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답하다
책으로 다시 만나는 EBS 기획시리즈 32시간 특강
〈김영수의 사기와 21세기〉
이 책은 지난 2007년 32회에 걸쳐 진행되면서 각계각층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EBS 기획시리즈 특강 “김영수의 사기와 21세기”를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저자는 지난 1년간 32회분 강의 녹취를 주제별로 정리하고, 생생하지만 거친 데가 있는 현장 강의의 입말을 책에 어울리는 간결한 문체로 다듬었다. 단순한‘다듬기’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저자는 강의를 다시 한 번 비판적으로 되새기고 《사기》 공부에서 얻은 영감을 오늘의 우리 삶에 보다 깊숙이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저자 김영수에 따르면 사마천은 오늘과 같은 상황, 곧 꿈과 희망과 이상의 기반인 믿음을 상실한 상태를 곧 ‘난세’라고 했다. 저자의 일관된 문제의식은 역사의 지혜와 통찰을 오늘을 사는 사람과 사회의 맥락에서 되살리는 것이다. 사마천의 삶과 《사기》를 통해 오늘을 ‘난세’로 진단한 저자는 난세 극복을 위한 처방 또한 역사에서 찾고자 한다.
사마천과 《사기》에 대하여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기원전 90년?)은 사관(士官)을 가업으로 해온 사마씨(司馬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관인 아버지 사마담으로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20대 초반에는 전 중국을 돌며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돌아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49세 때, 흉노에게 패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 한무제의 심기를 거슬러 최악의 치욕인 궁형을 받게 된다. 목숨만 붙어 있을 뿐 인격과 명예로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사마천은 42세 무렵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역사서 집필에 매달렸으며, 궁형의 치욕을 딛고 14년에 걸쳐 《사기》를 완성한다.
《사기史記》는 130권 52만 6,500자에 이르는 방대한 통사이자 사마천이 상고할 수 있는 모든 시공간을 갈무리한 세계사다. 또한 연대기, 연표, 인물, 주제별 논문을 종합한 중국 정사 서술의 표준인 ‘기전체(紀傳體)’의 효시이기도 하다. 정치경제 같은 큰 담론뿐 아니라 저잣거리 인심까지 아울러 황제에서 광대, 동성애자, 자객, 장사꾼에 이르는 온갖 인간 군상을 그려낸 문학적 성과도 대단하다. 김영수는 이 책을 통해 사기 읽는 보람을 다음과 같은 14개 항목으로 제시한다.
?재미있다
?감동이 있다
?진퇴(進退)의 지혜가 있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다
?불우한 사람에 대한 정당한 동정과 연민을 일깨운다
?참된 복수관이 있다
?다양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실용적이며 윤리적인 경제관이 드러난다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로이 틔울 만한 풍자가 있다
?인간의 천재성과 창의력을 오롯이 받아 안을 수 있다
?중국을 이해하는 열쇠다
?잃어버린 고대사의 실마리다
?기구한 삶을 승리로 이끈 ‘인간 사마천’이 있다
이 책에 대하여
한국에서 사마천의 삶과 학문, 그리고 《사기》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학자는 드물다. 저자 김영수는 공부를 함께 할 동지가 드문 연구 풍토 속에서도 연구에 매달려 중국 현지로부터 그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중국 사마천학회 회원 및 중국 소진학회 초빙이사라는 직함과, 무엇보다 사마천의 고향 중국 섬서성 한성시 서촌의 주민과 행정당국이 함께 받아들인 유일한 비중국인 명예촌민이라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저자는 지난 20년간 이 연구에 몰두하며 사마천의 삶과 《사기》가 가진, 보면 볼수록 새로이 보이는 수천, 수만 개의 얼굴을 발견해왔다. 그 가운데 저자를 가장 깊이 매혹시킨 것은 특히 인물의 행동과 인간관계다. 2,000여 년 전 특정 상황과 시대에 놓인 사람의 행동과 인간관계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삶에 겹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연구와 공부를 망라했다고 할 수 있는 2007년 EBS 특강도 《사기》의 ‘사람’을 따라갔고 이를 주제별로 정리해 엮은 이 책도 ‘사람’을 따라가고 있다. 저자는 본기 12권, 표 10권, 서 8권, 세가 30권, 열전 70권을 합해 모두 130권이나 되는 《사기》 전권 가운데 112권, 곧 52만 65000자 가운데 무려 86퍼센트에 해당하는 분량에 ‘사람’을 할애한 사마천의 마음속에 주목한다. 그리고 《사기》에 담긴 다양한 인간의 삶을 서술의 중심에 놓고 인물 저마다의 모습과 삶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삶에 어떻게 유용한 좌표가 될 수 있는지에 파고든다. 저자는 역사가 인간에게 ‘영감’을 준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강조하는데, 그에 따르면 역사가 주는 영감은 삶을 살아나가는 데 꼭 필요한 지혜의 원천이며 현상의 본질과 이면을 동시에 꿰뚫는 바탕이다. 수많은 인간의 선택과 고뇌가 절실하게 투영된 《사기》의 인물과 그들이 펼치는 드라마는 오늘을 창조적으로 열어나갈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기》를 이처럼 깊이 읽고 있지만 문단 곳곳에 《사기》의 흥미진진한 인간 드라마를 배치하고, 예로는 《사기》 속 인물이나 사건이 출처가 된 영화나 드라마를 들어 읽는 이를 끌어당긴다.
곧 진시황의 천하 통일과 초한쟁패?춘추오패의 굴기와 조락?고귀한 인물의 타락과 섹스 스캔들?한국과 다를 바 없는 전국 시대 약소국의 외교 들을 압축해 보여주는가 하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영화 〈영웅〉〈신화〉〈진용〉〈무간도〉〈미이라 3〉 들이 어떻게 창작자의 상상력을 북돋아 소프트파워로 작동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며 주제를 풀어낸다.
한국인의 《사기》 독법을 강조한 점 또한 지나칠 수 없다. 20년 독서와 공부의 결과겠지만 저자는 사마천과 《사기》에 매몰된 독자가 아니다. 저자는 《사기》야말로 동북공정 등 일련의 중국 역사학 작업의 진원지이자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가장 유력한 코드 가운데 하나임을 지적하며 내 사는 처지를 지각한 역사 읽기를 환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