여러 정황상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 부득이 먼저 간 글벗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졌다. 해서 2016년 4월부터 2017년 11월 10일 개관일까지, 기형도와 인연이 조금이라도 닿는 사람이라면 누가 됐든 집중적으로 수소문하고, 통화하고, 만났다. 그 과정에서 기형도 매력을 숱하게 공유하기도 하고 재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었다. 특히 사이버 공간에서의 기형도는 내가 알던 기형도가 아니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건 아니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살아 있는 문우로서 악랄한 폄훼를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서 가능하면 기형도의 푸른 날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독자들의 최종 판단을 돕자는 취지다.
_저자 후기 중에서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는 기형도와 대학 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김태연이 29년간 품어왔던 기형도와의 추억을 풀어낸 소설이다. 저자 김태연은 기형도와 주고받은 편지나 스스로의 기록 등을 토대로 소설 형식을 빌어 이 소설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1979년 대학 1학년 때 같은 대학 서클이었던 ‘연세문학회’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고 토론하고, 세상을 아파하고, 철학과 문학과 수학을 얘기했던 그 시절을 작가 김태연은 기형도를 중심축에 놓고 충실히 재현한다.
기형도가 무엇을 아파했고, 무엇 때문에 절망했으며, 무엇 때문에 29세의 새파란 나이(1989년 3월 7일)에 종로 2가 부근의 한 극장에서 새벽 3시 30분경 사망했는지를 이 소설은 들려준다.
기형도가 세상을 떠나고, 작가에게 29년 동안 아프게 간직되었던 슬프고 기쁜 기록들이 이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철학과 시를 사랑한 기형도, 수학과 소설을 사랑한 김태연. 둘은 단짝이 되어 연세대의 캠퍼스를 누비며 20대의 찬란한 청춘을 보내는데...
이 소설은 연세대 공과대학에 입학한 20살의 허승구(작가 김태연의 분신, 김태연의 본명은 김승구이다)가 역시 20살의 기형도를 우연히 만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허승구는 대학 첫 강의에 실망하고, 술을 진탕 마신 다음 캠퍼스에 쓰러져 잤는데, 깨어보니 서클룸이었다. 쓰러져 자는 허승구가 안쓰러워 들쳐 업고 서클룸으로 데려온 자가 바로 기형도. 기형도는 여기가 ‘연세문학회’ 서클룸이라며 문학회에 가입할 것을 권한다. 허승구가 기형도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문학회에 가입하면서 두 사람의 좌충우돌 대학생활은 시작된다. 정법대에 입학했으면서도 시인이 되고자 하는 기형도와 공대에 입학했으면서도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허승구. 그 둘은 성격적으로는 반대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 반대에 있음으로 해서 더욱 서로를 인정하면서 우정을 쌓아나간다. 기형도가 철학과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는 차분하면서도 섬세한 여성적 감성의 소유자라면 허승구는 수학과 문학을 사랑하는 상당히 거친 돈키호테형 인간형. 그들을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바로 문학이었던 것. 그들에게 공통분모는 또 있다. 집이 몹시 가난했던 것, 그리고 술로 인해 가족을 팽개치다시피 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는 것.
이들은 20세 초반 대학 신입생답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인생의 비의(?意)를 찾아나간다. 가령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남자 동성애자들의 온상이었던 종로 3가의 파고다극장에도 함께 처음으로 가보게 된다. 극장 화장실에서 충격적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문학적 자산을 쌓아나간다.
사람들에게 늘 친절하고 그림 잘 그리고 학업 성적도 놀랄 정도로 우수하고, 불문과 여자 대학원생도 홀딱 반하게 할 정도의 노래 실력을 갖춘 기형도. 그렇지만 그는 해마다 5월 16일이 되면 알 수 없는 절망에 빠져 마치 제의를 지내듯이 끝없는 울음 속으로 빠져드는데, 이 짐작할 수 없는 친구의 절망을 허승구는 옆에서 조용히 함께 한다.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혈압이란 지병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도한 허무주의에 경도된 기형도와 좌충우돌의 낭만주의자 허승구가 함께 짜가는 20대 대학생의 풍경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을 입사(入社)소설로 정의 할 수 있다. 성장소설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 소설 속의 이야기(과정)를 거치면서 이들은 각각 시인으로 소설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지만...
1989년 3월 6일 저녁 허승구는 기형도와 통화하면서 다음날 저녁 파고다극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그 전화 통화 후 7, 8 시간이 지난 3월 7일 새벽 기형도는 그 극장에서 영원히 잠들어버렸으므로.
이 소설은 기형도의 시가 왜 ‘출구 없는 절망’을 노래했는지, 그 짧은 삶과 죽음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사실적으로 이야기해 준다. 때문에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빙자한 기형도에 대한 평전이다. 기형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누구보다도 우정으로 아꼈던 문학 동지가 기형도를 추억하며 쓴 진혼곡이다. 이 소설을 통해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사랑하는 수많은 독자들은 기형도 시의 비밀스러운 의미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며, 오해와 억측으로 포장된 기형도 죽음에 대한 진실에도 보다 사실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