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Self (개정판)
“[셀프]는 얀 마텔의 모든 소설이다. 얀 마텔 소설의 미래다.
나는 이보다 깊고 세밀하게 몽땅 벗어버린 일기를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
얀 마텔 첫 장편소설 [셀프] 리커버 특별판
[셀프]는 여성, 남성이라는 이분법으로 갈라진 인간의 정체성을 탈피하기
위한 처절하고도 철저한 고안이면서, 동시에 한 작가의 탄생을 위한 기획이다.
여기 남자로 태어나 18년을 살다가 여자가 되어 20대를 통과한 다음
다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섹슈얼리티를 갖게 된 한 인간의 셀프가 있다.
그중에서도 사랑의 기쁨, 죽음과 같은 폭력을 경험하는 여성의 시간이 소설의 중심에 놓여 있다.
_김혜순(시인,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얀 마텔이 탄생시킨 주인공 ‘나’는 자상한 외교관 부모 밑에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 젊고 지적이고 솔직하고 변화무쌍하고 허심탄회하고 장난스럽고 삶을 포용할 줄 아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세상을 살펴보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어린 ‘나’는 지렁이처럼 부드럽고 암수를 한 몸에 지닌 존재가 부럽고 경이롭다. 그리고 남자답지 못한 ‘나’를 ‘호모’라 놀리는 사내아이들의 폭력과 편견에 상처를 받는다.
그런 그(또는 그녀)가 놀라우리만치 풍부하고 인간적이고 복잡하고 달콤새콤한 세상을 굽이굽이 거치며 살아온 이야기가 바로 [셀프]다. ‘나’는 세상을 누비면서 나를 찾고, 느끼며 살아간다. 낯선 여행지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는 법을 배우고, 낯선 사람, 낯선 언어, 낯선 모든 것들 속에서 마음을 열려 한다. 유년기, 사춘기의 ‘나’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공감할 수 있는 성장의 드라마로 굽이치며 흐르고, 그 눈에 띄지 않으나 어느 순간 알아차리게 되는 커다란 성장의 면면들이 유쾌하고 의미심장하게 펼쳐진다.
“‘오늘 난 사랑할 사람을 찾아냈어.’
그것은 희망이나 망상이 아니라 약속이었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섹슈얼리티를 갖게 된 한 인간의 셀프가 있다
우리의 몸-성별은 나에 관한 핵심적인 질문이고
즐거운 탐구여야 하는데, 그것이 폭력으로 강제된다면?
얀 마텔은 이 문제를 ‘세상의 모든 지식’으로 풀어놓는다.
읽기의 쾌락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아름다운 문장, 지적인 즐거움,
정치적 깨달음을 한 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황홀한 체험이다.
_정희진(여성학자, [정희진처럼 읽기] 저자)
그러던 ‘나’는 열여덟 살이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여성으로 성이 바뀌는 체험을 한다. ‘나’는 예상치 못한 이 변화에 허둥댄다. 그러나 여성이 된 ‘나’는 우주의 이치에 잇닿아 있는 듯한 월경을 체험하고는 두렵지만, 황홀감에 빠진다. 그리고 그 변화를 받아들인다. 변한 것은 육체일 뿐이다. 육체의 변화로 인해 ‘나’는 보다 본질적이며 완전한 것, ‘사랑’을 지향한다. 그리고 사랑을 시작한다. 그 사랑은 이성애이거나 동성애다. ‘나’는 어머니 같은 여성, 친구 같은 남성, 아버지 같은 남성, 형제 같은 남성, 오누이 같은 여성과 서툴거나, 맹목적이거나, 헌신적이거나, 때로는 집착에 괴로워하고 때로는 의심에 아파하는 사랑을 한다. 진정한 사랑, 티토라는 남자를 만날 때까지.
여성이 된 ‘나’는 다양한 인물들과 차례로 사랑에 빠지고, 한때는 무모하리만큼 육체에만 탐닉하는 사랑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진실한 사랑을 만나 지상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그 사랑이 채 결실을 맺기도 전, 영혼을 부수는 것과 같은 끔찍한 고통(강간)으로 인해 다시 남성이 되고 만다. 소설은, 오랜 방황의 끝에 선 주인공이 따스한 여성의 젖가슴에 자신의 등을 기대며 “그녀의 젖가슴이 나를 통과해서 내게도 젖가슴이 생”기기를 바라며 잠이 드는 안타까운 장면으로 끝난다.
성장의 두려움을 느끼고, 정체성에 관해 의문을 품고,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거나 상처받는 존재,
인간이란 존재와 변화무쌍한 삶의 이야기
독특한 내용을 넘어서서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가운데 하나는 마텔 특유의 빛나는 문장력이다. 소설의 문장은 프랑스어와 영어를 모두 사용하는 작가(또는 주인공 ‘나’)의 의도대로 원문과 번역문을 2단으로 편집하여 병치시킨다. 작가는 두 가지 언어의 느낌과 운이 서로 비교되도록 단어들을 배치하여 “각각의 언어는 그 자체로서만 일가붙이의 엮임인 것이 아니라 쌍둥이, 즉 그 옆에 있는 언어의 해당어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두 언어 사이의 소통일 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교류와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겪었을 법한 성性에 관한 아이의 끝없는 의문과 엉뚱한 호기심, 그로 인해 벌어지는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로 출발하는 이 소설은, 점차 녹록치 않은 인간의 삶, 정체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로 무게를 더해간다. 누구나 삶의 도정에서는 성장의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의문을 품고, 어리석음에 빠지고,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거나,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약해지곤 한다. 작가는 인간이 살면서 겪는 정신과 육체의 대립과 조화, 갈망의 본질에 대해 섬세하고 유려한 그만의 필치로 주인공 ‘나’로 대변되는 인간이란 존재와 그를 둘러싼 변화무쌍한 삶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기발한 문체와 구성, 그리고 인간 욕망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통찰로 독자들을 휘어잡는 이 작품은, 재미와 감동이라는 소설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소녀 노아를 어머니에게 소개하던 날 그녀로부터 이 세상의 성이 남성과 여성, 단 두 개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에 빠진다. 이 넓은 세상이, 내가 사는 이 신비한 우주가 왜 지렁이처럼 근사한 암수 한몸이 될 수 없는지 아리송하다. 외교관이던 부모님을 따라 여러 나라에서 살던 나는, 프랑스에서 살 때는 아무 문제도 없었던 긴 머리칼 때문에 캐나다의 학교로 전학 간 첫날 아이들로부터 “호모!” 소리를 들으며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부모님은 내가 고교 2학년일 때 갑작스런 비행기 추락 사고로 모두 사망하고 나는 고아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침대 시트에 내 가슴에서 무수히 떨어져 내린 털이 수북하고, 빨간 생리혈이 묻어 있다. 나는 이제, 여자다. 여자가 된 나는 여행길에 오르고, 사십 대 중반의 포근한 여성 러스와 사랑을 나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영화에 빠진 대학생, 중년의 영문학 교수와 차례로 이성애를 하지만 이 사랑이 나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과도 같은 남자 티토를 만나 생애 처음 그와 보금자리를 꾸리고, 아기를 갖는다.